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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청소년들아, 옛 선비를 만나자)

최행귀, 이인로, 임춘, 이규보, 최자, 이제현, 서거정, 김시습, 성현, 차천로, 유몽인, 이수광, 신흠, 허균, 김만중, 김창협, 김창흡, 김춘택, 이익, 홍양호,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남공철, 정약용, 조수삼, 김려, 홍석주, 김정희, 이상적 (지은이), 박종호 (엮은이), 리철화, 류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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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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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청소년들아, 옛 선비를 만나자)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고전
· ISBN : 9791163144366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5-11-17

책 소개

고려의 이규보부터 조선의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사를 빛낸 선비 서른한 명의 글을 모았다. 옛사람들이 남긴 문학과 예술에 대한 생각을 오늘날 언어로 다시 들려준다.

목차

1부 시는 하늘에서 나오거늘

우리 시와 중국 시| 최행귀 14
마음의 샘에서 흐른다| 이인로 15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 임춘 18
문장 운율이 그리 중요한가| 임춘 19
동명왕의 노래를 기록하며| 이규보 20
아홉 가지 마땅하지 않은 문체| 이규보 23
새 뜻을 새 말에 담으니| 이규보 26
시인의 신령스러운 힘| 이규보 28
시 귀신을 몰아내는 글| 이규보 30
시의 뜻은 하늘에서 나오거늘| 이규보 36
시를 불사르고| 이규보 39
손득지에게 다시 보내노라| 이규보 40
두 마리 백로 그림을 노래하노라| 이규보 45
시험에 낙방한 그대에게| 이규보 47
시는 느낀 바를 나타내야 한다| 이규보 49
시인이 갖춰야 할 것| 최자 51
이지심의 시| 최자 55
지금 시를 배우는 사람들| 최자 57
시의 품격과 내용, 시어와 운율| 최자 59
시를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최자 61
역옹패설 전편 머리말| 이제현 65
역옹패설 후편 머리말| 이제현 67
시인들의 시는 다 다르다| 이제현 69
정지상의 시| 이제현 71
시의 표현 기법| 이제현 73
어려운 시 감상| 이제현 76
임춘과 최자의 시| 이제현 77
뜻을 말로 표현하면| 이제현 79

2부 무릇 글을 쓰려면

시는 기백을 앞세워야| 서거정 82
눈앞에 보듯이 묘사해야| 서거정 85
시를 알기는 어렵다| 서거정 87
작품은 우열이 있으니| 서거정 88
시의 기능| 서거정 89
이규보와 이색의 장편시| 서거정 91
문과 무의 관계| 서거정 92
문장은 여행과 현실에서 배워야| 서거정 94
책도 읽고 여행도 하기를| 서거정 96
어찌하여 문인들은 불우한가| 서거정 97
시는 찬물이 솟는 샘| 김시습 98
느낀 대로| 김시습 99
무릇 글을 쓰려면| 김시습 100
굴원의 노래| 김시습 102
우리나라의 문인들| 성현 104
우리나라의 화가들| 성현 107
우리나라의 음악가들| 성현 109

3부 나무꾼과 아낙네의 노래

시인은 가장 맑은 사람이다| 차천로 114
시는 영원히 성대한 일| 차천로 115
시는 사상과 감정의 표현| 유몽인 116
시는 무엇을 하는가?| 유몽인 117
시가 생활을 반영한다| 유몽인 118
김시습의 풍자시| 유몽인 120
어려운 것은 구상이다| 유몽인 122
그림과 문장이 같은 점| 유몽인 124
안견의 대나무 그림| 유몽인 126
문장에서 중요한 것| 이수광 128
그림의 신묘한 경지| 신흠 134
김생의 ‘관동도’에 쓴다| 신흠 135
백광훈의 시| 신흠 136
정철의 시| 신흠 137
고요히 지내는 것| 허균 138
시 두 편| 허균 139
나무꾼 아이와 물 긷는 아낙네의 말| 김만중 141
소설 쓰는 까닭| 김만중 142
송과 명, 당나라 시를 배우는 자세| 김창협 143
김만중의 문장| 김창흡 145
자연과 마음의 소통| 김창흡 146
산문이면서 시이고 시이면서 음악| 김창흡 147
시를 아는 데 따로 재주가 있다| 김창흡 148
문장 다듬기를 지나치게 하면| 김창흡 149
이해조의 문장| 김창흡 150
시의 병통에서 벗어난 최효건의 시| 김창흡 151
우리말로 쓴 노래와 소설| 김춘택 152
세상이 이로움과 욕망의 구렁에 빠져 있으니| 이익 156

