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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7484391
· 쪽수 : 212쪽
· 출판일 : 2012-03-09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춤추는 큐렛
롤, 롤, 롤리팝
칠드런 크로싱
화분1
롤리팝 우먼
고등어와 콘돔
헬로 베이비
타인의 얼굴
이명
화분2
꼭꼭 숨어라
주름
화분3
춤추는 롤리팝
에필로그
작가의 말
작품 해설
춤추는 가족, 그리고 그 이후_ 정영훈(문학평론가·경상대 국문과 교수)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 내가 왜 양복을 싫어하는지 알아요?
어느새 옷을 챙겨 입은 해정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다. 물기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이다. 일직선으로 내리뻗은 머리카락도 구겨진 자국 하나 없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땀 식은 몸에 한기가 돌아 박기영은 몸을 움츠린다.
- 나는요, 양복 말고 다른 거 입은 아빤 본 적이 없어요. 아, 딱 한 번 있긴 한데 그건 싫은 기억이니까 패스. 내 기억 속엔 양복 입은 아빠뿐이에요. 아저씨 만난 날도, 양복 입은 사람은 전부 아빠로 보일 거 같아서 싫었어요.
- 뭐가 그렇게 싫은데?
- 아저씬 찜질방 좋아해요? 우리 아빤 항상 찜질방에 가요.
- 찜질방? 그게 어때서.
- 찜질방에 가서는 자꾸 지구대 사람들한테 잡혀 오거든요. 성추행 상습범으로.
조건부 임시 동거인. 해정은 자신의 가족을 그렇게 정의한다. 이전 조건이 어땠는지 몰라도 최근 조건은 기간제, 앞으로 약 2년이다. 때에 따라서 3년, 4년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해정에게 달렸다.
- 큰애가 대학만 가면 끝이야.
엄마는 틈만 나면 그렇게 말했다. 대개 통화 중이었고, 그 상대는 가파르게 숨을 내쉬는 젊은 화가일 때가 많았다. 화랑에서 남자의 붓에 기금을 투자한다면 엄마는 남자의 몸에 이것저것을 투자했다. 조심성 없는 통화 덕분에 해정은 그가 한 달 전 엄마와 함께 성형외과에 가 식스 팩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
이혼한 부모라는 건 이제 별 얘깃거리도 안 된다. 새 학기마다 제출하는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부모 관계란에 이혼과 재혼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다. 지금 당장 부모가 이혼한다 해도 해정의 수험 준비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 편이 부담 없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됐든 해정은 단번에 대학에 붙을 작정이다. 그래야만 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꽃다운 20대를 만끽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대입에 실패해 이 우스꽝스러운 관계가 1년 더 연장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해정은 엄마와 아빠가 하루라도 빨리 헤어질 수 있도록 공부를 계속한다. 하고 또 한다.
엄마는 늘 여행 중이다. 남들 듣기 좋은 말로 여행이지 사실 파업에 가깝다. 흡족할 만한 퇴직금이 나올 때까지 무기한 파업. 버려진 직장에 관리인 격으로 해정과 해수가 남은 셈이다. 아빠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돈을 벌어다 주니 파업은 아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백지다. 파업과 유기. 어느 쪽이든 해정에겐 다 똑같다.
언제 헤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부부. 아니, 헤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부부. 호적이라는 임시 고용계약서에 묶여 있을 뿐 실제로는 헤어질 필요조차 없는 부부.
해정은 엄마의 화장대 의자에서 일어선다. 방 안을 떠돌던 화장품 냄새는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이 집에는 더 이상 엄마의 꼿꼿한 등도 아빠의 고급 양복도 남아 있지 않다. 익숙하지만 결코 친근해지지 않는 적막. 해정은 서둘러 거실로 나간다.
거실에서는 언제나처럼 해수가 만화영화를 보고 있다. 해수가 반년째 등교 거부를 하고 있다는 건 아주 사소한 문제다. 중요한 건 해수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집에 체온을 가진 이는 해정과 해수, 둘 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