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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양반전 외

[큰글자도서] 양반전 외

장철문 (지은이), 박지원, 이옥 (원작), 이현미 (그림)
창비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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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양반전 외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큰글자도서] 양반전 외  
· 분류 : 국내도서 > 어린이 > 동화/명작/고전 > 어린이를 위한 고전
· ISBN : 9788936476229
· 쪽수 : 136쪽
· 출판일 : 2018-09-01

책 소개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과 주제의식으로 조선 후기,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인물과 사상을 창조했던 박지원과 이옥의 작품 일곱 편이 실려 있다. 널리 알려진 '양반전', '허생전' 외에도, 배짱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귀신을 제압할 수 있음을 재기있는 필치로 보여주는 이옥의 '최생원전' 등이 수록되었다.

목차

고전의 재미 속으로 빠져 보자

박지원 원작
거지 왕초 광문이 - 광문자전
허생, 책을 덮고 나서다 - 허생전
양반이냐 날도둑이냐 - 양반전
북곽 선생, 범에게 야단맞다 - 호질

이옥 원작
최생원이 귀신 잡네 - 최생원전
눈 뜨고 코 베일라! - 이홍전
심생의 사랑 - 심생전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읽는 작품 해설

저자소개

장철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94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바람의 서쪽》 《산벚나무의 저녁》 《무릎 위의 자작나무》 《비유의 바깥》, 동시집 《자꾸 건드리니까》 등. 백석문학상, 서정시학상 등 수상.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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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미 (그림)    정보 더보기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추계예술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지금은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1997년 출판미술대전 황금도깨비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린 책으로 《까막눈 삼디기》, 《오세암》, 《콩쥐팥쥐》, 《해와 같이 달과 같이》, 《철이, 가출을 결심하다》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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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실학자다. 박사유(朴師愈)와 함평(咸平) 이씨(李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 갔다. 청년 시절엔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해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했다. 영조 47년(1771) 마침내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면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의 세계를 펼쳐 갔다. 정조 2년(1778)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벽파를 박해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있는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해 은둔 생활을 했다. 연암이라는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 4년(1780)에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연행(燕行) 권유를 받고 정사의 반당 자격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건륭 황제가 열하에서 고희연을 치르는 바람에 조선 사신 역사상 처음으로 열하에 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연행을 통해 깨달음을 확대한 연암은 여행의 경험을 수년간 정리해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정조 10년(1786) 유언호의 천거로 음사(蔭仕)인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정조 13년(1789)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했고, 정조 15년(1791)에는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실제로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에 정조 임금에게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바쳐 칭송을 들었다. 1800년 양양부사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되 법도를 지키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지향했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암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은 《열하일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연암은 《열하일기》 외에도 《방경각외전》,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을 직접 편찬했다. 연암의 유고는 그의 아들 박종채에 의해서 정리되었는데 아들이 쓴 〈과정록추기〉에 의하면 연암의 유고는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등 총 55권으로 정리되었다. 《열하일기》는 오늘날 완질은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암의 작품은 대부분이 문(文)이며 시(詩)는 50여 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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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 (지은이)    정보 더보기
자(字)가 기상(其相)이고, 본관은(本貫)은 전주(全州)며, 본가는 경기도 남양(南陽)이다. 그는 젊은 시절 성균 유생으로 한양에서 활동했다. 조부 이동윤(李東胤)은 서족(庶族) 무반(武班) 출신이고, 부친 이상오(李常五)는 1754년에 진사에 급제했으며, 이옥은 성균 유생 시절인 1790년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슬하에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의 초명은 우태(友泰)다. 그의 성장을 알려 주는 연보가 없어 생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저술 등을 통해서 추적해 보면, 그는 30세를 전후해 한양에서 성균 유생의 신분으로 활동했다. 1792년에 임금이 성균 유생들에게 열흘에 한 번씩 내려 준 글제에 따라 지은 그의 글이 순전히 소설문체로 작성되었다고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선비들은 이런 소설문체를 유행처럼 답습했는데 정조는 당시 성균 유생들로 하여금 매일 사륙문(四六文) 50수를 채우게 해 문체를 바르게 한 후에 과거 시험에 나아가도록 명했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바로 이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의 문집 <봉성문여(鳳城文餘)>의 <추기남정시말(追記南征始末)>에 의하면, 그가 성균 유생으로 있던 1796년(36세)에 정조가 그의 문체를 보고 괴이하다고 과거를 보지 못하게 했다가 충청도 정산현에 충군(充軍)하게 했다. 그해 9월에 다시 돌아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문체를 고치지 못해 다시 영남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충(移充) 편적(編籍)되었다가 사흘 후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1797년(37세)에 별시(別試) 초시(初試)에서 장원을 차지했으나, 그의 책문이 근래의 격식에 어긋났다 해서 방말(榜末)에 붙여졌다. 방말이었지만 과거에 급제를 했으므로 문체로 인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는데도 그는 충군에 대한 청원을 하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1798년(38세)이 되던 봄에 삼가현에서 소환 독촉이 심해지자, 형부, 병부, 예부에 들러서 청원을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결국 1800년(40세) 10월에 다시 삼가현에 내려가 118일 동안을 그곳에 머물고 이듬해 2월에 귀향했다. 그 뒤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유옥사(辛酉獄事)가 일어났던 1801년(41세, 순조 1년)에 그는 잠시 귀경했지만, 성균 유생 시절에 교분을 나누었던 김려(金?)와 그의 아우 김선(金?) 그리고 강이천(姜彛天) 등과 헤어져서 다시 본가에 돌아와 은둔자적하며 일생을 마칠 때까지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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