4부 참다운 시는 자기 목소리를 낸다

모든 노래가 민요에서 나왔으니| 홍양호 160
문장은 호수와 같다| 홍양호 161
문장이란 글귀를 꾸미는 것이 아니니| 홍양호 162
옛날과 지금| 홍양호 163
시는 터져 나오는 소리| 홍양호 164
마음 그대로 우러나온 시| 홍대용 165
육조음에게 부치는 편지| 홍대용 168
손유의에게 부치는 편지| 홍대용 170
반정균에게 부치는 편지| 홍대용 171
글을 짓는 데는 오직 진실해야| 박지원 172
잃어버린 예법은 시골로 가서 찾아야| 박지원 175
시다운 생각이 담겨 있는 글| 박지원 179
이덕무의 시는 조선 노래다| 박지원 182
조그만 재주라도 모든 것을 잊고| 박지원 186
옛것을 충분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박지원 188
비속한 일상이 다 현실이라| 박지원 191
몇 백 번 싸워 승리한 글| 박지원 194
이름을 숨기지 말아야 하고| 박지원 198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박지원 200
그림을 모르는 자는 시를 모른다| 박지원 202
송강 정철의 무덤에서| 이덕무 204
이제현의 시| 이덕무 205
지기와 지음| 이덕무 206
이언진의 시| 이덕무 208
기준조의 시| 이덕무 210
뛰어난 묘사| 이덕무 211
박제가가 준 시| 이덕무 212
연암 박지원| 이덕무 214
참다운 시는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낸다| 박제가 216

5부 시대를 노래하라

모방한 것은 문장이 아니다| 남공철 220
문장에서 기와 수법| 남공철 221
고문은 모두 거짓이다| 남공철 223
거문고는 시와 가장 가깝다| 남공철 224
표현이 아름답고 이치가 명확한 글| 남공철 225
문장을 배우는 순서| 남공철 226
문체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정약용 227
무엇이 진정한 문장인가| 정약용 229
음악의 목적| 정약용 232
음악의 효과| 정약용 234
예술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약용 236
훌륭한 문장, 진정한 문장| 정약용 238
시는 뜻의 표현이다| 정약용 239
시를 쓰는 마음가짐| 정약용 240
글을 쓰려면| 정약용 242
호남의 인재 유윤오 군| 조수삼 244
내 젊은 날의 글쓰기 버릇| 조수삼 247
“나는 지금 사람이다”| 김려 249
이옥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 김려 250
문장을 보는 것은 꽃을 보는 것과 같다| 김려 251
덕 있는 자는 문장도 아름답다| 홍석주 252
낡은 말과 새로운 말| 홍석주 254
시는 사람을 감동시켜야| 홍석주 257
문장의 오묘한 맛| 김정희 261
자기를 속이지 말라| 김정희 262
시대의 노래| 김정희 263
글과 감정| 이상적 267
시는 그림이고 그림은 시인데| 이상적 268

