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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42391417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25-10-20
책 소개
목차
책 머리에: ‘130년 국민국가 역사’를 제창하며 _4
감사의 말씀 _13
감고사感告辭 _16
제1부 근대 왜곡의 뿌리
01 조선총독부, 《고종실록》 《순종실록》 편찬에 1만여 종 자력 근대화 관련 ‘공문서’ 자료 외면했다 _22
02 130년 전 수립한 메이지 천황제 국수주의, 한·일 파트너십에 아직도 걸림돌 _31
03 조선은 ‘평화공존’, 일본은 ‘주변국 선점’, 국시가 달랐다 _39
제2부 근대의 여명
04 궁궐을 나온 탕평 군주들, 백성을 직접 만나 의견 물었다 _48
05 탕평정치가 잉태한 《심청전》 《춘향전》, 새로운 역사 신호였다 _57
06 정조가 꿈꾼 만민평등의 ‘공화’ 세계 _65
제3부 고종 즉위, 세도정치부터 없앴다
07 ‘경화사족’의 북학파 정치 바람, 혁신을 꾀하다 _74
08 ‘여걸’ 조대비의 개혁 정책, 흥선대원군의 치적으로 둔갑되다 _82
09 대원군, 조대비가 복원한 왕정 체제 무시하다 7년 만에 실각 _90
10 건청궁에 실은 청년 군주 고종의 푸른 꿈 _98
제4부 개국•개항에 드리운 암운과 서광
11 1875년 강화도에 나타난 ‘운요호’, 일본 국기 달지 않았다 _108
12 “조선이 미국과 친해져선 안 돼!” 청·일의 조선 개국 정책 방해 _117
13 고종, ‘세계 초유로’ 영어 시험 직접 주관한 임금이었다 _125
14 “사대당은 수구, 독립당은 개화” 일제가 정치 공작으로 구분한 프레임 _134
제5부 청일전쟁과 왕비 시해 사건
15 1894년 일본군, 청과 싸우기도 전에 경복궁 담부터 넘었다 _ 144
16 ‘갑오개혁’의 탈을 쓴 일제 군사 침략의 광란 _153
17 일본군 민완 장교 8명, 민간인으로 변복하고 왕비 시해 지휘 _161
18 왕비 사진을 궁녀로 둔갑시킨 사연 _169
제6부 ‘국민’ 창출과 대한제국 수립
19 동학군, “악한 신하 타도가 목적” 왕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_178
20 국민 독본으로 창간한 《독립신문》, 서재필 창간이 아니었다 _187
21 경운궁(현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방사상 도로 설계, 당시 도쿄에서도 못 한 일 _194
22 명성황후 국장, 황후 추존으로 한을 달래다 _205
23 농지정리사업으로 상승한 국민소득, 대한제국을 밝게 비췄다 _ 213
제7부 침략자에 대한 규탄과 시위
24 “슬프다, 섬 오랑캐가 팔도를 삼켰다” 고종은 글로 울었다 _ 224
25 ‘지식인’ 안중근, 한·중·일 넘어 세계평화의 길 제시했다 _ 233
26 천도교의 근왕 국민사상, 3·1 독립만세운동 이끌다 _241
27 순종 황제, 과연 통감 이토의 꼭두각시였나? _250
제8부 ‘근대’가 있는 현대사를 향하여
27 세계 경제 10위·민주화·산업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_ 274
28 식민지 근대화론, 대한제국 자력 근대화 성과 부정 _283
29 식민 지배 책임 얽힌 배상 문제, 일본이 ‘양보’하는 것이 순리 _290
부록
《교육조칙》 전문 _300
참고문헌 _305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군주 고종이 1894년 후반기 동학농민군들이 벌인 처절한 항일 투쟁에 대한 무한한 신뢰 속에 서민 대중이야말로 ‘보국안민’의 주체 곧 국민이 될 자격이 있다는 판단으로 이 조칙을 내린 것으로 해석했다. 바로 앞서 모든 공문서를 한문이 아니라 ‘국한문 혼용체’로 한다고 선언한 것도 국민으로서 서민 대중을 위한 새로운 문자 세계 창출이었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도 서재필 개인이 간행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민창출이란 정부방침 즉 서민 대중이 국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새로운 지식 배양을 위한 매 채로 복수의 정부 관계자가 군주의 방침에 따라 이루어진 사실도 새롭게 밝혔다. 서재필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군주 고종은 국민 창출에 필요한 이런 기본 조건을 갖추면서 1897년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 출범과 동시에 토지(농경지) 측량과 토지 소유권 증서발급 사업을 일으켜 농민의 경제기반 안정과 국가 세수稅收를 근대적인 구조로 바꾸는 사업을 벌인 것도 국민 창출의 경제적 기반 확보로 해석하였다. ‘광무 양전光武量田’ 사업에 대한 한걸음 더 나간 해석이다.
-‘책 머리에’ 중
한국사는 일제 치하의 치명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국학 붐’ 이후 빠르게 성장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이 신빙성이 높은 사료로서 연구자들에게 영인본으로 일찍 제공된 것이 빠른 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실록》은 한 왕의 시대가 끝나면 그 재위 기간에 생산된 각급 기관의 기록을 모아 취사선택하여 편년체로 정리하여 후 대에 그 왕의 정사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한 편찬물이다. 편찬이 완료되면 네 닷 벌을 활자로 인쇄하여 사고史庫에 비치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은 편찬 뒤 어떤 후손 왕도 볼 수 없는 원칙을 세워 편찬의 객관성을 보장하였다. 중국 역대 왕조의 《실록》은 편찬 후 공개가 허용되어 기록의 객관성이 훨씬 떨어지고 분량도 우리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조선왕조는 왕이 바뀔 때마다 근대성을 지닌 ‘사료 편찬’ 사업을 해온 세계 역사에서 유일한 나라였다.
임진왜란 때 뒷정리가 되지 않아 300년 뒤 청일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 전쟁에 대한 조 선·명 두 나라의 응징이 없었던 것이 재침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그는 1905년 〈보호조약〉을 강제하고 돌아가다가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자마자 조선 침략의 절대성을 가르쳐준 스승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묘소에 측근을 보내 보고를 올렸다.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1852~1919], 그는 1910년 8월 29일 ‘한국 병합’ 공포 뒤, 통감 관저에서 부하들과 축배를 올리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여, 당신이 못 이룬 것을 우리가 이뤘습니다”고 외쳤다. 응징과 심판이 없는 역 사의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