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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91199778900
· 쪽수 : 332쪽
· 출판일 : 2026-03-27
책 소개
시민의 최소한의 힘이다
공화정은 단순한 정치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정당성을 시민의 판단 아래 두고, 공적 문제를 함께 숙고하려는 오래된 약속이다. 고대 공화정에서 근대 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공화국은 언제나 질문하는 시민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바탕에서 권력은 위임되었고, 끊임없는 의심과 검증 속에서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오늘날 굳게 믿어왔던 그 토대가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다. 넘쳐나는 정보는 사유를 깊게 하기보다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고, 판단은 점점 단순해진다. 언어는 설득의 도구가 아니라 선동의 수단으로 전락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질문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해석에 기대어 현실을 받아들인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맹신이 자리 잡고, 분별이 멈춘 자리에는 권력이 언어를 대신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균열을 역사적·사상적 맥락 속에서 다시 짚는다. 공화정이 어떻게 작동해왔는지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시대의 사건과 사상을 교차시키며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한다. 아울러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스스로 판단하는 힘이 어떻게 형성되고 흔들려왔는지 차분하게 따라간다. 역사적으로 공화정은 반복해서 위기에 놓였고, 그때마다 흔들린 것은 제도가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던 사고와 태도였다. 이 책은 그 균열을 따라가며,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반공화주의적인 사고를 돌아보게 한다.
권력은 언제나 언어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 언어는 반복된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단순히 공화정 체제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이미 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반복되는, 익숙하지만 불편한 장면들을 다룬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능력이 의심받고, 동성애는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논쟁거리로 소비된다. 특정 집단에는 범죄와 위험이 덧씌워지고, 사실이 확인되기도 전에 이름과 얼굴이 먼저 유통된다. 맥락이 제거된 헤드라인과 이미지가 여론을 만들고, 분노는 순식간에 정당한 판단처럼 작동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타인은 동등한 시민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이 된다.
이 장면들은 결코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에서부터 근대의 인종주의와 배제의 논리, 전쟁과 위기의 순간마다 반복되어온 선동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언제나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해왔다. 대상은 달라졌지만, 낙인을 찍고 공포를 조직하며 동의를 끌어내는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은 이러한 현상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한다. 개별 사건을 고립된 예외로 보지 않고, 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왜 동일한 메커니즘이 되살아나는지 그 조건과 경로를 탐색한다. 질문이 멈춘 자리에서 편견이 먼저 작동하고, 분별력이 약해진 순간에 광기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어떻게 축적되어왔는지 깨닫게 한다.
진정한 민주 공화정은 제도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는 감각 위에서만 유지된다. 그 감각이 흔들리는 순간 공화국은 스스로의 원리를 배반해왔다. 과거의 장면들은 낯선 사례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음을 차분하게 비춘다.
익숙한 해석에 머무르지 않는 태도,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내는 힘
역사와 사건을 하나의 교훈으로 정리해 건네는 책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사건을 반듯하게 나열하지 않는다. 금속활자와 인쇄문화, 조선 왕권의 정통성 문제, 국보 제1호의 기원, 스페인 내전과 엘 클라시코, 차별과 마녀사냥, 앨런 튜링과 드레퓌스에 이르는 서로 다른 장면들이 한 권 안에서 맞물린다. 독자는 익숙하다고 여겼던 역사와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게 된다.
각 꼭지는 서로 다른 시대와 주제를 다루지만, 읽다 보면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한 꼭지를 읽으면 익숙한 상식이 흔들리고, 다음 꼭지에서는 그 질문이 다른 장면으로 옮겨간다. 그래서 이 책은 단지 ‘옳은 말을 하는 책’으로 머물지 않는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생각이 번져가는 책, 이것저것 읽는 재미가 살아 있는 책으로 남는다.
물론 그 재미는 가볍지 않다. 각각의 이야기는 흥미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문제로 이어진다. 독자는 읽는 과정에서 자신의 해석과 기준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왜냐고 묻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하나의 답을 제시하기보다, 흩어져 있던 역사적 장면들을 통해 스스로 생각의 기준을 세우게 만드는 책이다. 읽는 재미와 사유의 밀도를 함께 끌어올리는 보기 드문 인문서다.