우리 고전 깊이 읽기
• 우리 겨레의 예술과 미학 272
• 선비들의 글쓰기 정신 275
• 오늘, 고전을 읽어야 하는 까닭 284

찾아보기 286

저자소개

김시습 (지은이)    정보 더보기
1435~1493.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청한淸寒),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반궁(泮宮) 북쪽의 초가집에서 부친 김일성(金日省)과 모친 울진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39년(세종 21), 5세 때, 정승 허조(許稠)가 집으로 찾아와 김시습의 시재(詩才)를 확인하였고, 이후 조정의 고관들이 김시습을 보기 위해 자주 집으로 찾아왔다. 김시습이 ‘오세신동’으로 불린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1443년(세종 25), 9세 무렵 세종이 승정원 승지 박이창(朴以昌)으로 하여금 김시습을 대궐로 불러 그 재능을 확인케 했는데, 김시습은 박이창 면전에서 시구를 짓고 글씨를 썼으며, 세종은 박이창을 통해 김시습에게 금포(錦袍: 비단 도포)를 하사하고 ‘훗날 이 아이를 크게 쓰겠다’는 말을 전한다. 1455년(단종 3, 세조 1),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자 문을 닫고 3일을 나오지 않다가 홀연 통곡하고 책을 다 불태워 버린 후 미친 시늉을 하며 측간에 빠졌다가 달아났다. 이후 삭발한 후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 하였다. 1463년(세조 9), 29세 때, 경주 금오산(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우거하였는데, 이후 1467년경,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것으로 보인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환속했지만, 성종이 계비(繼妃) 윤씨를 폐비(廢妃)하고 사사(賜死)하는 사건을 보고 2년 만에 다시 승려의 복장을 하고 관동으로 향했다. 1493년(성종 24), 59세 때 「자사진찬」(自寫眞贊)을 짓고, 곧바로 이 해 2월, 무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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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 (지은이)    정보 더보기
호는 담정(藫庭)이다. 1797년 겨울 강이천의 비어사건에 휘말려 함경북도 북동부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시 천주교도와 친분을 맺은 혐의로 체포되어 혹독한 문초를 당한 후 1801년 4월 우해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동시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손암 정약전 선생(1758~1816)이 실학자적 관점에서 1814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면 담정은 감수성 넘치는 시인의 시각으로 바다생물을 관찰하고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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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 실학자·서화가.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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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원작)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 실학자로,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규장각을 세우자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이 되었다. 이후 생애의 대부분을 검서관으로 봉직하며 국왕의 저술과 언론을 편집하고 교정하는 업무를 맡아보았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고, 세 번 더 북경을 여행하여 많은 중국 관료나 학자와 교유했다. 1800년 정조의 사망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고, 1801년 윤가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서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저서로 『북학의』와 『정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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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 대표적 문신이자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그는 한양 서쪽 반송방에서 노론의 중진 박필균의 손자이자 박사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인과 노론의 명문가였으며 조부 박필균은 정2품 관직에 오르면서도 붕당 정치에 휩쓸리지 않아 적이 없었다. 박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건장하고 영민하며 암기력이 뛰어났다. 열여섯 살에 처사 이보천의 딸과 결혼한 후에는 장인과 처삼촌 이양천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정진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배우고 처삼촌에게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와 문장론을 익히며 글쓰기의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 이때 함께 공부한 처남 이재성은 평생의 문우이자 든든한 조언자가 되었다. 또한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를 다녀온 삼종형 박명원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청나라 선진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는 향후 그가 실학의 핵심인 ‘북학파(北學派)’의 거두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이후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과 교유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특히 홍대용과 교제하며 지구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적 가치를 토론하며 견문을 넓혀나갔다. 과거에 낙방한 후 저술에 전념하던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 여행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충·효·열을 강조하던 전통 도학에서 벗어나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실학에 주목했다. 자연과학과 서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그는 농업 기술서인 《과농소초》를 저술했다. 나아가 백성에게 이롭다면 오랑캐의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북학’ 정신을 주장하며 명분에 치우쳤던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화두를 던졌다. 또한 그는 기발한 문체로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날카롭게 고발한 문학가였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산문으로 조선 문단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청나라 견문록인 《열하일기》에서는 현지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서체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글씨체를 선보이기도 했다.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그의 문장은 조선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열하일기》에 수록된 〈양반전〉, 〈허생전〉, 〈호질〉을 비롯해 〈민옹전〉, 〈광문자전〉, 〈예덕선생전〉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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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세종 2년에 태어나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요 학자였다. 자는 강중(剛中) 또는 자원(子元)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으로 불렸다. 목사를 지낸 달성 서씨 미성(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세종 20년에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세종 2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폭이 넓어 천문·지리·의약·점성술·풍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다녀왔고, 세조가 즉위하자 세자 사부로 보임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사은사로 중국에 갔을 때 그의 문장을 대륙에까지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성종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 깊이 관여하였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도 그의 손을 거쳤다.