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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아일랜드소설
· ISBN : 9788950969462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17-03-31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절절한 믿음과 사랑을 담아 탑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아버지의 잘못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니다. 하물며 나는 아이가 부모에게 실망하기 시작하는 성인기로 막 접어들 때까지만 아버지를 알았다. 그러니 아버지에게 가슴이 뛰는 건 죄가 아니다. 작은 창밖으로 팔을 내밀어 아일랜드의 공기 속에서 가방을 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뛰는 건 범죄가 아니다. 아버지는 내게 무어라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뒤로 물러섰니?”
“네, 뒤로 물러섰어요, 아빠.”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소리가 올라가 닿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고, 아버지의 귀까지 들어가기에는 창문이 너무 작았다.
“그럼 가방을 놓으마. 잘 지켜봐라. 잘 지켜봐!” 아버지가 소리쳤다.
“네, 아빠, 보고 있어요!”
아버지는 한쪽 손으로 가방 끝을 최대한 늘어뜨려 잡은 다음 가방을 흔들어 내용물을 떨어뜨렸다. 아버지가 가방 안에 그 물건들을 넣는 것은 나도 보았다. 어머니의 비명을 뒤로한 채 침대의 덧베개에서 뜯어낸 깃털 한 줌과 작은 벽이나 비석을 수리하기 위해 갖고 있던 석공용 망치 두 자루였다.
나는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이상한 음악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커다란 너도밤나무들 속 갈까마귀의 울음소리와 당까마귀의 긁는 듯한 울음소리가 섞여 머릿속에서 음악처럼 울렸다. 목이 아파왔다. 그때 갑자기 그 우아한 실험 결과가 보였다. 내 인생 철학의 근거가 될 거라던 결과가.
바람 한 점 없었지만 깃털들은 작은 폭발을 일으킨 것처럼 산산이 흩어져 날아갔다. 회색 구름이 있는 곳까지 어스레하게 솟아올라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깃털들은 천천히 천천히 표류하듯 날아갔다.
잔뜩 흥분한 아버지가 소리치고 있었다. “어땠니? 뭘 봤어?”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았을까? 가끔 사람의 어리석음은 절망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를 향한 사랑에 내가 찔리는 절망. 에네아스 맥널티?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를 것이다?도 그랬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사랑 때문이다. 나는 거기에 서서 뒷목이 삐걱거릴 때까지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단지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깃털들은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날아갔고, 아버지는 소리쳐 묻고 또 물었다. 내 가슴은 아버지를 향해 뛰고 있었고, 위에서는 아직 망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문 안에서 당신 얼굴을 본 거 같았는데. 파인 씨가 모자를 들어 올렸어. 당신 얼굴에 대고 말이야.”
어머니는 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를 까부르는 일을 반밖에 하지 않았지만 마저 끝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머니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올라온 끔찍한 습기가 어머니를 잠식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상하고도 고통스러운 울음이었다. 나는 충격으로 온몸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모르겠어.” 아버지가 비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다른 집을 잘못 본 건지도 몰라.”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요.” 어머니의 말투는 아주 달라져 있었다. “잘 알고 있잖아요.” 어머니가 말했다. “아아, 난 이렇게 끔찍하게 추운 나라로 날 데려와도 좋다고 한 적 없어요. 이렇게 더러운 비가 내리고 더러운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데려와도 좋다고 허락한 적 없다고요.”
아버지는 삶은 감자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지난 1년 동안 한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들은 어머니의 생각을 적은 편지고, 신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말이었을 것이다. 변절자 소년들보다, 불에 탄 소녀들보다도 더.
“시시.”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시시.”
“인도 장사치도 부끄러워할 싸구려 스카프를.” 어머니가 말했다.
“뭐?”
“날 비난할 순 없을걸요!” 소리치듯 어머니가 말했다. “당신은 날 비난할 수 없어요! 나한텐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머니가 어쩌다 삽으로 자기 다리를 쳤기 때문이었다.
“시시!” 아버지가 소리쳤다.
어머니의 다리에 조그맣게 상처가 벌어져 검붉은 보석 같은 피가 맺혀 반짝이고 있었다.
“오, 하느님. 하느님 맙소사.” 어머니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