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 네이버책
  • 알라딘
  • 교보문고
"걷는"(으)로 1,059개의 도서가 검색 되었습니다.
9788965023517

걷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동네 의사 30년의 결론)

나가오 가즈히로  | 지상사
15,930원  | 20250903  | 9788965023517
틈새 시간에 걷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걸으면 왜 아이디어가 떠오를까? 걷기만 해도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 걷기로 암이 개선됐다고 한다 걷기 때문에 건강한 것인가 건강해서 걷는 것인가! 먼저 시간이 생겼을 때 10분 정도 걷는 것부터 시작해 본다. 처음에는 10분 정도로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걷는 즐거움이나 기쁨을 알게 되면 좀 더 걷고 싶어질 것이며 정신을 차리고 보면 15분, 30분으로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될 것이다. 물론 체력에는 개인차가 있으니 10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준일 뿐이다. 그날의 몸 상태도 살펴야 하니 상황에 맞게 조정하면 된다. 어쨌든 자주 걷기를 습관화하길 바란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무리 해도 걷지 않겠다는 환자를 “걷기는 종교라고 생각하십시오. 걷기교입니다”라고 설득한다. 환자에게 “이상한 종교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일단 한 달 정도 해보세요”라고 말하면 환자가 깜짝 놀란다. 하지만 한 달 후에 만나자 “선생님, 좋아졌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예요!”라고 깊은 감사의 말을 하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다. 환자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저자에게는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 우리는 생로병사를 거스를 수 없다. 어차피 늙고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지구 전체의 역사로 보면 정말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수명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누가 뭐래도 몸도 머리도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걷기교’가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돈이 들지 않지만, 현세에 이익은 확실히 있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을 느낀다. 가족이나 동료와 함께 먹는다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저녁이라면 최고로 행복하다. 이러한 행복 호르몬 샤워를 인간은 예부터 지금까지 계속 음미해왔다. 하지만, 현대 의료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 늙거나 병이 들면 흰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격리해 맛없는 식사를 주고 반드시 약으로 절여버린다. 저자 자신도 옛날에는 그런 곳에 몸을 담았다. 하지만 30년 전에 동네 의사가 된 이후로는 약보다도 자연 치유력을 높이는 의료에 눈을 떴다. 또한 재택 의료 현장에서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많은 환자에게 배웠다. 임상 현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스트레스가 확 줄어들었다. 40년 동안 의사로서 일한 내 솔직한 감상은 ‘의료는 인간 본연의 행복을 위해 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병은 스스로 치료할 수 있으며 예방할 수 있다’라고 널리 알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틈새 시간에 수시로 ‘걷기’다. 걸음 수와 시간을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매일 걸으십시오’라고 하면 화내는 환자들이 있다. ‘산책이라도 좋습니다’라고 다시 말하면, ‘아, 산책이면 되는 건가요?’라고 받아들인다. 걷는 습관을 들이려면 걷기를 그다지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걸음 수도 시간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스마트폰을 꺼내 걸음 수가 표시되는 꺾은선 그래프를 보여주는 환자가 있다. ‘오늘은 OO보 걸었습니다’라든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았습니다’라고 기쁜 듯이 이야기한다. 이러한 데이터에 성취감을 느끼면서 걷는 것도 좋다. 걸음 수나 시간을 신경 쓰지 말고 빈 시간에 수시로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걸음 수도 거리도 속도도 시간도, 일절 신경 쓰지 말고 걷는 장소에도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날씨가 안 좋아 외출할 수 없을 때는 방안에서나 집 복도, 계단을 걷는다.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조금 걸어보는 것이다. 걸음 수나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장소도 신경 쓰지 말고, 자주 조금씩 걷는 것을 나는 ‘바지런히 걷기’라고 부른다.
9791199428508

한강물길 따라 걷는 경기옛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의 경기옛길 테마여행 가이드)

최철호  | 아임스토리
16,200원  | 20250904  | 9791199428508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의 한강물길 따라 떠나는 경기옛길 역사기행 한강은 태백산 오대산 자락에서 솟아난 한 줄기 물이 양평 두물머리를 거쳐 서해로 흘러가기까지 수많은 이름과 사연을 품어왔다. 대수(帶水), 아리수, 한수, 경강… 시대마다 달라진 이름 속에는 이 강이 견뎌온 전쟁과 화해, 삶과 죽음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 『한강물길 따라 걷는 경기옛길』은 한양도성에서 시작된 역사가 강을 따라 어떻게 경기도의 마을과 나루, 그리고 바다로 흘러갔는지를 발로 걸어 기록한 책이다. 양근에서 출발해 광주·성남·노량진을 거쳐 양천·영등포·파주·고양에 이르고, 강화와 교동도까지 이어지는 길 위에서 저자는 강과 지류가 만든 마을, 그 속에 남은 삶의 흔적을 하나하나 더듬는다. 책 속에는 임진왜란 행주대첩이 벌어졌던 강변, 남한산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길, 포구와 나루에서 김포·강화로 이어지던 수운의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 책이 걷는 길은 ‘공식 경기옛길’이 아니다. 지도에 없는, 그러나 사람들의 발길과 기억이 이어온 길이다. 저자는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잊고 살아왔는지를 묻는다. 오늘의 풍경 곁에 어제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아,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강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시간을 따라 걷는 일이다. 600년의 역사와 오늘의 삶이 포개진 한강물길 위에서 지금도 숨쉬는 경기도의 얼굴을 만나게 될 것이다.
9791175010017

