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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27805915
· 쪽수 : 159쪽
· 출판일 : 2014-11-21
책 소개
목차
1부
금속성
문장은 독한 담배처럼 타들어가고
태양은 뜨자마자 물든 노을이었다
새벽을 보낸 우린
허무를 향한 도약
허공의 개미집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개
천막이 있는 벽화
입체적인 백야
포유류의 사랑
전망 좋은 창가의 식사
구름의 문중
공룡 사골 전문점
꽃을 든 남자
그리면서 지운 얼굴
2부
이미지
스위치백
검은 엑스의 키스
미세 먼지들의 조우
내 얼굴은 환승역
뫼비우스의 라이터
달팽이는 머리 위의 거미를 보지 못한다
실점하는 추격조
悲, 테트라포드
양과 쥐가 만나는 시간
구멍 속으로
슬픈 사람의 강이 인내의 댐을 넘듯
해금강 버스
은밀한 젯밥
도착하지 않는 사람
우기의 사랑
심해의 조셉
따뜻한 경제
선명한 가족
불투명한 상자
3부
유리 위에 그은 선분
노을, 스타킹 속으로 사라진
래비타이거
사랑의 집
마녀는 매일 밤 고양이를 보낸다
감기
초야
고슴도치의 사랑
환각의 튜브
새벽 네시의 나프탈렌
재떨이가 있는 금연 구역
검은 원판 위의 포클레인
허공의 무희
새의 수화
아침의 보행
마우스 투 마우스
소문의 힘
나의 종말
해설· 사랑이여, 이 죄 없는 포유류 악당들을 보살피소서_신동옥
저자소개
책속에서
당신의 귀에 닿지 않는 내 마음이
입술은 내 마음이 물든 노을이에요
아침노을은 비를 부른다죠
나는 무거운 하늘 아래 우뚝 섰어요
내 목각의 다리가 흙에 묻혀 있네요
내려다보니 나는 나무인 거예요
누가 내게 이토록 기다란 다리를 주었을까요
의문을 품을수록 길어지는 하체
침묵만이 발기하는 내게 지친 당신이
나의 의족에 불을 붙여요
다리를 휘감은 구름의 나이테가
가시관처럼 머리 위를 맴돌아요
나를 사르는 당신의 마음에 비가 내리는군요
소리 없이 원한 것이 죄예요
노을 속으로 고통의 새들이 날아오겠죠
차가운 아침을 떠나 저녁노을 속으로 날아드는
비 맞은 새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내 몸속에 아름다운 자연이 깃들어요
새들은 나의 직립이 얼마나 조용한 비명인지
알고 있어요, 오직 고통의 새들뿐이에요
새들이 내 입속에 둥지를 틀어요
말뚝을 타고 오르는 저 불빛은
어둠뿐인 내 얼굴을 밝히겠지요
하늘엔 의성운(擬聲雲)의 붉은 혈관이 터져요
새들은 독이 든 열매로 익고
나는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불의 옷을 입어요
입술은 내 마음이 불타는 화염이에요
비에 젖든 피에 젖든
곧 꺼져버릴 화염이에요
― 「태양은 뜨자마자 물든 노을이었다」
어젯밤엔 입술을 물어뜯긴 구름이
내 어깨 위로 흘러왔다.
모니터엔 완성되지 않는 문장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종족 보존을 위한 시간이었다.
뇌세포가 공룡에 대한 지식으로 꿈틀거렸다.
나는 구름에 공룡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공룡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백악기의 혓바닥이 나를 핥은 것이다.
상처 입은 입을 중심으로 비늘이 덮였다.
공룡의 눈 속엔 백발의 노파가
산통을 겪고 있었고
내 눈 속엔 조류로 진화하지 못한
막다른 정서가 출렁이고 있었다.
초식을 하는 육식 공룡이 되고 싶은지
육식을 하는 초식 공룡이 되고 싶은지
공룡에게 물었다.
먹을 것이 없는 시대였고 씹을 수도 없는 입이었다.
공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의 공룡을 문장 속에 집어넣었다.
문장 속의 하루가 갔다.
나는 공룡을 재료로 식당을 차렸다.
입구엔 공룡 사골 전문점이라는 간판을 붙였다.
개업과 동시에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이 줄지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귀마개를 하고 있었다.
소리가 차가운 시대였다.
식당 안엔 뿔테 안경을 쓴 잡상인이
사전 속의 낱말을 파느라 분주했다.
문자가 가벼운 시대였다.
문장 밖의 나는 키보드를 눌러 잡상인을 쫓았다.
식당에 순수한 주문과 접수의 시간이 왔다.
공룡의 뼈를 우려낸 탕이 식탁에 전달되었고
탕 속엔 지워지는 주둥이가 건더기로 떠 있었다.
문장 밖에서 볼 때,
그것은 훼손된 사람의 심장 같았다.
숟가락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밖에서 그것은 키보드가 제자리를 걷는 소리 같았다.
사람들은 귀마개를 벗고 고막을 꺼내 카운터에 지불했다.
고막 속엔 아무런 소리도 들어 있지 않았다.
문장 밖은 여전히 어제였고
모니터엔 공룡의 울음이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 「공룡 사골 전문점」
내 시 속엔 시인이 없지만
자살한 시인이 행간을 걷는다고 나는 써보는 것이다.
인간은 상상을 하는 동물이어서
그가 죽기 전의 시인인지 죽은 후의 시인인지
매몰찬 독자는 내게 물을 것이다.
인간은 말을 꾸미는 동물이기도 해서
걷는 시인의 죽음도 죽은 시인의 걸음도 상상할 수 있다.
마음의 문법엔 시제 일치가 없고
내겐 독자가 없으므로 대답할 의무 없다.
어제는 마른하늘에 비가 온다.
내일은 젖은 하늘에 노을이 물든다.
오늘 낯선 사람은 어제 만난 사람,
오늘 반가운 사람은 내일 만날 사람.
파티션에 가로막힌 머리카락이 자란다.
붉게 물든 까만 머리카락이 자란다.
회상의 시인이자 부활의 시인이
그래, 내 시의 행간을 걷는 것이다.
그가 걷는 거리엔
두뇌를 스치는 단어의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경제적 무장을 해제한 시인들이
말로 세운 안개의 건물 속으로 들어가
시대의 아픔과 개인적 정서의 소용과
미적 진보의 향방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집에선 자식 없는 아내가
텅 빈 배 속에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유령 같은 남편을 기다릴 것이다.
안녕, 아버지를 배정받지 못한 정자들아.
안녕, 악천후 속의 난자들아.
너희들이 다시 보는 나의 과거라면
나는 어떤 시대가 받아주는 저주의 자식일까.
개가 된 논의가 오들오들 떨며
깨진 달걀 같은 폐가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다.
째깍째깍 장작 타는 소리 불 꺼지는 장작에 달라붙고
반짝이지 않는 생각의 별이 아궁이 속으로 쏟아진다.
흩어지는 안개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인의 손
살자, 오늘 만난 어제의 아내야.
살자, 내일 죽을 남편의 아내야.
개 한 마리 구워 먹고 쓸모없는 논의였다 하면
매몰찬 독자는 내게 물을 것이다.
개 같은 건 논의가 아니라
붉게 자라는 검은 머리털의 시인이 아니냐고.
비유의 경계는 편견뿐이고
마음의 마침표는 물음표뿐이어서
파티션에 가로막힌 개가 짖는다.
까만 털이 붉게 물든 개가 짖는다.
―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