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를 오래도록 겸하면서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45년간의 관직생활 동안 절반이나 문형을 관장할 정도였다. 아울러 전후 23 차례에 걸친 과거 시험을 관장하여 수많은 인재를 그의 손으로 뽑았다. 학풍과 사상은 조선 초기 관학의 분위기를 대변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훈구대신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지만, 여러 전적들을 편찬할 때는 신진 사림계의 인물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문집 ≪사가집(四佳集)≫이 세상에 전한다.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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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층 문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齋)·허백당(虛白堂)·부휴자(浮休子)·국오(菊塢), 시호는 문대(文戴)다. 1462년(세조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해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1468년(예종 즉위) 예문관수찬(藝文館修撰)을 지냈다. 맏형 임(任)을 따라 명나라 사행(使行) 때 지은 기행시를 정리해 《관광록(觀光錄)》으로 엮었다. 14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이 왔는데 이들과 시를 수작해 그들을 탄복하게 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몇 개월 뒤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뒤에 신원(伸?)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그는 글씨를 잘 썼으며, 음률(音律)에도 밝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고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해 음악을 집대성했다. 뿐만 아니라 왕명으로 고려가요인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을 개산(改刪)했다. 대표 저술인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정치·사회·문화·제도·풍속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 《허백당집(虛白堂集)》, 《풍아록(風雅錄)》,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주의패설(奏議稗說)》, 《금낭행적(錦囊行跡)》, 《상유비람(桑楡備覽)》, 《풍소궤범(風騷軌範)》, 《경륜대궤(經綸大軌)》,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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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흠 (지은이)    정보 더보기
1566~1628.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사상가이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성리학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 비주류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사상적 대안을 모색하였다. 만물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유연한 관점을 지녀 다양한 색깔의 글을 남긴바, 그의 글은 주제가 호한하면서도 자유롭고 섬세한 감성을 보여 준다. 호는 상촌이며, 문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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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 (원작)    정보 더보기
조선조 중기의 문장가. 자는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於于, 간암艮庵, 묵호자默好子이다.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아들 '약' 과 함께 처형당했다가 1794년(정조 18년) 신원되었다. 시호는 의정義貞. 그의 문장은 제재와 구상이 독창적이고, 의경이 참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집으로 <어우집>이 있으며, 야담집 <어우야담>은 수필문학의 백미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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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문학자이자 정치가인 이규보는 경기도 여주의 문벌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이며 백운거사(白雲居士), 백운산인(白雲山人), 지헌(止軒) 등 다양한 호를 사용했다. 말년에는 시(詩), 거문고, 술을 몹시 즐겨 스스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칭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수재’로 칭송받았으나 과거 시험에 세 번 낙방하는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네 번째 응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며 능력을 입증했다. 초기에는 하급직을 전전했으나 무신집권자인 최충헌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 올린 것을 계기로 발탁되어 고위직에 올랐다. 이후 중 앙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무신정권의 혼란 속에서도 탁월한 문장력으로 국가의 기틀을 세웠고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왕권 강화와 사회 안정을 위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이끌었다. 이규보의 사상과 문학 세계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기반으로 불교, 도교, 민간 신앙까지 폭넓게 포용하고 경전, 사기(史記), 선교(仙敎), 잡설 등 다방면의 학문을 섭렵하며 깊이 있는 철학을 구축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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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후기 『관독일기』, 『편찬잡고』, 『청비록』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41년(영조 17)에 태어나 1793년(정조 17)에 사망했다. 독학으로 경서와 사서 및 고금의 기문이서에 통달했다. 문장도 뛰어나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북학파 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했고 중국 고증학 대가들의 저서에 심취해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서 청의 문물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오고 고증학 관련 책들도 들여왔다. 서자여서 크게 중용되지 못했으나 규장각 검서관으로서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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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이익 (1681년 10월 18일~1763년 12월 17일, 숙종 7~영조 39)조선의 17, 8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학자이다. 정치·경제·사상사 분야에서 거대한 업적을 이루어 당대부터 지금까지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된다. 탈주자학적인 수사학洙泗學적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을 추구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선의사회를 현실에 맞게 개편하고자 하는 개혁적인 것이었다. 그는 학문의 중심을 전통적인 경학經學에 두었지만, 현실에 보다 긴요한 것은 경세치용의 학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학문 경향과 업적에 따라 성호를 조선 후기 실학의 태두이자 중농학 파의 거성으로 규정한다. 성호의 학문은 이후 윤동규·안정복·신후담·이병휴 등에게 이어졌고, 그의 학통은 권철신·이중환·채제공·정약용·이가환 등에게 이어졌다. 특히 윤동규는 지리, 안정복은 역사, 신후담은 수학, 이병휴는 경학으로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다. 성호는 그의 폭넓은 관심을 다양한 저서로 남겼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과 『곽 우록藿憂錄』·『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성호사설星湖僿說』·『이선생예설유편李先生禮說類編』·『이자수어李子粹語』 그리고 『사서삼경四書三經』·『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의 질서疾書 등이 있다. 또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세상에 떠도는 속담을 모아 정리하고 풀이를 덧붙인 속담집 「백언해百諺解」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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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152년, 고려 왕조 500년 동안 내우외환이 가장 많던 시기에 태어난 관료이자 시인. 