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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정치인
· ISBN : 9788947528191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11-10-10
책 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
프롤로그 | 차기 중국 지도자로 부상한 다크호스
1 혁명투사의 아들
2 민중 속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찾다
3 지방에서 정치의 첫발을 내딛다
4 권력투쟁과 경쟁의 서막
5 시진핑의 사랑 그리고 가족
6 파워게임의 주도권을 잡다
7 역전을 노리는 라이벌, 리커창
8 최후의 권력투쟁
9 시진핑이 풀어야 할 과제
에필로그 | 시진핑 시대를 열다
특별기고 | 시진핑 시대의 한 · 중 관계 변화
리뷰
책속에서
p. 22 후진타오의 후계자가 된 결정적 순간
후진타오는 당초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에 리커창과 견줄 수 있는 공청단의 에이스인 리위안차오 를 추천했다. 리위안차오는 1950년에 출생해 유년 시절부터 상하이에서 성장했으며 상하이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수학 교사 등을 하며 상하이의 명문대학인 푸단대학에 입학해 공청단 간부로 활약하는 등 상하이와 인연이 깊은 ‘상하이의 아들’이었다. 이후 공청단 중앙으로 자리를 옮겨 후진타오와 활동을 함께했으며 재직하면서 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장쩌민은 리위안차오에 대해 “나이가 어리고, 장쑤성 일인자의 경험만으로는 상하이시를 맡길 수 없다”라는 등의 반박을 하며 후진타오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후진타오는 류엔둥 당중앙 통일선전부장을 추천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류엔둥의 아버지 류루이룽과 장쩌민의 인연이다.
1920년대 말에 장쩌민의 아버지 장상칭이 공청단 외곽단체인 혁명청년사에 가입했을 때 이를 적극 지원한 사람이 류루이룽이었다.
류엔둥은 태자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진타오와 같은 칭화대학 출신의 공청단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장쩌민은 “류엔둥은 지방에서의 경험도 없고 경제를 알지 못한다”는 한마디로 류엔둥 또한 상하이 일인자 부임은 물거품이 되었다.
후진타오는 ‘비장의 카드’로 리커창을 추천했다. 리커창은 제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선출되도록 암묵적으로 승인이 되었다. 리커창은 제 5세대를 담당할 젊은 리더로 상하이 일인자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리커창은 후진타오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기 때문에 장쩌민은 리커창이 허난성과 라오닝성 부임시절 수많은 재해와 사고가 일어나 ‘대재앙의 스타’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후진타오의 제안에 대항하기 위해 장쩌민 등이 추천한 인물이 바로 시진핑이다. 시진핑은 지방근무와 재해가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대책을 마련해 수습했고, 푸졘성에서 신중국 역사상 최대의 뇌물사건이 일어났으나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청렴결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시진핑과 리커창은 각각 상무위윈회에서 6위와 7위가 되었다.
p. 92 지방경험은 막강한 정치적 자산
시진핑은 장래가 촉망되는 비서직을 스스로 버리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또 다른 이유는 시중쉰이 고위급 간부에게 아들의 장래에 대해 자문을 구한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그 간부는 “지방에서의 경험을 축적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선다면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그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시중쉰이 조언을 구할 정도의 고위급 간부는 최고지도자 덩샤오핑 외에는 없다. 그 증거로 덩샤오핑은 젊은 지도자 후보군을 선발할 때 후진타오를 필두로 지방에서 고생한 간부들을 대거 중앙으로 끌어 올렸다.
시진핑과 마찬가지로 지방 관료를 지낸 후 중앙으로 발탁된 간부들로는 상하이로 내려갔던 쩡칭훙, 국가주석을 지낸 류샤오치의 장남인 류위안,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 등이 있다.
시진핑은 지방에서의 오랜 경험에 대해 한마디로 이렇게 평가한다.
“만일 내가 그 시절에 남아 있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간부들 중에서 시진핑처럼 지방에서 오랜 동안 실제적인 경험을 쌓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중앙의 정보를 입수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것은 태자당의 긴밀한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으며 시진핑의 막강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P.121 다섯가지의 덫
시진핑이 저장상의 일인자가 된 지 2년도 되지 않아 사영기업 수는 30만 개에 이르렀다. 중국 전체 사영기업의 매출액 베스트 500에 저장정 기업 188개가 진입했다. 저장성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0퍼센트에 달해 다른 성에 비해 발군의 수치를 과시했다.
5년도 되지 않아, 시진핑은 당위원회 서기 천량위가 부패사건으로 경질되면서 상하이시 일인자로 승격되었다. 상하이는 베이징 다음의 대도시로 경제적으로는 첫째가는 곳이다. 그리고 장쩌민이 이끄는 상하이방의 본거지이다. 이 인사는 장쩌민이 시진핑을 지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사람은 자기편은 거의 없고 주변에 모두 적들만 있을 뿐이다. 시진핑은 사면초가였고,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더구난 상하이 사람들은 중국에서도 가장 음모를 즐기는 특수 부류였기 때문에 시진핑에게는 다섯 가지나 되는 ‘덫’이 놓여 있었다.
P.225 북 · 중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시진핑은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식에서 “위대한 항미원조는 침략에 대항한 정의로운 전쟁이다”라고 발언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정당화시켰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이라는 것이 정설인데, 시진핑이 그것을 알지 못할 리 없다. 한국전쟁에 관한 중국의 공식 견해는 ‘조국과 사회주의 진영을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정의된다. 중국 지도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행한 발언은 중국 정부 및 공산당의 공식 견해이며 개인의 생각을 발언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진핑이 착각을 해서 틀렸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의 공식 견해를 반복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중국이 지속적으로 북한을 두둔하는 이유는 북한을 외교적인 카드로 사용하면 일본과 미국, 한국 등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사를 참작하지 않으면 북한을 설득하지 않는다. 이 상태로 가면 북한은 폭발해 버린다. 그래도 좋은가?” 라며 위협할 수 있다. 대단히 편리한 카드인 것이다.
북한은 사실 다루기가 만만치 않다. 어쩌면 김정일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북한이 붕괴되면 중국 국내로 난민이 넘쳐날지도 모른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중국의 국경선까지 미국의 영향력이 확장된다. 중국은 이를 우려한다. 때문에 중국을 화나게 만들어도 괜찮다.”
그 어느 쪽이든 중국과 북한은 주고받는 관계이며 나아가 남중국해 문제로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중국 정부가 북한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을 저지하고자 한다. 베이징 정권이 최근 김정일 정권과 긴밀한 관계임을 과시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북한의 후계 문제의 해결은 김정일 사후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 무렵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시진핑이다. 김정일 사후 북한의 후계문제에 대해 그리고 한반도 문제에 대해 시진핑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