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

박시우  | 걷는사람
10,800원  | 20250808  | 9791175010017
걷는사람 시인선 127 박시우 시집 『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 출간 고통은 그림자처럼 내려앉고, 음악은 그 곁에서 조용히 흐른다 “남풍은 보았을 거야 피로 물든 가로수와 구덩이에 굴러떨어지는 그림자들을” 박시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가 출간되었다. 첫 시집 이후 10년, 이번 시집은 오랜 침묵과 침잠의 시간을 지나 다시 언어 앞에 선 시인의 내밀한 고백이자 다짐이다. 시인은 “한동안 무기력증에 빠졌다. 진부한 언어와 낡은 서정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위로는 음악이었다.”라고 말하며, 그간의 시간을 ‘음악’이라는 감각으로 건너왔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곧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미학적 중심이 음악임을 암시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은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연민, 사회 구조에 밀려난 이들을 바라보는 윤리적 시선, 그리고 슬픔과 애도를 언어로 견디려는 시적 실천이 촘촘하게 이어진다. “바람의 파르티타가 흐르는 겨울밤 / 털모자를 쓴 노동자들이 / 발전소 굴뚝에 올라갔다”(「공소公所」)는 시구처럼, 시인은 가장자리로 밀려난 현실의 장면들을 정면으로 응시하지만, 그것을 고발하거나 재현하는 방식보다는 조용히 감싸 안는 서정으로 담아낸다. 그의 시에서 고통은 고요하게 흐르며, 그 고요는 음악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음악은 이 시집에서 감정의 매개체이자 구조 그 자체로 기능한다. 시집의 정수를 응축한 「시적이고 종교적인 어느 변두리의 저녁 음화音畫」는 음악이 언어로 어떻게 전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재개발을 앞둔 마을의 저녁 풍경, 허기를 채우는 국수 한 그릇, 그리고 서로를 향한 눈빛까지 시인은 이 모든 장면들을 마치 하나의 악보처럼 구성해 낸다. 이 시는 ‘음화音畫’, 즉 소리와 풍경이 한데 어우러진 정서적 회화로서의 시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시적 감각은 단지 감성적 장식에 머물지 않고, 고통의 현장에 실제로 개입한다. “꽃잎이 아들 밥그릇에 붙은 밥알처럼 보여 / 거리를 벌벌 기어다녔네”(「흠향」) 같은 구절은 특정한 사건을 지목하지 않으면서도,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슬픔의 정서를 정확히 환기시킨다. 이때 애도의 대상은 이름을 넘어, 시대를 건너며 사라져간 모든 ‘그늘’로 확장된다. 박시우의 시는 비극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 주변을 맴도는 방식으로, 혹은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윤리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 시선은 종종 음악적이고, 때로는 기도처럼 느껴진다. 문종필 평론가는 이러한 시인의 태도를 음악 속에서 시를 쓰는 시인으로 정의하며, 그것이 박시우 시의 고유한 차이이자 미덕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 시집에는 ‘글렌 굴드’, ‘사라방드’, ‘아리에타’ 같은 음악에 관한 구체적 언급들이 자주 등장하며, 그 감각은 시의 리듬과 톤을 자연스럽게 지배한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포착된 존재들도 이 시집의 중요한 축이다. 삼각김밥으로 하루를 버티는 청년, 폐지를 줍는 노인, 고시원에서 지내는 노동자, 언덕 위의 고양이 가족까지, 이들의 모습을 시인은 단지 스케치하지 않는다. 그는 이들을 고요한 리듬으로 안아주며, 다정한 거리로 바라본다.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의 ‘거리감’은 단절이 아니라 연대의 다른 방식이다. 무책임한 외면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지속적으로 응시하는 윤리의 언어다. 시집 후반부에서는 시인의 사적인 기억과 정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국수 한 그릇, 요양원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 더 오래 살면 짐이 될까 봐 걱정하는 노모의 고백 같은 장면은 슬픔과 책임이 동시에 얹힌 풍경으로 다가온다. 또한 “능소화 모가지들을 한 아름 꺾어 / 이끼 우물에 던졌다”(「장원의 여름」)와 같은 구절에서는 여름이라는 계절 이미지 속에 생과 사의 감각을 절묘하게 포개 놓는다. 『내가 어두운 그늘이었을 때』는 음악과 고통, 애도와 희망, 거리와 밀착이라는 상반된 요소들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한 시인의 분투다. 음악으로 고통을 달래고, 언어로 다시 그 음악을 품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닿으려는 이 시집은 조용하지만 단단한 리얼리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9791175010055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 (투르크계 오구즈 부족의 이야기)

유수진 외 옮김, 방민호 감수  | 걷는사람
14,400원  | 20250829  | 9791175010055
고대 유라시아의 영웅서사시,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 한국어 첫 출간 한국과 아제르바이잔을 잇는 문화의 다리 용기와 우정, 공동체의 지혜가 오늘의 독자에게 되살아나다 아제르바이잔을 대표하는 고전 서사시 『키타비-데데 고르구드』가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 출간의 결실을 맺었다. 이번 번역은 유수진, 마심리 레일라 두 번역가가 맡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방민호 교수가 감수하여 완성되었다. 이는 아제르바이잔 판본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한 최초의 한국어 번역본이라는 점에서 문학·문화 교류사적 의의가 크다.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는 투르크계 오구즈족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문자로 정착된 작품이다. 총 열두 개의 이야기 가운데 이번 한국어판에는 여섯 편이 실렸다. 현자 고르구드 아버지를 중심으로 베이래크, 우루즈, 바사트, 가잔 칸 등 영웅들의 모험과 시련이 펼쳐지며, 용기·우정·정의·공동체적 연대를 노래한다. 아제르바이잔 국립 과학 아카데미 이사 하비브바일리 회장은 축사에서 이번 출간을 “한-아제르바이잔 문학·문화 교류의 새로운 장”이라 평하며, 이 책이 국경을 넘어 두 나라를 잇는 다리가 되기를 기대했다. 공동 번역자 유수진 작가는 이번 작업을 “초원을 달리며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모험”에 비유했다. 그는 특히 「바사트가 외눈박이 테패괴쥐를 물리친 이야기」를 언급하며, “사건의 배경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서사 방식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유수진 작가는 “세심한 고민과 작은 용기가 모여 역사가 되고 시가 된다”는 메시지를 한국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번역한 레일라 박사는 어린 독자들에게 특별히 따뜻한 당부를 전한다. “영웅은 초능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만이 아니라, 용기와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는 모든 사람”이라며,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가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들에게 꿈과 도전의 힘을 북돋워 주기를 바랐다. 방민호 교수는 감수의 말에서 “사랑과 이별, 싸움과 용서, 떠나고 돌아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서 한국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의 마음이 하나로 만나는 연못을 발견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이 이야기들이 “더 드넓고, 모험에 차 있으며, 리드미컬한 노래를 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초원을 잃어버린 우리가 지금 꼭 읽어야 할 이유”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이번 번역은 아제르바이잔 국립과학아카데미 바디르칸 아흐마도브 교수, 바쿠 국립대학교 와기프 술탄리 교수의 조언과 자료 제공 덕분에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아제르바이잔 디아스포라 재단의 지속적 후원이 책의 출간을 가능하게 했다.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는 단순히 외국 고전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이는 고대 민족의 집단적 기억이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도 깊은 감동과 지혜를 전한다. 용기와 정의, 공동체 정신을 담은 이 서사시는 어린이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삶의 용기를 북돋우는 거울이 될 것이다. 이번 한국어판 출간은 한·아제르바이잔 문학 교류의 새로운 이정표이자, 동서양의 고대 영웅 서사가 오늘의 독자와 다시 만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뜻깊은 순간이다.
9791175010062