처음으로 시평을 써서《파한집》이라는 시평집을 내놓은 사람이다.《파한집》은 이인로의 설화 문학집으로, 저자가 죽기 직전에 지은 작품을 사후 40년이 지난 뒤, 그의 아들인 이세황이 간행한 것이다. 시대적인 불운으로 인해 18세 때 무신 반란인 정중부의 난을 맞고, 이 계기로 이인로는 중이 된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뒤, 정중부 일당이 숙청되자 그는 환속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예부원외랑·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 관직에 재임하던 중 고종 7년(1220), 향년 69세로 개경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저서로 《파한집》3권, 《은대집》20권, 《후집》4권, 《쌍명재집》3권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파한집》3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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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본관은 경주(慶州)다. 초명은 지공(之公)이고 자는 중사(仲思)이며, 호는 익재(益齋)와 역옹을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잘 지었는데,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이어서 과거에 합격했다.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과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1311년(충선왕 3)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었다. 1314년(충숙왕 1)에 충선왕이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그를 불렀다. 이로부터 6년 동안 원나라에서 머물렀는데,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 등의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세 차례에 걸쳐 중국 내륙을 여행했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아미산(峨眉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3개월 동안 다녀왔으며, 1319년에는 절강성(浙江省) 보타사(寶陀寺)로 원나라 황제의 향을 하사하러 간 충선왕을 모셨다. 세 번째는 그가 고려로 돌아온 이후인 1323년의 유람이다. 1320년 충선왕이 참소로 토번으로 유배되자 이제현은 직접 이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으며 이에 충선왕은 좀 더 가까운 유배지인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로 옮겨졌는데, 이때 충선왕을 만나러 다녀왔다. 이제현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1324년 밀직사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39년 재상인 조적(曹)이 난을 일으키자 충혜왕이 진압했지만 잔당의 무고로 충혜왕은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이때 이제현이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몇 년간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은둔하며 ≪역옹패설≫을 저술했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으며, 정치 기강을 바로잡으려 개혁안을 제시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은 뒤 원나라로 가서 왕기(王祺 :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뒤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했다. 이후 계속 사임과 등용을 반복하다가 1357년에 사임을 허락받았으며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청주까지 공민왕을 호종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1367년 81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빼어난 유학 지식과 문학 소양을 바탕으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했고, 만년에는 ≪국사(國史)≫ 편찬에 힘썼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그는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안녕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대체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했기 때문에, 당시 원나라와 고려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대처를 잘해 화를 입거나 유배를 당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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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의종과 명종 시대 문인이자 학자이다. 자는 기지(耆之)이며 호는 서하(西河)이다. 예천 임씨의 시조이기도 하며 고려 건국 공신의 후예로 할아버지 평장사(平章事) 임중간(林仲幹)과 상서(尙書)와 좌의정을 지낸 아버지 임광비(林光庇)와 한림원 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임종비(林宗庇) 등 귀족사회의 명성으로 기반이 닦여 있던 임춘은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하여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무신 정변 시기에 가문 전체가 화를 입어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 져 지급하던 토지)까지 전부 탈취당하여 가문이 몰락한 후 이인로를 비롯한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벗들과 시와 술을 즐기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탄식을 토하면서 자신의 포부를 문학을 통하여 피력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술을 의인화하여 당대의 부패한 정치 현실을 비판한 〈국순전〉, 〈공방전〉의 가전체 소설과 불우한 삶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장편시 〈장검행〉 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이인로가 엮은 유고집 《서하선생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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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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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명종(明宗) 18년(1188)에 태어나서 원종 1년(1260)에 세상을 떠난 학자이자 관료요 시인이다. 최자의 첫 이름은 종유(宗裕) 또는 안(安)이고,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다. 본관은 해주(海州)로서 문헌공(文憲公) 최충(崔?)의 후손이며, 시호(諡號)는 문청(文淸)이다. 최자는 대내적으로는 고려 왕조가 혼미를 거듭하고 무신 정권이 전횡을 부리던 시기,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7차 침입(1231∼1258)이 있었던 격동의 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문인이다. 명문 집안 출신으로 이규보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출세의 길에 접어들었으며, 이런 인연으로 최자의 문학은 이규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특히 최자는 이규보의 ‘창출신의(創出新意)’의 창조적 문학론에 뜻을 같이했던바, ≪보한집≫에서 자주 이규보를 극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이렇듯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있는 최자는 한국 문학사상 이인로와 함께 문학비평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별히 그는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무엇보다 한시 비평에 해당하는 시화류 ≪보한집≫을 남긴 인물로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저명한 대학자인 최충의 후손으로서 관직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에 입전(立傳)이 되기도 했다. 최자의 가문은 최충 이후로 세 명의 장원(壯元)과 세 명의 상국(相國), 네 명의 공신을 배출한 명문 귀족으로, 최자 또한 ≪보한집≫에 증조부 최약(崔?)이 유배를 가면서 남겨 놓은 시 <출수춘주화인증별(出守春州和人贈別)>을 실은 것으로 보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려 시대에 배출된 수많은 문인·학자들의 문집을 두루 섭렵하지 않고서는 ≪보한집≫에 나타나고 있는 그 시대의 사회 상황과 문학적 성격을 바르게 진단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자는 독서량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풍부한 독서량과 깊이 있는 시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최자는 ≪보한집≫을 통해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고, 문인들의 자질이 얼마나 중요하며, 창조의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가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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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지은이)    정보 더보기
