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감염적 존재 ‘호모 인펙티부스’를 위하여)
강철 | 파이돈
12,830원 | 20250515 | 9791199104716
팬데믹 시대, 철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코로나 19는 인간의 물리적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문화적 기반까지 공격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감염병이라는 의료 및 행정적 재난을 넘어 우리의 인식체계와 가치관에 근본적 질문을 던진 규범적 위기이기도 했다. 이 위기에서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안전, 책임과 권리 등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했고,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실천적 대안이 요구되었다. 이 책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여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개념공학적 접근과 새로운 윤리적 프레임의 정립을 통해 제시한다.
개념공학과 언어의 사회적 효과
개념공학은 단순히 개념의 의미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념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규범적 결과를 낳는지 평가함으로써 더 나은 개념을 설계하는 실천적 철학 분야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사회적 거리두기’, ‘슈퍼전파자’, ‘무증상 감염자’ 등 일상화된 용어들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적 사실을 기술하지만, 그 이면에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표적화하고 책임을 개인에게 환원하는 사회적 낙인효과를 내포했다. 이러한 언어는 공포와 비난, 배제와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며 방역의 신뢰 기반을 약화시켰다. 개념공학은 이처럼 사회적 담론 속에서 작동하는 개념들의 윤리적, 사회적 구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적 언어와 소통 구조를 설계하는 데 초점을 둔다.
소통과 참여의 구조 재설계
팬데믹 대응에서 국가 주도의 수직적 지시와 강제는 불가피했지만, 효과적 위기 대응의 핵심은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협력에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을 방역의 객체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로 존중하고, 신뢰와 공감, 참여를 기반으로 한 수평적 소통 구조가 필요하다. 언어와 담론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인식과 행동, 사회적 질서를 구성하는 권력의 장치다. 따라서 감염병 윤리의 철학적 개입은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속성뿐 아니라, 그것이 어떤 언어와 개념 속에서 사회적 현실로 구성되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 개념의 재구성과 새로운 윤리적 프레임
팬데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다시 던졌다. 기존의 인간관은 자율적이고 분리된 개체로서의 인간을 전제했으나, 코로나19는 인간이 감염의 수용성과 전염 유발성을 동시에 지닌 ‘연결된 몸’임을 드러냈다. 이에 따라 건강과 질병은 단일 개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동물-환경의 상호의존적 관계망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하나의 세계, 하나의 건강(One World, One Health)’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된다. 또한, 인간은 바이러스뿐 아니라 마스크, 공기, 기술, 언어 등 비인간 존재자들과의 감응을 통해 존재가 구성되는 ‘감응적 존재’임이 드러났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감염병 대응은 통제와 처벌이 아니라 자율적 참여와 감응의 윤리, 공감과 연대를 기반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팬데믹 시대 철학의 역할은 기존의 개념과 인식체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보다 정의롭고 신뢰 가능한 소통과 협력의 구조를 설계하는 데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책에서 인간을 ‘호모 인펙티부스(Homo infectivus, 감염적 존재)’로 재규정하며, 연결된 몸, 하나의 건강, 감응의 윤리라는 새로운 철학적 프레임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감염병 위기 대응은 단순한 기술적, 제도적 조치를 넘어, 인식과 가치, 언어와 소통의 구조적 전환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