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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한국 문화/역사기행
· ISBN : 9788950975753
· 쪽수 : 292쪽
· 출판일 : 2018-06-26
책 소개
목차
발간사 김구의 숨결, 얼과 혼을 찾아가는 먼 길
서문 당신은 그곳에 가 보았는가?
보은 장안 대도소 최시형을 만나다
탈옥 후 삼남 지방 피신길 발길 닿는 대로, 인연이 이끄는 대로
공주 마곡사 출세간의 길을 가다
공주 공산성과 청양 모덕사 광복된 조국을 기리며
예산 윤봉길 의사 고택 윤봉길 의사 나고 자라난 고향
춘천 가정리 유인석 묘소 존경과 그리움의 여정
무주의 서벽과 김천의 벽서 푸르른 심산유곡에서의 비밀 회동
김천 달이실 마을 거북이, 연꽃 아래 잠행하다
남도 순방과 부산 전재민수용소 새로운 정치적 도약을 위하여
김해 김수로왕릉 난생처음 사모각대를 갖추고
진해 해안경비대 열병식을 참관하고 1호 경비함을 타다
진해 충무공 시비 바다에 맹세하고 산에 다짐하노니
진주 촉석루 촉석루 편액의 위치가 바뀐 사연
통영 한산섬 제승당 편액을 다시 걸고
순천 송광사 사진으로 찾은 김구의 발자취
보성 김광언 가옥 쇠실마을에서 추억에 잠기고
함평 이동범 가옥 토굴과 다락방에서 몸을 숨기던 곳
광주 대성국민학교와 광주여자중학교 환영회와 강연회
광주극장, 전남방직공장, 관음사 광주 시내의 자취를 찾아서
광주 백화마을 전재민을 위한 보금자리
무등산 오방정 노구를 이끌고 무등산에 오르다
군산공설운동장 공설운동장을 울리던 사자후
김제 원평과 익산 김홍량 가옥 오래전 발길이 닿았던 곳으로
전주 김형진 가옥과 전주향교 호남제일성으로
연보
참고 문헌
색인
저자소개
책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장소’에 주목한 것은 역사가에게는 현장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현장은 영감을 준다. 탐방객들 사이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하지만, 그보다는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고 느끼기에, 우리는 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발자취도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 역사가든 탐방객이든, 아니면 어느 위인을 추종하는 사람이든 그들의 일차적 동기는 주제에 대한 애정이다. 그 애정의 근원은 “나도 거기에 가 보았어”라는 일체감일 것이다.
-「서문」 에서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정부의 탄압을 피해 태백산 등 여러 곳에서 피신 생활을 했는데, 이곳 국사봉 서남쪽 끝자락에 있던 가섭암에서도 숨어 지냈다고 한다. 1898년 6월 최시형이 체포되어 사형당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늦가을, 최시형으로부터 접주 임명을 받은 김구가 피신 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마곡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루 종일 걸어서 마곡사 남쪽 산꼭대기에 오르니, 해는 황혼인데 온 산에 단풍잎은 누릇누릇 불긋불긋하였다. 가을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 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백범일지』 151쪽)
김구는 마곡사에 도착했을 때의 풍경과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위 글은 마치 어느 수필집의 한 구절같이 유려하다. 비록 소설가 춘원의 손을 거쳐 나온 문장이라지만, 김구의 심사가 잘 나타난다. 필자가 김구의 자취를 찾고자 마곡사에 간 것이 11월 어느 날 오후 4시경이었다. 120년 전 김구가 왔던 시각도 비슷한 때였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남아 있는 단풍도 잎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김구가 느꼈을 쓸쓸함이 밀려왔다.
「공주 마곡사-출세간의 길을 가다 」
김구의 사상이나 종교의 편력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유교 사상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에 관서의 유학자인 고능선(高能善, 1842~1922)을 만난 것이 그의 운명을 갈랐다. 김구는 자신이 그를 만난 것은 “젖을 주리던 아이가 젖엄마를 만난 것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고능선의 학맥은 화서학파華西學派로 이어진다. 호는 후조後凋이다. 그는 1880년대 후반에 3년간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의 가정서사柯亭書舍에서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화서학파 안에서 그리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 무렵 고능선은 유중교의 집안 조카인 의암 유인석을 만났다. 고능선과 유인석은 동문수학을 한 동갑내기로서 그 사이가 자별했다.
고능선이 어떤 인연으로 춘천을 찾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1893년, 그러니까 50세가 넘은 초로에 고능선은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인 안태훈安泰勳의 초청으로 황해도 신천에 정착하여 청계동에서 학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김구는 황해도 팔봉 접주로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한 뒤 안태훈의 주선으로 청계동에 피신하러 가면서 안태훈을 통하여 고능선을 만났다. 김구의 충의를 들은 고능선도 그를 각별히 아꼈다. 이때 김구는 고능선에게서 『화서아언華西雅言』과 『주자백선朱子百選』을 배웠다. 그 뒤 안태훈 일가와 종교적 문제로 갈등하다가 단발령을 계기로 고능선은 청계동을 떠났다. 고능선은 김구를 손주사위로 삼을 생각을 할 만큼 그를 사랑했으나 인연은 거기에서 그쳤다.
고능선은 김구에게 이제 청나라의 복수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니 이때를 이용하여 국모를 죽인 일본에게 항전할 의병 활동을 권고하면서, “나라가 망하는 데도 신성하게 망함과 더럽게 망함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럽게 망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서로 붙잡고 울 때도 있었다.
「춘천 가정리 유인석 묘소-존경과 그리움의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