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흔
김성백 | 걷는사람
10,800원 | 20250609 | 9791193412954
걷는사람 시인선 125
김성백 시집 『그늘흔』 출간
“나는 아직도 그늘 속에서 유영하던 밤들을 살고 있다.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그림자들의 얼굴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겨누는 언어의 윤리
존재하지 않는 얼굴을 위한 애도의 시
김성백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늘흔』이 걷는사람 시인선 125번째로 출간되었다. “그늘 속에서 유영하던 밤들”(「시인의 말」)을 지나 비로소 내보이는 이 시집은, 어둠과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그림자뿐인 생’을 살아온 존재들의 언어 없는 고통을 비로소 ‘시’로 호명하는 작품이다. 김대현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말하듯, 이 시집은 “자본에 내재된 구조적 모순과 이에 꾸준히 저항해온 이른바 노동시들의 계보와 친연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내부에서 교란하는 낯섦”으로 전혀 새로운 정서적 국면을 연다.
『그늘흔』은 제목 그대로, 그늘에 남은 흔적이자 흔적에 머무는 그늘의 시학을 펼쳐 보인다. 여기서 ‘그늘’은 단순히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와 권력의 시야로부터 배제된, 사회가 관리하지 않는 존재들의 자리이다. 말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말해지지 않도록 설계된 비가시의 장소. 시인은 그 침묵의 장소를 언어로 옮긴다. 단정하거나 유려하지 않은, 뾰족하고 무거운 문장으로, 오히려 그늘의 윤리를 지키는 말들로, 김성백은 말한다. “다친 글자들이 서로의 허리와 팔다리를 그러쥐고 안간힘으로 폐허를 전하려”(「사량 思量」). 그의 시는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의 고통을 다시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던 그 침묵 자체를 끌어안는 언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시집에서 ‘그늘’과 ‘그림자’는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이미지이다. “우리의 삶을 훼손하고 있는 자본의 지배와 그에 수반하는 비참한 노동의 현실”(김대현, 해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김성백의 시는 단순한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다. 그는 자본과 권력이 구축한 ‘말해지지 않는’ 존재의 조건, 곧 제도적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얼굴 없는 이들’을 시의 감각으로 복원한다. “목이 부러진 스패너”, “고장 난 작업일지”, “그려진 비상 버튼”(「살고 싶은 아이」)은 단지 장치의 고장이 아니라 구조의 고발이다. 그렇기에 시집의 여러 시편은 사회적 약자, 특히 노동 현장에서 사라져 간 이들의 존재를 담담하고 절제된 언어로 직시한다. 「보기 중에 없음」에서 시인은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기 중에 없어요”(「보기 중에 없음」). 이 세계는 정답지를 감추고, 해설 없는 문제만을 내던진다. 그 물음 앞에서 김성백은 ‘대답 없는 말’이 아닌 ‘묻는 말’로서의 시를 선택한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시인의 태도는 “그늘 속에서 유영하던 밤들”(「시인의 말」)의 기록을 가능케 한다.
김성백의 시는 그늘에 구획된 존재의 “오븐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던 많은 밤들”(「빵 나오는 시간」)에 주목하며, 하루의 가장 일상적인 장면들 속에 숨어 있는 생존의 최전선으로 시선을 침투시킨다. 「빵 나오는 시간」은 단순한 아침 풍경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구워낸 노동의 리듬이다. “여인이 방을 나오는 시간”은 오븐 앞의 시간으로 전환되고, 얼마간 생계를 견디는 온도로 철저하게 맞춰질 것이다. 그러한 여인의 마지막 얼굴도 계산대 옆에 남겨 두고서 머지않아 방을 떠나겠지만, 여인이 사라져도 빵은 제시간이 돌아오면 여지없이 나올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우리가 뿌리내린 토양은 “식욕들이 줄을 서는 벌건 대낮” 아래에서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잉여숨」은 2023년 7월, 호우피해 실종자 수색작전 중 숨진 故 채수근 상병을 추모하며 쓰인 작품으로, 개인의 비극이 어떻게 공동체의 윤리적 과제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화가 떠올랐다”는 첫 구절은 실종과 부재의 현실을 직면하게 하며, 이어 폭력적 제도, 감정이 배제된 무력한 구조로서의 물을 상징하며, 구조되지 못한 존재를 향한 시스템의 죄의식을 암시한다. 시인은 “손과 발을 잘라내도 손등과 발바닥이 가려운/둥근 죄”라는 구절로 육체의 소멸 이후에도 남는 감각과 고통, 그리고 그것이 되풀이되는 폭력의 구조를 형상화하며, 감정에 함몰되지 않은 채 상실을 응시한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인 “물에 녹았던 아이는 다시 아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선언은 죽음을 목격한 세계 전체가 더 이상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시는 이 지점에서 “방향”을 얻으며, 비극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할 윤리적 행보를 시작한다. 마지막 구절 “세상의 모든 물은 아이가 녹은 물이다”는 고통의 기억이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보여준다. 김성백은 이 시를 통해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존재의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을 감당해야 할 공동체의 윤리를 환기시키며, 애도라는 말로는 부족한 문학의 윤리적 목소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고립계」에서는 이와 같은 종류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 잊힌 존재들의 존엄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한다. ‘독수리 한 마리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멀리서 이승을 더듬거렸다’는 시의 문장은, 이 시를 관통하는 윤리의 출발점이다. 이는 “업을 이어받은 소년은 아비의 몸을 조각조각 잘라 독수리 무리에 던져 주었다 원래 저들 것인 양”이라는 시적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단순한 시적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제거된 자, 구조화되지 못한 슬픔, 의례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죽음이 개인의 소멸이 아니라 집단의 무관심과 무례 속에서 지속되는 고립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김성백은 아주 조용하고 차가운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그늘흔』 시집의 정서적 축과도 닿아 있다. 애도되지 못한 얼굴들을 기억하고, 잊힌 자들의 흔적을 언어로 복원하는 일. 김성백은 ‘말해지지 않았던 존재들’을 고립의 영역에서 끌어올려 ‘기억의 윤리’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김성백의 시는 “한 번 더 태울까요/그대로 박제라도 할까요”(「일인용」)라며 사라진 존재들의 육체가 아닌, 그 이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다. 기억이란 단순한 회고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는 억압의 구조를 인식하고 말해내는 실천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에 시인은 “이 세계에 서명하지 않는”(「끝과 미안」) 방식으로 삶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언어를 불러낸다. “심장보다 더 뜨거운 언어”(「손잡이」)를 통해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시를 읽는 일은 곧 얼굴을 찾아주는 일이다. 김성백의 『그늘흔』은 그렇게 지워진 얼굴들 곁에서, 침묵을 잃지 않는 언어로, “흐릿한 기척을 부여잡고”(「시인의 말」) 끝내 “그 손을 누가 좀 잡아 줬으면 하”는 마음을 조용히, 그러나 끝내 포기하지 않고 건네는 시집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순간들. 그런 순간에도 말이 남아야 한다면, 그 말은 아마 이런 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