사막여우가 우는 저녁

초(정솔)  | 걷는사람
10,800원  | 20250912  | 9791175010062
사막여우의 울음이 멎은 자리, 다정한 생의 기척이 피어난다 “사막을 한 삽씩 퍼 올리며 모래 먼지를 만든다 그렇게 나를 평정해 가는 사막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솔 시인의 시집 『사막여우가 우는 저녁』이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거대한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시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다. 패권의 언어와 독단적인 시선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시인은 오히려 작은 존재와 사소한 사물에 눈을 돌리며, 그 안에서 다정한 관계와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낸다. 해설을 쓴 유종인 시인은 정솔의 시를 두고 “자아에 갇히지 않고 자기 응시의 정성스러움으로 나아가려는 용기”라고 말한다. 그의 시는 자기중심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 곤충, 식물, 사물 같은 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자벌레」에서 작은 벌레에게 인품을 평가받는 화자의 모습은 인간이 더 이상 우월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없음을 보여 주며, 「수작」에서 땅콩 세 알이 각기 다른 길을 가는 장면은 생명이 서로의 선택과 만남 속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일깨운다. 정솔의 시선은 거대하고 특별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작고 평범한 존재들의 움직임에서 세계의 진실을 길어 올린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힘은 일상의 사물과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버려진 종이컵과 꽃잎을 마주한 「공즉시색 색즉시공」에서 시인은 “입술은 색이고 컵은 공이다”라는 직관을 끌어내며, 고정된 관념을 유연하게 풀어낸다. 덧없는 시간을 사고파는 「시간 마켓」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 주말여행, 파도 소리, 자전거 하이킹” 같은 순간들이 새로운 삶의 구성 요소가 되어, 시간조차도 함께 나누고 다시 살아낼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뀐다. 이렇게 사소한 사물과 장면 속에서 시인은 삶을 새롭게 조립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정솔의 시는 멈추지 않는다. 「소망」은 죽음을 앞둔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를 통해 애틋한 어스름의 시간을 그려내고, 「순수의 기척」에서는 신생아의 웃음을 바라보며 “일생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고 싶은데”라는 고백을 들려준다. 웃음을 되찾고자 하는 이 소망은 삶의 무게를 견디는 근원적인 힘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무거운 주제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다정한 회복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독자와 나누려 한다. 동시에 그는 오늘의 사회와 생태를 응시한다. 「포노 사피엔스」에서는 스마트폰과 배달 문화에 길든 인간형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내며, 편리함 뒤에 숨어 있는 고립과 중독을 드러낸다. 「손」에서는 곶자왈의 덩굴을 가져와 돌보려 하지만 끝내 시들어버리는 순간을 기록하며, 인간의 욕망이 자연과 맺는 불안한 관계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시집의 「신성리 갈대숲」은 흔들림을 두려움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바꾸어내며, 깨어 있는 존재의 태도를 전한다. 『사막여우가 우는 저녁』은 이처럼 작은 곤충과 씨앗, 종이컵과 웃음, 갈대숲과 덩굴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눈길이 닿는 모든 것들을 새로운 빛으로 되살려낸다. 거대한 패권의 논리를 거부하고, 미세하고 사소한 것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에게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불러낸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울림 속에서, 정솔의 시는 독자에게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살아갈 힘을 건네며, 일상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9791175010000

밤이 고요한 것은

홍명진  | 걷는사람
14,400원  | 20250730  | 9791175010000
고요히 소멸하며 타자를 감각하는 존재들, 응시의 윤리로 직조된 여덟 개의 이야기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홍명진 작가의 소설집 『밤이 고요한 것은』이 출간되었다. 이번 작품집은 우리가 익히 아는 목소리가 아닌, 잘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각에 천착한다. 작가는 이질적이거나 주변부에 있는 존재들을 향해 다가가고, 그들이 머무는 공간에 자신을 조용히 놓는다. 이 소설집은 그렇게 말 많은 서사가 아닌, 들리지 않는 감각을 감지하고자 하는 문학적 태도에서 시작된다. 표제작 「밤이 고요한 것은」은 이러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밤이 고요한 것은」은 돌발성난청을 앓는 화자가 이웃의 돌연한 죽음을 마주하며 세계의 불안을 감각하는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균열과 침묵의 진동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돌발성난청으로 인해 감각의 단절을 겪는 주인공은 공공도서관에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며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삶은 점점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흔들리는데, 다세대주택 위층에 사는 분홍 여사가 사라졌음을 인지하면서 화자는 세상의 고요 속에 숨어 있는 불안을 감지하게 된다. 밤이 고요한 것은 어쩌면 들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신호가 겹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세계가 소음이 아닌 침묵의 밀도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환기시킨다. 이러한 태도는 소설집 전반을 관통한다. “답례 없는 순수 증여”로 존재를 구성하는 인물들, 삶의 가장자리에 머물며 끝내 중심으로 나아가지 않는 인물들, 연약함을 껴안고 스스로를 비워가는 인물들이 각 작품 속에 조용히 놓여 있다. 수록작 「장귀자 아카이빙」은 특히 이 소설집의 핵심 문제의식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기란이 ‘장귀자’의 생애를 기록하며 타자의 삶을 조명하는 아카이빙 서사로, 사라져가는 존재의 흔적을 담담하게 복원해 낸다. 작가는 이를 ‘말하지 않고, 중심에 서지 않으며, 타자의 삶을 조용히 감각하는 태도’로 표현한다.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사라지는 쪽에 가까운 이들을 향한 시선이 머물며, 다만 타자의 몫을 감각하는 자의 윤리를 정초한다. 이 외에도 소설집에는 다양한 삶의 변두리에서 고요히 존재를 감당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마지막 산책」은 병든 아내를 홀로 간병하는 노년 남성의 고독한 일상을 그린다.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을 스스로 끊는 그의 선택은, 존엄을 지키기 위한 조용한 결단으로 그려진다. 「모자」는 과거 인연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집을 나서지 못하는 ‘나’의 정서를 다룬다. 고립된 삶의 무게로 나와 타자 간의 관계를 응시한다. 「미조」는 과거 동료 ‘미조’의 죽음을 상기하며, 공동체의 상흔과 죄의식이 시간의 틈에서 되살아난다. 「그들의 내력」은 조카의 죽음을 계기로 오랜 침묵과 갈등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야기다. 장례식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눌러두었던 가족 간의 감정들을 마주하게 되며, 각자의 내밀한 내력이 서서히 드러난다. 「마술이 필요한 순간」은 중년 여성 화자가 연극을 시작한 딸과의 교감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서사다. 세대 간의 소통과 재생의 가능성을 따뜻하게 포착한다. 「불면」은 갱년기의 불면과 감각 과민 속에서 고립감을 견디던 주인공이 대낮에 오작동으로 울린 화재경보음을 계기로 불안을 선명히 감각하고 일상의 위태로움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을 그린다. 『밤이 고요한 것은』은 드러나는 이야기보다 드러나지 않는 감각에, 중심이 되는 인물보다는 중심을 비껴 선 존재들에 집중한다. 이 소설집에서 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말의 여백, 침묵의 결, 그리고 사라져가는 존재들을 향한 조용한 감각이다. 고요히 밤을 견디는 사람들, 끝내 고요 속으로 사라지는 존재들, 하지만 그들의 몫을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조심스러운 시선. 홍명진 작가는 말없이 남겨지는 것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단단하면서도 조용한 문장으로 응답하고 있다.
9791193412954