허균(許筠, 1569∼1618)은 어떤 사람인가? 흔히 허균은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또는 반역을 기도하다가 처형된 인물로 운위된다. 《홍길동전》에 나타나는 적서 차별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허균의 평소 염원을 반영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의견은 허균과 거리를 두어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적대적 인물의 전언(傳言)에만 등장할 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허균이 반역을 도모했는가 하는 문제 역시 진위가 불분명하다. 조선 시대에 반역죄로 처형된 여타 인물의 경우와 달리, 허균에 대해서는 직접적 물증 없이 주변 인물들의 증언만으로 사형이 결정되었기에 ‘훗날 반드시 이론(異論)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기도 할 정도다. 이처럼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음에도 위의 두 가지 사안은 학교 교육이나 대중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 결과 일반 대중이 허균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허균에 관한 직접 경험이 아니라 허균에 대한 소문을 채록한 야사(野史) 계통의 자료에 의존한 현대의 전언들이 허균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증폭시킨 면이 있다. 하지만 신빙성 있는 1차 자료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허균의 면모는 그런 대중적인 인식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는 조선 시대를 풍미한 사상과 문화, 정치 제도에 순응한 점에 있어서는 동시대의 여느 관료 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허균은 유가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에 대한 학습 및 내재화, 충효라는 덕목에 대한 숭상과 실천을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으로 인정한다. 본서에 수록한 〈엄처사전〉은 물론, 〈학산초담〉을 비롯한 초기작이나 허균의 나이 40대 초반에 쓴 〈학론(學論)〉(1610) 같은 글에서 일관되게 이 입장이 견지되고 있다. 흔히 허균이 당대 관료나 사대부 문인들과 구별되는 개성을 지녔다 해 운위되는 것이 불교 서적이나 도가 사상에 대한 애호라고들 한다. 하지만 도가적 어휘가 대거 등장하는 〈남궁선생전〉을 쓴 이후에도 〈학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정치의 기본 원리로서 성리학의 기본적 사유 방식을 옹호한 점은 특기될 필요가 있다. 또한 허균이 혁명 내지 사회 개혁을 도모한 인물로 거론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호민론〉이다. 〈호민론〉에 피력된 입장은 민(民)의 역량에 대한 호감과 긍정이 아니라, 민의 불만을 조기에 무마해야 기성 지배층의 안정적 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라는 점이 최근 연구들에서 지적되어 왔다. 민에 대한 허균의 입장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으며, 이 점은 본서에 수록한 〈남궁선생전〉의 조회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은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기성의 가치에 상당히 동조하는 가운데 주류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인물이다. 40대 이후에 정계의 고위직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꺼이 그에 응했던 사실은 허균의 본심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연마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상류층이기에 접근할 수 있었던 문화 자원을 적극 활용했다.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는 대부분 그의 사회적 지위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다양한 자원들에 힘입고 있다. 가령 허균의 척독과 같은 초단형(超斷形)의 편지 양식이나, 그의 산문 창작에 있어서 중요한 참조점이 된 《세설신어》 같은 책은 단지 허균이라는 한 개인의 기호에 의해 개발되거나 주목된 책이 아니다. 선조?광해군 연간 조선 문단에서는 명대 문학, 특히 강남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서 애호된 문학 양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허균 역시 이러한 동향에 참여하고 있었다. 《세설신어》 역시 강남 사대부들 사이에서 16세기에 재발견되고 주목된 서적 중 하나다. 한 단락 정도 되는 짧은 분량의 일화나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동원해 묘사하고자 하는 인물의 품성을 간결하게 스케치하는 《세설신어》의 스타일은 위진 남북조 시대에 나온 것이지만, 당시 명대 문학을 선도하고 있던 16세기 강남 문단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6세기 말 명대 문단을 주도했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에 의해 1585년에 《세설신어보》가 출간되고, 이어서 《세설신어》를 모방한 각종 후속 작품이 대거 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대 강남 사대부 문인 그룹 내에서 《세설신어》가 크게 유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제기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당대 강남의 경제적 부흥에 힘입어 문화적 소양이 일천한 신흥 부유층이 부상했고, 이들의 도전에 응전하는 기성 사대부 계층은 자신들이야말로 선천적인 차원에서 우수한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을 정립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지(李贄, 1527∼1602)나 원굉도(袁宏道, 1568∼1610)처럼 문학에 있어 개성 표현의 가치를 중시한 것도, 강남 지역의 그러한 문화적 동향의 한 단면으로, 기성 사대부들의 문화적 권위를 수성하려는 경향의 한 지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시야에 넣고 다시 허균의 저 유명한 발언,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라는 개성 중시의 선언을 되짚어 보면, 일견 독창성을 중시하는 듯한 허균의 지향 역시 보다 넓은 문화적 흐름의 일부일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실로 허균은 《세설신어》를 비롯해 왕세정으로 집약되는 강남 문인 사회의 문예적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허균은 그의 〈사우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세설체 저작의 저자이자 왕세정과 더불어 강남의 문예 담론을 주도했던 인물인 하량준(何良俊, 1506∼1573)의 글에 대해서도 열렬한 호감을 표했다. 특히 명 사신이자 강남 출신 문인인 주지번(朱之蕃, 1558∼1624)과 1606년에 직접 만난 이후로는, 강남의 문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회화, 서예, 미식 등 다채로운 문화적 활동 전반으로 관심의 폭을 확장해 갔다. 작문에 있어서도 기성의 전범이나 관습을 답습하기보다 글쓴이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 역시 주지번과의 만남 이후 뚜렷하게 정식화된다. 요컨대 동시대 조선 관료 문인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허균의 개성도 좀 더 시야를 확대해 보면 일정한 문화적 동향과의 동질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다. 이상에서 짚어 본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허균은 당대 조선 사회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고급문화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자신의 소양을 형성해 나갔으며, 결국 허균의 문학적 성취와 개성 강조의 문학론은 단순한 개인의 독창성의 발로라기보다는, 조선 중기 사대부 문화와 명대 강남 문인 문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결과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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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북학파의 선구자 혹은 과학사상가로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지전설을 주창한 홍대용은 1731년(영조 7) 충청도 천안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에서 태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를 보장받는 가문 출신이지만, 순수한 학문의 길을 선택하여 과거시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12세에 석실서원에 들어가 23년간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원행 아래에서 수학하였으며, 천문학·수학·역산학·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가졌다. 