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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이탈리아소설
· ISBN : 9788934973768
· 쪽수 : 252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병이 난 건 처음이었다. 결국은 하나의 교훈으로 남았지만 그다지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병간호를 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늦게까지 남아서 나와 함께 체스를 두며 놀아주었다. 엄마와 나누던 독백마저도 소홀히 한 셈이었다. 에르미니아 고모는 내게 턴테이블과 음악을 들을 때 사용하라면서 노란색 흔들의자를 선물해주었다. 마달레나는 점심식사를 방으로 가져다주었고 체온을 재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내 이마에 키스를 해댔다. “아프니까 좋은데.” 저녁 무렵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렇지. 근데 사람들은 금방 지치거든. 동정심은 물고기랑 같다니까. 셋째 날에는 꼭 상해버린단 말이지.”
“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 초등학교부터 끝내고.” 고모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부모 극성에 못 이겨 나오는 그런 사육장 거위 같은 애들하고는 섞이지 않는 게 좋아. 혼자서 공부할수록 자기만의 스타일을 더 키울 수 있는 법이야. 피아노 잘 치는 아이들은 많아. 중요한 건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끄집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거지.” “바흐처럼?” 나는 밀어붙였다. 한번 발동이 걸린 고모의 열광하는 모습은 내게 짜릿함을 선사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좋았다.
중학교 삼 년 동안 내가 음악실에 들어간 건 몇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일주일만 더 견디면 그걸로 끝이었다. 음악실에 들어갈 일은 더는 없었을 것이다. 학기가 끝나가던 그 시기에 내가 아파서 드러눕기라도 했더라면 누군가가가 나를 그 방으로 유혹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설계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에 기회란 그저 우연히 다가올 분이다. 멋진 인생을 산다는 것도, 살 만하다거나 살기 괴롭다거나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형편없다거나 하는 것도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연히 그날 열쇠구멍에 고스란히 꽂혀 있던 열쇠 하나 때문에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게으름 때문인지 매사에 소홀한 탓인지 아니면 몸이 너무 무거워서인지 그날 청소부 아주머니 알비나가 실수로 꽂아둔 그 열쇠 때문에 나는 모든 걸 망쳐버렸다. 내가 음악실에 들어갈 생각을 한 건 그날 아침 열쇠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두서없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