그늘흔

김성백  | 걷는사람
10,800원  | 20250609  | 9791193412954
걷는사람 시인선 125 김성백 시집 『그늘흔』 출간 “나는 아직도 그늘 속에서 유영하던 밤들을 살고 있다.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그림자들의 얼굴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겨누는 언어의 윤리 존재하지 않는 얼굴을 위한 애도의 시 김성백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늘흔』이 걷는사람 시인선 125번째로 출간되었다. “그늘 속에서 유영하던 밤들”(「시인의 말」)을 지나 비로소 내보이는 이 시집은, 어둠과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그림자뿐인 생’을 살아온 존재들의 언어 없는 고통을 비로소 ‘시’로 호명하는 작품이다. 김대현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말하듯, 이 시집은 “자본에 내재된 구조적 모순과 이에 꾸준히 저항해온 이른바 노동시들의 계보와 친연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내부에서 교란하는 낯섦”으로 전혀 새로운 정서적 국면을 연다. 『그늘흔』은 제목 그대로, 그늘에 남은 흔적이자 흔적에 머무는 그늘의 시학을 펼쳐 보인다. 여기서 ‘그늘’은 단순히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와 권력의 시야로부터 배제된, 사회가 관리하지 않는 존재들의 자리이다. 말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말해지지 않도록 설계된 비가시의 장소. 시인은 그 침묵의 장소를 언어로 옮긴다. 단정하거나 유려하지 않은, 뾰족하고 무거운 문장으로, 오히려 그늘의 윤리를 지키는 말들로, 김성백은 말한다. “다친 글자들이 서로의 허리와 팔다리를 그러쥐고 안간힘으로 폐허를 전하려”(「사량 思量」). 그의 시는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의 고통을 다시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던 그 침묵 자체를 끌어안는 언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시집에서 ‘그늘’과 ‘그림자’는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이미지이다. “우리의 삶을 훼손하고 있는 자본의 지배와 그에 수반하는 비참한 노동의 현실”(김대현, 해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김성백의 시는 단순한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다. 그는 자본과 권력이 구축한 ‘말해지지 않는’ 존재의 조건, 곧 제도적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얼굴 없는 이들’을 시의 감각으로 복원한다. “목이 부러진 스패너”, “고장 난 작업일지”, “그려진 비상 버튼”(「살고 싶은 아이」)은 단지 장치의 고장이 아니라 구조의 고발이다. 그렇기에 시집의 여러 시편은 사회적 약자, 특히 노동 현장에서 사라져 간 이들의 존재를 담담하고 절제된 언어로 직시한다. 「보기 중에 없음」에서 시인은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기 중에 없어요”(「보기 중에 없음」). 이 세계는 정답지를 감추고, 해설 없는 문제만을 내던진다. 그 물음 앞에서 김성백은 ‘대답 없는 말’이 아닌 ‘묻는 말’로서의 시를 선택한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시인의 태도는 “그늘 속에서 유영하던 밤들”(「시인의 말」)의 기록을 가능케 한다. 김성백의 시는 그늘에 구획된 존재의 “오븐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던 많은 밤들”(「빵 나오는 시간」)에 주목하며, 하루의 가장 일상적인 장면들 속에 숨어 있는 생존의 최전선으로 시선을 침투시킨다. 「빵 나오는 시간」은 단순한 아침 풍경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구워낸 노동의 리듬이다. “여인이 방을 나오는 시간”은 오븐 앞의 시간으로 전환되고, 얼마간 생계를 견디는 온도로 철저하게 맞춰질 것이다. 그러한 여인의 마지막 얼굴도 계산대 옆에 남겨 두고서 머지않아 방을 떠나겠지만, 여인이 사라져도 빵은 제시간이 돌아오면 여지없이 나올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우리가 뿌리내린 토양은 “식욕들이 줄을 서는 벌건 대낮” 아래에서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잉여숨」은 2023년 7월, 호우피해 실종자 수색작전 중 숨진 故 채수근 상병을 추모하며 쓰인 작품으로, 개인의 비극이 어떻게 공동체의 윤리적 과제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화가 떠올랐다”는 첫 구절은 실종과 부재의 현실을 직면하게 하며, 이어 폭력적 제도, 감정이 배제된 무력한 구조로서의 물을 상징하며, 구조되지 못한 존재를 향한 시스템의 죄의식을 암시한다. 시인은 “손과 발을 잘라내도 손등과 발바닥이 가려운/둥근 죄”라는 구절로 육체의 소멸 이후에도 남는 감각과 고통, 그리고 그것이 되풀이되는 폭력의 구조를 형상화하며, 감정에 함몰되지 않은 채 상실을 응시한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인 “물에 녹았던 아이는 다시 아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선언은 죽음을 목격한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시는 이 지점에서 “방향”을 얻으며, 비극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할 윤리적 행보를 시작한다. 마지막 구절 “세상의 모든 물은 아이가 녹은 물이다”는 고통의 기억이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보여준다. 김성백은 이 시를 통해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존재의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을 감당해야 할 공동체의 윤리를 환기시키며, 애도라는 말로는 부족한 문학의 윤리적 목소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고립계」에서는 이와 같은 종류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 잊힌 존재들의 존엄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한다. ‘독수리 한 마리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멀리서 이승을 더듬거렸다’는 시의 문장은, 이 시를 관통하는 윤리의 출발점이다. 이는 “업을 이어받은 소년은 아비의 몸을 조각조각 잘라 독수리 무리에 던져 주었다 원래 저들 것인 양”이라는 시적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단순한 시적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제거된 자, 구조화되지 못한 슬픔, 의례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죽음이 개인의 소멸이 아니라 집단의 무관심과 무례 속에서 지속되는 고립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김성백은 아주 조용하고 차가운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그늘흔』 시집의 정서적 축과도 닿아 있다. 애도되지 못한 얼굴들을 기억하고, 잊힌 자들의 흔적을 언어로 복원하는 일. 김성백은 ‘말해지지 않았던 존재들’을 고립의 영역에서 끌어올려 ‘기억의 윤리’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김성백의 시는 “한 번 더 태울까요/그대로 박제라도 할까요”(「일인용」)라며 사라진 존재들의 육체가 아닌, 그 이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다. 기억이란 단순한 회고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는 억압의 구조를 인식하고 말해내는 실천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에 시인은 “이 세계에 서명하지 않는”(「끝과 미안」) 방식으로 삶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언어를 불러낸다. “심장보다 더 뜨거운 언어”(「손잡이」)를 통해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시를 읽는 일은 곧 얼굴을 찾아주는 일이다. 김성백의 『그늘흔』은 그렇게 지워진 얼굴들 곁에서, 침묵을 잃지 않는 언어로, “흐릿한 기척을 부여잡고”(「시인의 말」) 끝내 “그 손을 누가 좀 잡아 줬으면 하”는 마음을 조용히, 그러나 끝내 포기하지 않고 건네는 시집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순간들. 그런 순간에도 말이 남아야 한다면, 그 말은 아마 이런 시였을 것이다.
9791193412916

