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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36803872
· 쪽수 : 440쪽
책 소개
목차
논쟁1. 한성 천도 논쟁
한성 천도 논쟁 일지
주요 인물
들어가는 글 - 서울 이전 서울의 역사
천도의 첫 번째 발안자, 태조 이성계
첫 번째 수도 예정지, 계룡산
천도의 또 다른 걸림돌, 중국과의 외교 분쟁
새로운 도읍 예정지 무악, 그리고 풍수지리의 대두
무악 도읍 토론회
정종, 개경으로의 환도
태종, 두 번째 천도 논쟁
훌륭한 핑곗거리, 한양 천도
막판 뒤집기, 아버지의 부탁
한성인가, 무악인가? 2차 토론회
도읍의 운명을 정한 동전 던지기
맺음말 - 태조와 태종, 신하를 휘두르다
논쟁2. 공법 실시 논쟁
공법 실시 논쟁 일지
주요 인물
들어가는 글 - 토론왕, 세종
1차 공법 시행 논의
조선 최대 규모의 관리, 백성 합동 여론조사
9년 후, 2차 공법 시행 논쟁
사람이 할 일을 다했거늘, 하늘이 따라주지 않다
난장판 토론, 그리고 날치기 통과
계속되는 시행, 계속되는 반대
마침내 시행!
세종,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다
또다시 시작된 공법 토론
나물을 먹는 백성들, 청안현의 토지 구획 실험
맺음말 - 조선 최대의 마라톤 토론
논쟁3. 1차 예송 논쟁
1차 예송 논쟁 일지
주요 인물
들어가는 글 - 사대주의의 폐해, 예송 논쟁
예송 논쟁의 원인
효종의 승하
허목 VS 송준길, 첫 번째 논쟁의 막이 오르다
실록을 참고하다
송시열, 반격에 나서다
윤선도, 불꽃에 기름을 퍼붓다
학술적인 토론에서 패싸움으로
비난하는 자와 옹호하는 자
서인 원두표, 3년복을 옹호하고 나서다
1차 예송 논쟁의 정리
맺음말 - 예송 논쟁, 또 하나의 마무리
논쟁4. 2차 예송 논쟁
2차 예송 논쟁 일지
주요 인물
들어가는 글 - 예송의 후폭풍
1차 예송에서 2차 예송으로
2차 예송 논쟁의 시작
현종, 서인에게 칼을 빼들다
왕과 신하, 맞장을 뜨다
2차 예송 논쟁, 둘째 날
현종 VS 김수흥, 한판 붙다
2차 예송 논쟁의 종말
그 후의 이야기
맺음말 - 이기심과 아집의 대결
논쟁5. 문체반정 논쟁
문체반정 논쟁 일지
주요 인물
들어가는 글 - 문체반정의 시작
타락한 문체
소설체의 등장
정조, 신하들과 과거의 폐단을 논하다
본보기 희생자, 이옥
잘못된 문체는 나라의 탓이다, 고로 반성문을 써라
박지원의 반성문
끝맺음 - 문체반정의 끝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거리낄 것 없이 각기 자기 말을 다하도록 하라. 이 땅과 한양, 어디가 좋은가?”
이때부터 서운관 관리들은 돌아가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이야기했다. [......]
“태상왕 때 이 땅을 얻지 못하여 한양에 도읍을 세웠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했던 유한우의 말도 앞서 윤신달의 말과 비슷했다.
유한우 : “한양의 앞뒤로 돌산이 험하지만 물이 없으니 도읍할 수가 없습니다. 지리서에 말하기를, ‘물의 흐름이 길지 않으면, 사람이 끊긴다’ 했으니,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땅도 또한 길지의 기준과 맞지 않습니다.”
민중리 : “도읍을 정하려면 사방 천리 안의 모두를 찾아봐야 합니다. 만약 삼각산에 올라가 사방을 뒤져 좋은 곳을 찾으면 운 좋게 찾을 수 있을지도요. 무악은 외산이 두르고 있지 않아 길지로 딱 맞아떨어지진 않습니다.”
이양 : “이 땅은 한양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양달 : “비록 한양 명당에 물이 없다고 하지만, 광통교 이상에서는 물이 있으니 웬만큼 도읍할 만합니다. 이 땅은 길지의 조건에 합치하지 못합니다. 도읍하려 한다면 여기는 명당이 아니고, 아래쪽에 명당이 있습니다.”
이렇게 풍수가들이 뒤죽박죽 의견을 피력하자, 태종은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어찌 신도에 이미 지어진 궁실을 싫어하고, 이 풀이 우거진 땅을 좋아해서 다시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겠는가? 다만 돌산이 험준하고, 명당에 물이 끊어져 도읍하기에 불가한 까닭이다. 내가 지리서를 보니 ‘먼저 물을 보고 다음에 산을 보라’ 하였다. 만약 지리서를 쓰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쓴다면 명당은 물이 없는 곳이니, 도읍하는 것이 불가한 것은 명확하다. 너희들이 모두 지리를 아는데, 처음에 태상왕을 따라 도읍을 세울 때 어찌 이러한 까닭을 말하지 아니하였는가?”(한성인가, 무악인가? 2차 토론회 -<논쟁 1. 한성 천도 논쟁> 중에서)
“아침에 입시한 승지가 성상의 분부를 전하기를 ‘의논한 자가 백 명 천 명이라 하더라도 조정에서 정할 바는 오직 아무개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고 분부하였다’ 하였습니다.”
“기해년에 이미 장자나 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시왕의 제도만 사용하였으니 그 뒤에 쟁론한 것은 쓸데없는 말이므로 나라에서 알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감히 대공복으로 논하면서 그때 당시 옛날의 예에 따라 정하였던 것처럼 하고 있으니 매우 불순하다. 기해년에 정한 예의 근본은 말하지 않고 말단만 들어 논하고 있으니 이 해로움이 적지 않다.”
김수흥이 비록 상대방의 대화에 못 맞추는 점이 있을지언정, 언제나 원칙에 입각한 정론을 펼쳤고, 그래서 발언에 무게가 있었다. 그에 비해 현종은 원칙이 그렇더라도 꽁수를 부리자는 입장이었다. 김수흥의 정확하고도 묵직한 반론에, 차츰 현종은 제대로 답변하기보다는 다른 문제로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반드시 대공복의 의논을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의도가 매우 좋지 않다.”
“이는 다른 게 아니라 국가의 전례에 명확한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실록에는 왕과 신하의 기나긴 말의 공방전이 펼쳐졌다. 왜 기해년에는 없었던 적자와 서자의 구분을 이번에는 했느냐는 현종의 힐난에 김수흥은 인륜의 순서(태어난 차례)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둘째아들로 태어난 효종은 죽었다 깨어나도 첫째아들이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현종 VS 김수흥, 한 판 붙다 -<논쟁 4. 2차 예송 논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