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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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표적 문신이자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그는 한양 서쪽 반송방에서 노론의 중진 박필균의 손자이자 박사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인과 노론의 명문가였으며 조부 박필균은 정2품 관직에 오르면서도 붕당 정치에 휩쓸리지 않아 적이 없었다. 박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건장하고 영민하며 암기력이 뛰어났다. 열여섯 살에 처사 이보천의 딸과 결혼한 후에는 장인과 처삼촌 이양천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정진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배우고 처삼촌에게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와 문장론을 익히며 글쓰기의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 이때 함께 공부한 처남 이재성은 평생의 문우이자 든든한 조언자가 되었다. 또한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를 다녀온 삼종형 박명원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청나라 선진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는 향후 그가 실학의 핵심인 ‘북학파(北學派)’의 거두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이후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과 교유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특히 홍대용과 교제하며 지구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적 가치를 토론하며 견문을 넓혀나갔다. 과거에 낙방한 후 저술에 전념하던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 여행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충·효·열을 강조하던 전통 도학에서 벗어나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실학에 주목했다. 자연과학과 서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그는 농업 기술서인 《과농소초》를 저술했다. 나아가 백성에게 이롭다면 오랑캐의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북학’ 정신을 주장하며 명분에 치우쳤던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화두를 던졌다. 또한 그는 기발한 문체로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날카롭게 고발한 문학가였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산문으로 조선 문단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청나라 견문록인 《열하일기》에서는 현지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서체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글씨체를 선보이기도 했다.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그의 문장은 조선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열하일기》에 수록된 〈양반전〉, 〈허생전〉, 〈호질〉을 비롯해 〈민옹전〉, 〈광문자전〉, 〈예덕선생전〉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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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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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1569∼1618)은 어떤 사람인가? 흔히 허균은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또는 반역을 기도하다가 처형된 인물로 운위된다. 《홍길동전》에 나타나는 적서 차별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허균의 평소 염원을 반영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의견은 허균과 거리를 두어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적대적 인물의 전언(傳言)에만 등장할 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허균이 반역을 도모했는가 하는 문제 역시 진위가 불분명하다. 조선 시대에 반역죄로 처형된 여타 인물의 경우와 달리, 허균에 대해서는 직접적 물증 없이 주변 인물들의 증언만으로 사형이 결정되었기에 ‘훗날 반드시 이론(異論)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기도 할 정도다.
이처럼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음에도 위의 두 가지 사안은 학교 교육이나 대중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 결과 일반 대중이 허균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허균에 관한 직접 경험이 아니라 허균에 대한 소문을 채록한 야사(野史) 계통의 자료에 의존한 현대의 전언들이 허균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증폭시킨 면이 있다.
하지만 신빙성 있는 1차 자료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허균의 면모는 그런 대중적인 인식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는 조선 시대를 풍미한 사상과 문화, 정치 제도에 순응한 점에 있어서는 동시대의 여느 관료 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허균은 유가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에 대한 학습 및 내재화, 충효라는 덕목에 대한 숭상과 실천을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으로 인정한다. 본서에 수록한 〈엄처사전〉은 물론, 〈학산초담〉을 비롯한 초기작이나 허균의 나이 40대 초반에 쓴 〈학론(學論)〉(1610) 같은 글에서 일관되게 이 입장이 견지되고 있다. 흔히 허균이 당대 관료나 사대부 문인들과 구별되는 개성을 지녔다 해 운위되는 것이 불교 서적이나 도가 사상에 대한 애호라고들 한다. 하지만 도가적 어휘가 대거 등장하는 〈남궁선생전〉을 쓴 이후에도 〈학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정치의 기본 원리로서 성리학의 기본적 사유 방식을 옹호한 점은 특기될 필요가 있다.
또한 허균이 혁명 내지 사회 개혁을 도모한 인물로 거론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호민론〉이다. 〈호민론〉에 피력된 입장은 민(民)의 역량에 대한 호감과 긍정이 아니라, 민의 불만을 조기에 무마해야 기성 지배층의 안정적 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라는 점이 최근 연구들에서 지적되어 왔다. 민에 대한 허균의 입장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으며, 이 점은 본서에 수록한 〈남궁선생전〉의 조회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은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기성의 가치에 상당히 동조하는 가운데 주류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인물이다. 40대 이후에 정계의 고위직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꺼이 그에 응했던 사실은 허균의 본심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연마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상류층이기에 접근할 수 있었던 문화 자원을 적극 활용했다.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는 대부분 그의 사회적 지위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다양한 자원들에 힘입고 있다. 가령 허균의 척독과 같은 초단형(超斷形)의 편지 양식이나, 그의 산문 창작에 있어서 중요한 참조점이 된 《세설신어》 같은 책은 단지 허균이라는 한 개인의 기호에 의해 개발되거나 주목된 책이 아니다.