초선의원

오세혁  | 걷는사람
16,200원  | 20250510  | 9791193412916
“마침내 관객들이 극장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극장을 넘어 광장으로 질주하는 순간, 우리의 연극은 더 이상 연극이 아니게 될 것이오.” 법과 정의, 권력과 생존, 죽음과 선택 -우리 안의 정치를 무대 위로 불러낸 다섯 개의 이야기 도서출판 걷는사람의 희곡집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으로,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오세혁 작가의 희곡집 『초선의원』이 출간되었다. 『초선의원』은 표제작 「초선의원」을 비롯하여 「세자전」 「전시의 공무원」 「단명소녀 투쟁기」 「킬링 시저」까지, 총 다섯 편의 희곡을 한 권에 묶은 작품집이다. 이 다섯 편은 현대극, 음악극, 청소년극 등 다양한 무대 양식을 오가며, 시대를 넘어 공통적으로 ‘정치와 인간’이라는 테마를 탐구한다. 오세혁은 이번 희곡집에서 권력과 생존, 개인과 국가, 죽음과 삶을 주제로 시대를 넘나드는 무대를 펼쳐 보인다. 역사적 사건과 신화, 현대 정치의 장면들 속에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고드는 이 희곡들은, 가벼운 유머와 묵직한 비판, 따뜻한 연대의 가능성까지 아우르며 독자와 관객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첫 번째 작품인 「세자전」은 정 이리이리 작가의 카카오웹툰을 원작으로 한 음악극이다.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된 군주가 죄의식과 광기 끝에 세자 경연을 열고, 다섯 명의 왕자들이 권좌를 둘러싼 비극적 경쟁을 펼친다. 권력을 향한 열망과 죄책감, 피의 역사, 형제 간의 비극이 강렬하게 교차하며, 명분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인간성의 균열을 집요하게 조명한다. 두 번째 작품 「전시의 공무원」은 해방 이후 전쟁을 맞이한 혼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공무원으로 살지 말라'는 부모의 웃픈 유언을 받았으나 결국 다시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된 갑돌과 갑순의 아이러니한 여정을 따라간다. 두 명의 주인공들은 서로 다른 배경에서 시작해 지도자들을 따라 피난길에 오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수습하며 국가와 시민 사이,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개인이 버텨야 하는 아이러니와 생존의 진실을 경쾌하면서도 씁쓸한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작품이다. 표제작 「초선의원」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열기와 함께 시작된다. 실존 인물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선의원 시절을 모티브로 삼아, 뜨거운 청문회장의 풍경을 스포츠 경기로 빗대며 한국 정치사 한복판에 던져진 초선의원의 고군분투를 유쾌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담아낸다. “법이 잘못됐으면, 법을 바꾸면 된다”고 외치는 인권 변호사 출신 초선의원 ‘수호’는 정의와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며, 진짜 정치를 찾아 한 걸음씩 나아간다. 네 번째 작품 「단명소녀 투쟁기」는 제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인 현호정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청소년극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단명할 운명을 타고난 소녀 수정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남동쪽으로 긴 여정을 떠나는 판타지 로드무비이자, 철학적 성장담이다. 죽음을 피하려는 수정과 죽음을 찾아 떠난 이안이 만나 함께 걷는 여정은, 삶과 죽음에 대한 다정하고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아름다운 성장 서사다. 마지막 작품 「킬링 시저」는 셰익스피어의 고전 『줄리어스 시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공화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벌어진 시저 암살이, 결국 또 다른 독재자를 탄생시키는 정치적 아이러니를 예리하게 구현했다. 로마의 절대적 지도자이나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암살당하는 시저, 정치적 야망과 공화국 수호의 명분 속에 갈등하는 카시우스, 공화국의 이상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는 딜레마 속에 갈등하는 이상주의자 브루터스의 삼자 구도를 통해, 권력의 윤리와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충돌하고 전복되는지를 깊이 있게 파헤친다. 역사극의 외피를 벗고, 오늘날 정치의 본질을 조명하는 정통 현대극이다. 오세혁 작가는 이번 희곡집을 통해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정치적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무대 위에 소환한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치열하게, 그리고 때로는 비극적으로. 이 다섯 편의 희곡은 각각 다른 언어와 결을 가졌지만, 공통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다. 『초선의원』은 단지 무대 위에서만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와 시대를 잇는 다섯 개의 강렬한 무대를 통해, 이 희곡들이 담고 있는 치열한 질문과 미묘한 균열을 다시 한번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무대 너머 독자와 관객 모두에게 깊은 공명을 일으킬 것이다.
9791193412381

