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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41094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22-12-15
책 소개
목차
「빛 가운데 걷기」 김채원
인터뷰 김채원×홍성희
「버섯 농장」 성혜령
인터뷰 성혜령×선우은실
「연필 샌드위치」 현호정
인터뷰 현호정×이소
리뷰
책속에서
버스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내렸다. 노인은 버스에서 내린 사람이 아니었기에 대열에 끼지 않고 떨어져 걸었다. 자신이 나쁜 운세를 가졌다는 걸 모두가 알게 하려면 모두가 자신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계속 돌아다니면 되었다. 언제고 나쁜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자신의 운세 때문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째서인지 마음이 놓였다. 노인은 교차로에서 보행 신호를 지켜 횡단보도를 건넜다. 잠깐만, 잠깐만. 누군가 걷고 있는 노인을 붙잡았다. 노인은 횡단보도를 마저 건넌 뒤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김채원, 「빛 가운데 걷기」
경찰에 명의 도용으로 신고를 했지만 일단 빚을 갚지 않으면 신용 등급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진화에겐 아직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남아 있었고 이사를 가기 위해 무리해서 적금을 붓는 중이었다. 적금을 깨면서까지 남이 진 빚을 갚고 싶지는 않았다. 진화는 전 남자 친구가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진화는 계속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듣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모든 생각이 잠시 사라지고 단조로운 소리만 남았다. 그때만은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지 받지 않을지, 절반의 확률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성혜령, 「버섯 농장」
‘집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 꿈속의 내가 생각하며 다시 쪼그려 앉아 연필들을 주워 모을 때, 어떤 분노가 변의(便意)처럼 삽시간에 몸 안쪽을 채우며 나를 비명 지르게 했다. 나는 다시 젊은 나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부하려 더욱 크게 비명 지르지만 몸 구석구석의 혈관들이 조밀해지고 뼈들이 희어지는 것을, 뼈를 둘러싼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을, 근육을 둘러싼 살이 통통해지는 것을, 그 모두를 에워싼 통증들이 사라지는 것을 통제할 수 없다. 꿈속의 젊은 나와 꿈 밖의 젊은 내가 동시에 비명을 지를 때 꿈과 현실의 경계는 파선이 되고 나는 두 개의 마음으로 동시에 선언한다. ‘나는 더 이상 연필 샌드위치를 만들지 않겠다.’
―현호정, 「연필 샌드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