홍대용의 일생에서 가장 전환점이 된 사건은 중국 연행이다. 1765년 홍대용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중국 땅을 밟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불멸의 명저 『의산문답』은 중국 연행을 다녀 온 후 쓴 책이다. 40대에 들어서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고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17개월 동안 세자익위사에서 근무하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계방일기』라는 글을 남겼다. 어머니의 병을 구실로 고향에 돌아와 있던 홍대용은 1783년 10월 23일에 생애를 마감했다. 꼭 52년하고도 7개월 남짓의 길지 않은 일생이었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홍지弘之라 했고, 자는 덕보德保, 당호로는 담헌湛軒을 썼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문집은 『담헌서湛軒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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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724(경종4)~1802(순조2). 본관은 풍산(豐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홍진보(洪鎭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숙인 저촌(樗村) 심육(沈錥)에게 수학(受學{)하였다. 24세(1747, 영조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9세(1752, 영조28)에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하였다.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70세(1793, 정조17)에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차례 대제학을 맡아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59세(1782, 정조6)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71세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문장은 육경(六經)에 근본하고 제자(諸子)를 참작하여 순정하고 웅혼하며 법도가 구비되어 있다는 평을 얻었는데 이는 시속(時俗)에 구애받거나 수식을 일삼는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인심의 발현을 주장한 천기론(天機論)으로 발현된다. 또한 청(淸)나라 기윤(紀昀)으로부터 화평하고 온유하여 기교와 수식이 없고 국계와 민생을 항상 잊지 않아 음풍농월(吟風弄月) 하는 기습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국토와 백성의 현실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민요나 설화 등 민족 문학의 성취를 수용한 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정조 중흥기에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와 문학 양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관인이자 학자이자 문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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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포 김만중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관료이며 뛰어난 문필가였다. 병자호란 중에 유복자로 태어났다. 예학의 대가 김장생의 증손으로, 어머니는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으로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다. 김만중의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두 아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스물아홉 살에 벼슬길에 나아가 출세가도를 달려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인이란 출신 때문에 장희빈 일가를 둘러싼 어사로 선천에서 1년 간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기사환국이 일어나 다시 남해로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학 비평문인 『서포만필』을 비롯하여 소설 작품을 남겼다. 선천 유배생활 중에 상심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썼고, 남해 유배생활 중에 「사씨남정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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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영조 50년(1774)에 태어나 현종 8년(1842)에 숨졌다. 22세(정조 19)에 식년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사옹원 직장에 제수되면서 벼슬길에 나섰다.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면서 42세에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고, 58세에는 사은사의 정사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61세(순조 34)에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다. 63세(현종 2)때는 남응중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삭출되었다가 66세에 대왕대비의 특지로 방석되었다. 그후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 장단의 모사와 양주의 광진으로 은거하였다. 남긴 책으로는 <속사략익전>, <예기집설지의>, <학강산필>, <초계고식>, <대역상전>, <명사관견>, <속명사관견>, <독역잡기>, <휘사소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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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安東, 자는 仲和, 호는 農巖이다. 1682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조 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부친 金壽恒(1629~1689)이 기사환국으로 인해 사사된 이후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여 노론 洛論系의 宗匠이 되었다. 문학적으로는 韓歐正脈을 표방하여 당시 조선 문단의 의고주의적 문풍에 변화시킨 대표 문인이다. 그의 문집으로 『農巖集』이 전하며, 이외에 학습서인 『八大家門十選』 등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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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자는 지원(芝園), 호는 추재(秋齋) 또는 경원(經畹)이다. 1844년 82세의 나이로 소과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삶은 연행, 유람 그리고 시작(詩作)으로 일관되었다. 벼슬을‘멀리 한’ 교유의 폭은 매우 넓었다. 여항시인들과 교유뿐만 아니라 특히 추사 김정희(1786~1856), 운석 조인영 (1782~1850) 등과 친밀한 관계는 그의 명성을 더욱 끌어 올렸다. 한 마디로 추재의 삶은 더 넓은 세계로 여행을 꿈꾼 ‘천재적인’ 예술가의 여정이었다. 저서로 『추재집(秋齋集)』 8권을 남겼다. 여기 다룬「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는 그‘여정’의 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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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공철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정조, 순조 때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시를 잘 썼고, 학문 연구에 열중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고문의 법도를 준수하는 창작론을 표방했다. 《금릉집》, 《귀은당집》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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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엮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 한어역관(漢語譯官)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연직(李延稷)이다.