보도지침

오세혁  | 걷는사람
14,120원  | 20240701  | 9791193412381
도서출판 걷는사람의 세 번째 희곡집으로 오세혁 희곡작가의 『보도지침』이 출간됐다. 『보도지침』은 오세혁 작가의 두 번째 희곡집으로 「보도지침」 「지상 최후의 농담」 「괴벨스 극장」 「전선의 고향」 「분장실 청소」등 다섯 작품이 실려 있다. 이번 희곡집에 실린 작품의 특징은 상상력이 기반되는 모티프보다는 우리가 겪어 왔던 시대의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1986년 제5공화국 시절 한국일보 기자가 월간 『말』지에 정부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을 법정 드라마로 풀어낸 「보도지침」을 포함해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인 파울 요세프 괴벨스의 이야기를 담아내어 대중선동과 권력의 관계를 파헤친 정치풍자극 「괴벨스 극장」, 제주 ‘4?3사건’이 한창이던 때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처형당한 여수의 14연대 부대원들을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지상 최후의 농담」등 굵직한 사건들을 재조명하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부조리함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9791193412596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정은기  | 걷는사람
10,800원  | 20241118  | 9791193412596
걷는사람 시인선 120 정은기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출간 “우리는 서로에게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조금 더 멀리까지 사랑하는 일은 달빛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 어둠 속 적막 관찰자의 시선으로− 홀로 서 있지만 ‘연속되는 혼자’라는 상상력 흩뿌려 보기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은기의 첫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가 걷는사람 시인선 120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무려 16년 만이다. 일찍이 등단작을 통해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차창 밖, 풍경의 빈곳」)라고 쓰며 삶의 고단함을 환유했던 정은기 시인. 그의 첫 시집은 그 세월만큼 꾹꾹 눌러쓴 고백으로 울울하다. “이쪽으로 가라고 외치기보단 가만히 서서 방향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당선 소감) 작품을 쓰겠다고 했던 바람처럼, 정은기의 시는 고백의 반복과 지속을 통해 결국 타인의 내면을 마주하는 윤리적 행위로까지 확장된다. 일상의 삶은 치열한 갈등과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시인’이라는 자각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내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순정한 자기 싸움과 각오 끝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조금 더 멀리까지 사랑하는 일은 달빛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삔이 그랬다」)이라는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이 탄생한다. 해설을 쓴 남승원 평론가는 “정은기에게는 끊임없이 고백이 이어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시 쓰기를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형식과 구조를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또한 “거듭되는 고백은, 그의 바람대로, 분리되어 왔던 화자와 청자의 오랜 장벽을 허물고,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공유하는 지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며 이 시집이 지닌 미덕을 강조한다. 이어 추천사를 쓴 박정대 시인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물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는 ‘적막 관찰자’의 시선으로” 정은기의 시가 존재한다고 평하며 “드러냄을 통해 감추고 감춤을 통해 드러내는” 발성법을 통해 그만의 무늬를 펼쳐낸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러나 내려칠 목도 당신도 없구나/사랑은 더더욱 나의 것이 아니구나”(「낫」), “삶과 죽음을 넘어설 만한 상상력이/우리에게는 없다”(「사물의 방향」) 같은 구절은 어쩌면 변명이 될 수도, 처절한 고백이 될 수도 있다. 시가 될 수도 있고 반성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시인은 고백과 반성을 넘어서 상상한다. 세계 속 나는 비록 혼자이지만, 으깨지고 쪼개지면서도 결국엔 ‘연속되는 혼자’라는 인식을 보여 주는 시편이 바로 「혁명의 원리」이다. “믹서기 속에서 토마토 하나가 분쇄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어떤 사물에 대해 생각하다가 빠르게 회전하는 모터의 원리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중략) 우리는 나누어져 남남이 되었다 함께해도 남남, 남남남, 남남남남”(「혁명의 원리」).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존재들이 혁명의 원리로 재탄생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 속에서 이 시집은 쓰여졌다. 정은기의 상상력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현실 변혁의 힘을 가진 채로 ‘이미 뒤섞여 있는(ready-mixed)’ 가능성의 존재들이라는 믿음으로 이 시집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9791193412886

현대문학 비평: 역사, 이론, 실제 (역사, 이론, 실제)

이명재, 정정호, 오창은  | 걷는사람
23,400원  | 20250228  | 9791193412886
국내 저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최신 문학 비평 담론 담아내 문화유물론, 복합문화주의, 생태환경 비평 최신 이론 다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문학의 성취를 기념하는 현대문학 비평의 지침서
9791193412909

간과 강

동이향  | 걷는사람
16,200원  | 20250417  | 9791193412909
“인어를 가지고 해부를 했는데, 몸 한가운데 뭐가 있는지 알아? 간. 빛나는 간. 크고 아름답고 육중한 간. 싱싱한 간.” 부드럽고 둔탁한 메스로 원을 그리듯 헤집어 아무런 공허도 아픔도 없이 잘려 나간 세상의 한 단면 도서출판 걷는사람의 희곡집 시리즈 여섯 번째 도서로 동이향의 『간과 강』이 출간됐다. 표제작이자 2024년 국립극단 제작으로 무대화된 「간과 강」은 한순간 세계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정체 모를 징후가 작품 전반에 도사리고 있어 어딘가 낯설고 기이한 현실감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를 희미한 듯 잡히지 않는 미래는 일찍이 퇴색되었고, 과거와 현재도 전망을 상실한 지 오래지만, 작중 인물인 L은 한강을 바라보며 시도 때도 없이 맥주를 마시거나 근원을 알 수 없는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준다. 그러는 동안 집안에서는 싱크홀이 발생해 커다란 구멍이 뚫리기도, 한강에서는 인어가 출몰하기도 하는 등 기묘한 사건들이 속출하기 시작한다. 아무런 인과가 성립되지 않는 듯해 보이는 서사의 비논리적 전개에 저항하듯, L은 전 세계가 종말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다는 깊은 회의감과 냉소 끝에, 찬란한 인어의 형상을 한 첫사랑 V와 극적으로 재회하는 상투의 결말을 맞닥뜨리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와 부조리감을 느낀다. 동이향 작가 특유의 정확한 현실 인식을 녹여 서사의 구조 속에 슬며시 흘려보냄으로써, 우리가 통상적으로 믿고 있는 현실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신파에 가까우며 낭만에 불과한 것인지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절망감을 배가시킨 것이다. 이처럼 희곡집의 인물들은 시종일관 현실에서 벌어지는 기이하고 허무맹랑한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는 대신, 현상 이면에서 작동하는 삶의 보편성에 깊게 침잠하여 보다 구도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현실의 내면에 움직이는 원리들을 하나씩 들춰낸다.
9791193412992