선조?광해군 연간 조선 문단에서는 명대 문학, 특히 강남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서 애호된 문학 양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허균 역시 이러한 동향에 참여하고 있었다. 《세설신어》 역시 강남 사대부들 사이에서 16세기에 재발견되고 주목된 서적 중 하나다. 한 단락 정도 되는 짧은 분량의 일화나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동원해 묘사하고자 하는 인물의 품성을 간결하게 스케치하는 《세설신어》의 스타일은 위진 남북조 시대에 나온 것이지만, 당시 명대 문학을 선도하고 있던 16세기 강남 문단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6세기 말 명대 문단을 주도했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에 의해 1585년에 《세설신어보》가 출간되고, 이어서 《세설신어》를 모방한 각종 후속 작품이 대거 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대 강남 사대부 문인 그룹 내에서 《세설신어》가 크게 유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제기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당대 강남의 경제적 부흥에 힘입어 문화적 소양이 일천한 신흥 부유층이 부상했고, 이들의 도전에 응전하는 기성 사대부 계층은 자신들이야말로 선천적인 차원에서 우수한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을 정립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지(李贄, 1527∼1602)나 원굉도(袁宏道, 1568∼1610)처럼 문학에 있어 개성 표현의 가치를 중시한 것도, 강남 지역의 그러한 문화적 동향의 한 단면으로, 기성 사대부들의 문화적 권위를 수성하려는 경향의 한 지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시야에 넣고 다시 허균의 저 유명한 발언,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라는 개성 중시의 선언을 되짚어 보면, 일견 독창성을 중시하는 듯한 허균의 지향 역시 보다 넓은 문화적 흐름의 일부일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실로 허균은 《세설신어》를 비롯해 왕세정으로 집약되는 강남 문인 사회의 문예적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허균은 그의 〈사우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세설체 저작의 저자이자 왕세정과 더불어 강남의 문예 담론을 주도했던 인물인 하량준(何良俊, 1506∼1573)의 글에 대해서도 열렬한 호감을 표했다. 특히 명 사신이자 강남 출신 문인인 주지번(朱之蕃, 1558∼1624)과 1606년에 직접 만난 이후로는, 강남의 문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회화, 서예, 미식 등 다채로운 문화적 활동 전반으로 관심의 폭을 확장해 갔다. 작문에 있어서도 기성의 전범이나 관습을 답습하기보다 글쓴이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 역시 주지번과의 만남 이후 뚜렷하게 정식화된다. 요컨대 동시대 조선 관료 문인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허균의 개성도 좀 더 시야를 확대해 보면 일정한 문화적 동향과의 동질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다.
이상에서 짚어 본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허균은 당대 조선 사회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고급문화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자신의 소양을 형성해 나갔으며, 결국 허균의 문학적 성취와 개성 강조의 문학론은 단순한 개인의 독창성의 발로라기보다는, 조선 중기 사대부 문화와 명대 강남 문인 문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결과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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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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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말에서 14세기 중반, 원 간섭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며 고려와 원나라를 아우르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 준 지식인이다. 1298년 충남 한산의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2세에 부친을 여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에 매진해, 1320년(충숙왕 7) 22세의 나이로 고려 예부시에 2등으로 합격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학문적 열정은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수차례의 도전 끝에 1333년, 35세의 나이로 원나라 제과(制科)에 응시해 고려인 역대 최고 성적인 제2갑(甲)으로 급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이곡은 원나라 한림국사원의 검열관과 고려의 정동행성 원외랑 등을 역임하며, 고려 문인으로서는 최장 기간인 10여 년간 두 나라의 관료 생활을 병행했다. 그는 단순히 입신양명에 그치지 않고, 1335년 공녀 선발의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는 〈대언관청파취동녀서(代言官請罷取童女書)〉를 원나라 조정에 올려 1337년부터 공녀 징발을 금지하게 만드는 등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 또한 1346년에는 민지(閔漬)가 찬한 《편년강목》을 증수하고 실록 편찬에 참여하는 등 역사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곡은 교육자로서도 탁월해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원나라 국자감에 유학시켜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키워 냈으며, 이를 통해 한산 이씨 가문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렸다. 말년인 1349년에는 공민왕 추대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정치적 혼란과 신변의 불안 속에서 금강산과 관동, 영남 지방을 유람하며 수많은 기행 문학을 남겼다. 1350년 모친상을 당한 뒤 이듬해 1월, 54세를 일기로 고향 한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세계 제국 원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소화해 고려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시대를 앞서간 경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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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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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덕왕 때 학자. 자는 총지이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 660년 사이로 짐작된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에 능하였으며 신라말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강수.최치원과 함께 신라 삼문장으로 꼽혔다. 향찰을 집대성하고 정리했으며,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설총의 유일한 글인 '화왕계'는 <삼국사기> '설총 열전'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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