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이상적은 1828년(순조 28) 춘당대(春塘臺)에서 개강할 때에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845년(헌종 11)에는 임금으로부터 전답과 노비를 받았으며 1847년(헌종 13)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이나 품계가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848년(헌종 14)에는 비서성에서 정조·순조·헌종의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만을 모아 편찬한 역사책)을 간행하는 데 참여했다. 그리고 계속해 『통문관지(通文館志)』 『동문휘고(同文彙考)』 『동문고략(同文考略)』 등을 간행하는 데에 참여했다. 1862년(철종 13) 1월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영구히 지중추부사직을 받았으며, 다음 해 7월 충청남도 온양(溫陽)의 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열두 번이나 중국을 여행했다. 당대의 저명한 중국문인과 친구관계를 맺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게 되어 1847년(헌종 13)에는 중국에서 시문집을 간행했다. 그가 교유한 중국학자들의 면모에 대해서는 그들로부터 받은 편지글을 모아 귀국 후에 펴낸 『해린척소(海隣尺素)』에 잘 나타나 있다. 또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의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아온 일은 유명하다. 이상적은 시 이외에도 골동품이나 서화와 금석(金石)에도 조예가 깊었다. 중국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조선의 금석문을 모아 편찬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부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상적의 저서로는 『은송당집』 24권이 있으며, 이 밖의 작품들은 청나라의 학자들로부터 받은 편지글을 모아 엮은 『해린척소』에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 작품은 다양한 반면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의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역관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 쓰인 시어가 섬세하고 화려하며 때로는 맑고 우아하다는 평을 얻었다. 「거중기몽(車中記夢)」이라는 작품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헌종이 그의 시를 읊어 ‘은송(恩誦)’이란 별호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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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 (지은이)    정보 더보기
1653(효종4)~1722(경종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낙송자(洛誦子)․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6남 중 3남으로 태어났으며 위로 영의정을 지낸 노론(老論)의 영수 김창집(金昌集), 학문과 문학으로 이름을 떨친 김창협(金昌協)을 형으로 두었다. 아우 김창업(金昌業)․김창즙(金昌緝)․김창립(金昌立) 등도 모두 당대에 명성이 있었다. 이단상(李端相), 조성기(趙聖期) 등에게 수학하였으며, 21세(1673, 현종1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숙종대의 환국정치(換局政治)로 부친이 유배와 사사를 당하자 출사에 완전히 뜻을 접고 양주의 벽계(檗溪)와 설악산 등지를 오가며 은거의 삶을 살았다. 형 김창협과 더불어 학문과 시문으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고 당대 학자와 문인들은 물론 후대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기호 학단(畿湖學團)에 깊은 궤적을 남겼다. 노론의 명문가로 소론(少論) 및 중인(中人)들과도 활발히 교류하였으며 불가의 승려들과도 교유하였다. 문학적으로는 《시경(詩經)》과 한위악부(漢魏樂府), 《문선(文選)》과 《장자(莊子)》 및 불전(佛典)과 소품문(小品文)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두루 궁구하여, 형식과 격례(格例)에 얽매이는 구태의연한 문학적 관습을 배격하고 실상을 문학 속에 참되게 담아내었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실험과 성과는 후대 조선 문단의 다양성에 풍부한 토양이 되었다. 학문적으로는 낙학(洛學)의 종주인 형 김창협의 학문적 특성과 대체적인 궤를 같이하되 세밀하고 구체적인 각론에 있어서는 면밀한 검토와 주장, 그리고 다양한 학자들과의 토론을 전개하며 자신만의 학문관을 구축하면서 역시 낙학의 종주로 자리매김하였다. 벼슬에 나아가 실제 정치 무대에서 활동한 적은 없으나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재야에서 학문과 문학 양방면 모두 뚜렷하고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당대의 거두가 된 문인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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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천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경덕의 제자였던 아버지 차식과 아우 차운로와 함께 ‘삼소’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외교 문서를 맡아 쓰는 제술관으로 활동했으며, 시가 뛰어나 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글가사 ‘강촌별곡’을 썼으며 《오산집》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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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택 (지은이)    정보 더보기
김만중의 종손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론의 중심 가문이라 언제나 정쟁의 한가운데 있었고 여러 차례 유배되었다. 시재가 뛰어나고 문장이 훌륭하다는 평을 들었다. 문집 《북헌집》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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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엮은이)    정보 더보기
고등학교에서 35년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다 스스로 물러났다. 머룻빛 눈동자가 빛나는 아이들과 지내며 오히려 더 많이 배웠고, 무엇이든 간절함이 덧쌓이면 길이 열린다고 믿게 되었다. 작은 배낭에 카메라를 하나 메고 바다 건너 낯선 곳에서 여행자로 살겠다며 여전히 벼르고 있다. 뜻있는 선생님들과 함께 2007, 2009, 2015 교육과정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를 만들었으며,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중1수필》,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고전》 등을 함께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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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시는 무엇인가.
시는 찬물이 솟는 샘
돌에 부딪히면 흐느껴 울부짖고
못에 고이면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더라.
보기엔 심상한 품격이나
묘한 이치는 말하기 어려워라.
‘시는 찬물이 솟는 샘’_ 김시습


또 명화로 알려진 옛 그림 한 폭이 있었는데 늙은 할아버지가 손주를 안고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는 장면이었다. 필치가 생동하여 살아 있는 듯하였다.
성종이 이 그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 그림이 좋기는 하지만 무릇 사람들이 어린애를 밥 먹일 때는 자기 입도 저절로 벌어지는 법인데, 이 그림은 입을 다물고 있으니 격에 맞지 않는다.”
이래서 이 그림도 버려지고 말았다.
대체 그림과 문장이 무엇이 다르랴. 조금이라도 진실에서 어긋나면 제아무리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더라도 문장을 아는 사람은 취하지 않는다. 안목이 있는 사람은 이것을 안다.
‘그림과 문장이 같은 점’_ 유몽인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제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우고 있는데 비록 그것이 아무리 비슷하더라도 앵무새가 사람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마을의 나무꾼 아이와 물 긷는 아낙네들이 흥얼거려 서로 화답하는 소리가 비록 비속하다고 하나, 만일 참과 거짓을 따진다면 사대부들의 시부 따위와는 결코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무꾼 아이와 물 긷는 아낙네의 말’_ 김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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