닮은 건 모두 아프고 달리아꽃만 붉었다

권기덕  | 걷는사람
10,800원  | 20250711  | 9791193412992
“우리 사이에서 꽃은 그대로였고 우리의 절반만 각자의 빛깔로 퇴색되고 있었다” 달리아꽃의 붉은 빛깔에서 시작된 어긋난 감각, 뒤엉킨 시간의 조각들이 다시 피어난다 권기덕 시인의 시집 『닮은 건 모두 아프고 달리아꽃만 붉었다』가 걷는사람 시인선 126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라디오에서 외계外界의 말을 듣다가 세상을 떠난다는 너의 말은 오히려 도시의 작은 화분이 되고 싶다는 것처럼 들려”(「수목장」)라는 구절처럼, 죽음을 단순한 상징이 아닌 언어와 감각의 새로운 조율 방식으로 제시한다. 죽음은 여기서 삶의 종말이 아니라, 삶을 닮은 또 하나의 질서이자 반복되는 감각의 기입이다. 문학평론가 김익균은 이 시집을 죽음은 이번 시집 전체를 통어하는 상징의 차원으로 올라선 작품이라 평하며, 시적 반복과 어긋남, 실패한 문장이 만들어내는 언어의 리듬과 긴장에 주목한다. 삶은 이 시집에서 더 이상 본래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꽃 모양을 흉내”(「겨울 해변의 늪」) 내는, 흉내와 반복의 언어적 상태다. “지난 계절의 이팝나무를 보면서 죽은 사람도 사람이라 국어사전을 뒤적거렸다.”(「장마」)라는 시구처럼, 살아 있음이란 죽음의 반대가 아니라 죽음을 ‘닮은’ 상태다. 이 닮음은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어긋난 반복, 실패한 흉내이다. “순대국밥을 먹다가 네 부고를 전해 받았다. 온종일 비가 내렸다. 신을 모르면서 신인 척, 의자를 모르면서 의자인 척, 부추를 먹는다.”라는 고백에서처럼, 살아 있음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은 색조를 가진다. 권기덕의 문장은 종종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고, 시간과 논리가 단절된다. “트랙 위에서 그림자가 돈다 묻은 것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심장으로 변해 간다”(「오르골」)는 풍경이 아니라 감각 그 자체의 기형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부적절한 주술관계는 오류가 아닌 의도된 파열이며, 그 틈에서 독자는 다시 말을 시작할 가능성과 마주하게 된다. 많은 시편에서 말보다 침묵이 앞선다. “잎사귀와 잎사귀를 흔들며 죽은 새를 묻어 준다 나무는 겨울이 채 오기 전에 가벼워져 어디론가 날아갔다 다시 돌아온다”(「오르골」)라는 시구는, 언어가 끝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시집은 말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 해석이 불가능한 경계에 머물며 독자에게 그 너머를 요청한다. 시는 이렇듯 끝내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견디게 한다. “내가 걸어갈 때마다 숲길은 점점 복잡해졌고 새는 사라지고 있었네 비에 젖은 눈물과 눈물에 젖은 비가 섞여 쓴맛이 났네”(「저문 뒤에야 찾아온 사람」)라고 말하는 장면처럼, 감각기관이 기능을 멈춘 뒤에도 남아 있는 기억과 촉의 언어가 이 시집의 깊이를 만든다. 『닮은 건 모두 아프고 달리아꽃만 붉었다』는 독자에게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 한 마리가 강물 위에 내려앉을 때 가슴을 움켜쥐던 사람은 아직 보여 줄 달이 남았을까?”(「구멍에 내리는 비는 미래를 삼킨다」)라는 장면처럼, 감정과 언어의 소멸과 반복, 그 잔여로 독자를 안내한다. 의미는 완성되지 않으며, 독자는 그 빈자리에서 의미가 머물렀던 흔적을 어루만지게 된다. 더 나아가 이 시집은 시를 읽는 일이 현실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부단히 복수화하는 생산적인 작업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권기덕의 시는 현실을 하나의 언어 질서에 종속시키지 않고, 어긋남과 침묵, 실패를 통해 현실을 되읽고 다시 쓰도록 독자에게 제안한다. 죽음의 이미지로 소환되는 고니는, 이 시집에서 날고 있다. 그것도 빙판 위에서 “어긋난 하늘”(「겨울 해변의 늪」)을 향해. 이것은 언뜻 모순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모순 속에서 이 시집은 죽음과 생, 실패와 반복, 침묵과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을 형상화해 낸다. 그것은 설명을 피하고, 완성 대신 균열 속에 머무르는 방식이다.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다시 말을 시작하는 감각, 그것이 이 시집이 독자에게 건네는 가장 조용한 목소리다.
9791193412947

