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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력을 키우는 고전소설 2

콘텐츠력을 키우는 고전소설 2

(빅데이터 시대에 10대가 꼭 읽어야)

박지원, 허균, 석식영암, 이곡, 이첨, 설총, 작자미상 (지은이)
주니어미래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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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력을 키우는 고전소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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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콘텐츠력을 키우는 고전소설 2 (빅데이터 시대에 10대가 꼭 읽어야)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고전
· ISBN : 9788972995906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6-01-05

책 소개

빅데이터의 시대를 맞이하여 폭넓은 독서와 깊은 이해력, 명철한 사고력이 더욱 절실해졌다. 인공지능으로 예술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인간이 기계를 앞서는 단 하나가 있다면 창조성이다. 콘텐츠가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힘을 길러내기 위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기본적인 고전을 다시 읽어보자.

목차

심청전
양반전
허생전
호질
옹고집전
정시자전
죽부인전
저생전
춘향전
홍길동전
화왕계
흥부전
배비장전

저자소개

박지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실학자다. 박사유(朴師愈)와 함평(咸平) 이씨(李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 갔다. 청년 시절엔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해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했다. 영조 47년(1771) 마침내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면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의 세계를 펼쳐 갔다. 정조 2년(1778)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벽파를 박해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있는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해 은둔 생활을 했다. 연암이라는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 4년(1780)에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연행(燕行) 권유를 받고 정사의 반당 자격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건륭 황제가 열하에서 고희연을 치르는 바람에 조선 사신 역사상 처음으로 열하에 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연행을 통해 깨달음을 확대한 연암은 여행의 경험을 수년간 정리해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정조 10년(1786) 유언호의 천거로 음사(蔭仕)인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정조 13년(1789)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했고, 정조 15년(1791)에는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실제로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에 정조 임금에게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바쳐 칭송을 들었다. 1800년 양양부사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되 법도를 지키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지향했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암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은 《열하일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연암은 《열하일기》 외에도 《방경각외전》,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을 직접 편찬했다. 연암의 유고는 그의 아들 박종채에 의해서 정리되었는데 아들이 쓴 〈과정록추기〉에 의하면 연암의 유고는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등 총 55권으로 정리되었다. 《열하일기》는 오늘날 완질은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암의 작품은 대부분이 문(文)이며 시(詩)는 50여 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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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지은이)    정보 더보기
1569년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건천동에서 자랐다. 1579년 아버지가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는데 다음 해에 아버지가 상주 객관에서 죽었다. 1582년 작은형을 찾아온 시인 이달을 처음 만났고 이달은 나중에 그의 스승이 되었다. 1588년 작은형이 죽고, 1589년에 누이 난설헌이 죽은 후에 난설헌의 시 210편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홀어머니 김씨와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피난길을 떠나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강릉에 도착했고, 사천 애일당 외가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애일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蛟山)이란 호를 썼다. 1593년에《학산초담》을 지었고, 1596년 강릉부사였던 정구와 함께 《강릉지》를 엮었다. 1598년 중국의 장군과 사신들을 접대하느라고 돌아다녔다. 중국의 종군문인 오명제에게 《조선시선》을 엮어주었으며, 《난설헌집》 초고를 중국에 전파케 했다. 10월 13일, 다시 병조좌랑이 되어 가을에 평안도를 다녀왔다. 1599년 황해도사가 되었는데, 기생을 너무 많이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11년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에 도착해서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11월에 귀양이 풀려 서울로 돌아왔다. 1612년 8월 9일, 큰형 허성이 죽었고 가장 가까운 벗 권필이 광해군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매맞아 죽었다. 1615년 정2품 가정대부에 올랐다.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이때 다녀온 기록을 《을병조천록》으로 남겼다. 1618년 봄, 스승 이달의 시집 《손곡집》을 간행하였다. 윤4월 7일, 남대문에다 백성들을 선동하는 흉서를 붙인 심복 하인준이 잡혀들어갔다. 17일에 허균도 기준격과 함께 옥에 갇혔다. 그의 심복들이 허균을 탈옥시키려고 감옥에 돌을 던지며 시위하였다. 22일에 광해군이 친히 허균의 심복들을 국문하였다. 이이첨은 망설이는 광해군을 협박하여 허균의 처형을 서둘렀다. 허균은 결안도 없이 8월 24일에 그의 심복들과 함께 서시에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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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 (지은이)    정보 더보기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중반, 원 간섭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며 고려와 원나라를 아우르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 준 지식인이다. 1298년 충남 한산의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2세에 부친을 여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에 매진해, 1320년(충숙왕 7) 22세의 나이로 고려 예부시에 2등으로 합격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학문적 열정은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수차례의 도전 끝에 1333년, 35세의 나이로 원나라 제과(制科)에 응시해 고려인 역대 최고 성적인 제2갑(甲)으로 급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이곡은 원나라 한림국사원의 검열관과 고려의 정동행성 원외랑 등을 역임하며, 고려 문인으로서는 최장 기간인 10여 년간 두 나라의 관료 생활을 병행했다. 그는 단순히 입신양명에 그치지 않고, 1335년 공녀 선발의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는 〈대언관청파취동녀서(代言官請罷取童女書)〉를 원나라 조정에 올려 1337년부터 공녀 징발을 금지하게 만드는 등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 또한 1346년에는 민지(閔漬)가 찬한 《편년강목》을 증수하고 실록 편찬에 참여하는 등 역사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곡은 교육자로서도 탁월해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원나라 국자감에 유학시켜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키워 냈으며, 이를 통해 한산 이씨 가문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렸다. 말년인 1349년에는 공민왕 추대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정치적 혼란과 신변의 불안 속에서 금강산과 관동, 영남 지방을 유람하며 수많은 기행 문학을 남겼다. 1350년 모친상을 당한 뒤 이듬해 1월, 54세를 일기로 고향 한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세계 제국 원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소화해 고려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시대를 앞서간 경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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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지은이)    정보 더보기
신라 경덕왕 때 학자. 자는 총지이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 660년 사이로 짐작된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에 능하였으며 신라말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강수.최치원과 함께 신라 삼문장으로 꼽혔다. 향찰을 집대성하고 정리했으며,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설총의 유일한 글인 '화왕계'는 <삼국사기> '설총 열전'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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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식영암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말기의 시인이자 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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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첨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문장가이자 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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