목차
들어가며_ ‘반공화주의 시대’를 슬기롭게 건너는 힘 4
I부 역사와 기억
“국사(國史)는 곧 국혼(國魂)이다.” ─ 박은식, 『한국통사』
역사의 유산, 기억의 책임
_ 금속활자의 나라, 그러나 인쇄혁명은 없었다
권력의 조건, 역사에 되묻다
_ 정통성이 취약한 권력은 어떻게 스스로 무너지나
국보(國寶)가 남긴 흔적들
_ ‘제1호’라는 이름에 남은 식민의 그림자
불망비를 ‘불망(不忘)’하라
_ 망각 위에 세운 비석, 누구를 위한 불망인가
‘엘 클라시코’는 내전을 기억하고 있다
_ 경기장 너머, 스페인 내전의 긴 그림자
II부 정의와 불의
“침묵은 동의를 의미한다 (Qui tacet, consentire videtur)” ─ 로마 법언
차별은 ‘익숙함’ 아래 숨겨져 있다
_ 관행의 이름으로 강제된 성차별의 서사
집단적 광기, 변주는 계속된다
_ 매카시즘에서 계엄령까지, 반복되는 마녀사냥의 역사
‘보이지 않는 손’에 관한 오독
_ 애덤 스미스를 오해하는 사람들과 자본주의를 둘러싼 착시
그날, 시상대에 선 사람들
_ 피터 노먼에서 쉰들러까지, 연대를 선택한 이들
동성애, 침묵 속의 존재들
_ 튜링의 비극, 우리가 외면한 권리
진실은 어떻게 처벌되는가
_ 드레퓌스 사건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차별을 수치로 여기는 사회
_ 로드니 킹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III부 문화와 권력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 유베날리스
‘한 도시 한 책’, 책이 도시를 바꾼다
_ 도서관, 시민, 그리고 독서 운동의 재구성
고전은 왜,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_ 시카고대에서 시작된 질문
‘먹는 것’에도 가치가 필요하다
_ 닭고기 수프를 약속한 앙리 4세와 ‘먹방’의 전성시대
우리는 지구라는 한 마을에 산다
_ 혁명과 라키 화산, 그리고 우리가 외면한 경고
폭력의 언어로는 평화를 설계할 수 없다
_ ‘반국가’와 ‘종북’의 낙인 정치를 넘어
저자소개
책속에서
수많은 혁명은 으레 반혁명과 직면했고 때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왕정복고가 반복되었다. 혁명 이후의 혼란은 대개 혁명의 본질이 아닌 부스러기 이익을 좇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 정신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혁명 주변에 어슬렁거리던 자들까지 가세하여 전리품을 찢어 가려는 이전투구에 대한 환멸도 한몫했다. 그러나 핵심은 시민 다수의 각성과 현실 인식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설픈 계몽의 단계에서 혁명이 먼저 도래했다면, 그 간극은 이성적 판단으로 메워졌어야 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권력의 향배에만 쏠리면서 그 공백은 방치되었고, 그 결과가 역풍으로 되돌아왔다. 거의 모든 혁명은 그렇게 혹은 유사하게 반복된다. 그래도 다행히 인간의 지성은 진보의 길을 택했고, 그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게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과정이다. _ ‘들어가며’ 中
역설적이게도 책을 숭상하는 문화가 강했음에도 출판이 대중을 향한 지식의 확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은 조선 출판문화의 구조적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통제가 우리의 출판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깊었다. 근대 후기까지 조선에 서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출판의 통제와 제한은 단순한 제도적 문제를 넘어 새로운 지식의 생산과 수용을 가로막았고, 대중의 지적 능력 향상을 제약함으로써 결국 출판문화가 훨씬 더 발달한 일본에 뒤처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주권 상실이라는 참혹한 현실로 이어졌다. 우리가 여전히 ‘금속활자의 주조’라는 기술적 성취의 최초성에만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_ ‘역사의 유산, 기억의 책임’ 中
정통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정통성은 한 번의 선거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국민과의 소통, 실리 있는 정책 판단, 위기 앞에서의 절제된 대응을 통해 유지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정통성을 외형적 명분에 고착시키거나 극단적 정파성으로 대체하려 할 때, 정권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위기를 자초하게 된다. 선조, 광해군, 인조의 시대가 그러했듯이,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선조, 광해군, 인조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통성의 취약함을 드러냈다. 시대는 달리했지만, 정통성의 기반이 약할 때 외교는 경직되고 민심은 멀어진다는 점은 같다. 이를 소홀히 한 정권은 어떤 명분이나 진영도 끝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_ ‘권력의 조건, 역사에 되묻다’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