상수리나무 책방

김춘기  | 걷는사람
10,800원  | 20250530  | 9791193412947
기억 저편에 남은 아버지의 헛기침, 아궁이의 연기, 둠벙배미의 풍경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 느림과 비움의 시학 김춘기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상수리나무 책방』이 걷는사람 시인선 124번째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오랜 시간 삶의 뒷면을 들여다보며 써 온 언어를 통해, 기억과 체온이 묻은 풍경들을 고요하고 단정하게 그려낸다. 이 시집에서는 우리가 오래 잊고 살았던,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풍경이 조용히 되살아난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이 말하듯, 이 시집은 “시간에 풍화되어 가는 기억을 소환하고, 자본 도시의 욕망에서 비켜선 느림과 비움의 미학으로 사람을, 사람 속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노래한다. 그렇게 유행이나 경향을 좇지 않으면서 관습화된 기성의 서정을 타파하려는 김춘기의 시는 “다른 언어”라는 고유한 방법론으로 서정의 본령을 회복하고자 한다.” 김춘기 시인은 오랜 시간, 기억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가족과 고향의 장면들을 시로 써왔다. 그의 첫 시집에는 유년 시절의 냄새, 부모의 손길, 사소하지만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장면들이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펼쳐진다. 「대화」에서는 인기척도 없이 들르시는 외할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소주병을 꺼내서 제단에 술을 따르듯이 / 투박한 사기잔에 술을 가득 따르”시기도 하고 그 시간은 지나서 우리 앞에서 사라졌지만 “벽장의 소주병”은 그 시절과 함께 여전히 그대로다. 「저녁의 감촉」과 「아궁이 신발장」에서는 군불 피우는 새벽, 아버지가 신발을 아궁이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주던 날들이 시 한 줄 한 줄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쉰다. 그의 시에서는 “장마에 떠내려간 작은 미나리밭”(「작은 미나리밭을 생각했다」)이 다시 우리 앞에 소환되고 “더는 우리 땅이 아니게 된 둠벙배미”(「둠벙배미전傳」)도 눈 앞에 펼쳐진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시인은 “봄비는 계속 이유를 묻지 않았고/ 하릴없이 찾아드는 통증”에 가슴이 시린 마음을 시에 담는다. 잊은 줄 알았던 풍경이 한 줄의 시에 담긴 이번 시집은 고향의 언어로 과거의 시절을 되돌아본다. 『상수리나무 책방』은 단순한 회고의 시집이 아니다. 시인은 “천년의 속도로 지나던 벌레”나 사소한 통증처럼 익숙하게 멈춰 있는 풍경 속에서, 일상을 견디는 사람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처럼 김춘기의 시는 유행이나 경향을 따르지 않되, 누구보다도 ‘지금 여기’의 삶에 깊숙이 닿아 있는 시적 실천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저 물방울이 얼마나 많은 사연을 쌓아야 /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룰까” (「다른 언어를 사용하다」). 시간이 흘러도 기억은 스며든다.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천년이 지나도 / 벌레의 껍질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 (「시골 버스 정류장」)은 시골 풍경, 이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사라질지라도 기억의 한 부분으로 시의 한 장면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 책방』은 바쁘게 살아온 나날들 속에서도 어딘가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그 시절’의 조각들을 다시 불러낸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일지라도, 이 시집 속 언어는 그곳의 공기와 감촉을 우리 곁으로 데려온다. 이 책은 이제는 어른이 된 우리 모두에게,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다. 인간적인 서정을 갈망하는 독자들에게, 오래 곁에 두고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정갈한 언어의 집 한 채가 되어줄 것이다.
9791193412893

미도착

남수우  | 걷는사람
10,800원  | 20250327  | 9791193412893
“세계란 저쪽을 향해서 멀어진 사람이 반드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거래” 아이가 점멸하는 세계를 가로질러 하얗게 명멸하는 시간 속 서로의 끝이 맞물리며 내내 이어질 이야기 남수우 시인의 첫 시집 『미도착』이 걷는사람 시인선 122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남수우 시인은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미세한 균열의 기억과 무수한 틈을 내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틈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사유가 그를 좋은 시인으로 살게 하리라는 믿음이 들었다”는 심사평과 함께 작품을 발표한 그가 등단 이후 4년 만에 50편이 담긴 시집을 가지고 돌아왔다. 자신의 생활이 오래전의 누군가를 향한 애도이기를 바랐던 시인은 첫 번째 시집 『미도착』에서 “구시가지 쪽으로 멀어지”(「산책」)던 한 사람이 언젠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미도착」)올 것이라는 불가능한 소문을 믿으며 “기다림 없이 기다려”(신춘문예 수상소감) 보는 방식으로 기도의 한 형식을 이루어낸다. 남수우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표제작 「미도착」의 첫 번째 시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란 저쪽을 향해서 멀어진 사람이 반드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거래”. 남수우 시에서 ‘세계’는 우리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견고하고 확고한 영역이 아니라, 기억의 파편들이 일상의 틈새로 스며들어 서로 얽히고 뒤섞인 혼합된 재세계에 가깝다. 그렇기에 표층적 측면에서 말이 되지 않는 기억의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순간,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파편의 기억들이 “잠자리의 입방체 얼굴 속”에서 천지간 “동서남북”을 바라보듯, 무수한 “아이”(「호수공원」)가 “고사리 끝에 맺힌 작은 고사리와 더 작은 고사리”(「프랙탈」) 너머로 현전해 펼쳐질 것이다. 시집의 화자는 자신의 곁을 무수한 아이들이 수없이 스치고 지나가도 “너와 잠시 앉아 있고 싶구나”(「공원의 맞은편 오후」)라는 말을 기어코 삼키고 마는, 어딘가 적막한 성정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가령, 아이의 이름이 궁금하지만 “너는 누구였을까”(「호수공원」)라는 속엣말을 중얼거리며 입술을 달싹이거나 그저 고개를 주억일 뿐이다. 화자는 아이들이 자신의 곁을 스치고 지나가기를 끝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집요한 응시에서 비롯된 장면들은 “흰 눈을 기다리는 시간”처럼 “시제가 없다”(「캐럴」). 그렇게 겹겹이 쌓인 장면들 속에서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은 흐릿해진다. 선형적인 시간이 헐거워진 빈틈으로부터 “야기된 이야기”(「프랙탈」)가 있다. “시간보다 앞선 기억처럼 종이 위에 먼저 도착하곤 하는” 이야기(「모래 아이 이후」). 기승전결의 완성된 맥락 없이, 그저 이야기 속을 헤매게 되는 이야기. 그것이 멀리 있는 혼자가 헤맬 숲이 되어 하나의 장소로 남기를 바라며, 남수우 시의 화자는 “백사장에 그린 그림들”(「동거」)처럼 이야기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해설을 쓴 김진석 문학평론가가 이야기하듯, 남수우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닿을 수 없는 뒷모습에서 순간적으로 스치는 표정을 마주하게 되면 누구라도 온몸이 다물어져 그 시간 속에 망연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내게 뒷모습을 안겨 주던 날 모서리가 처음 삼킨 태양을 생각했다”. 우리는 저마다 “지구 끝”에서 끝으로 뻗어 나간 자기 앞의 외줄기 길을 구불구불 돌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흉터를 간직한 햇살이/따갑게 몸 안을 맴”(「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도는 순환 고리를 기민하게 감각하는 장면을, “서로의 끝을 맞물며”(「프랙탈」) 내내 이어질 이야기를 말이다.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