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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한국 문화/역사기행
· ISBN : 9788950975814
· 쪽수 : 364쪽
· 출판일 : 2019-06-26
책 소개
목차
발간사
발간사 그 멀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따라
상하이(1)
샤페이로 임시정부청사: 초대 경무국장으로 활약하다
난징로: 근대 상하이를 체험하다
징안쓰공묘: 생사를 함께했던 동지를 보내면서
융칭팡: 삼대 가족의 단란했던 한때
마랑로: 임시정부청사 하이 시기 마지막 청사
신톈샹리: 한인애국단원 선서하다
장완비행장: 13년 만에 상하이로 돌아오다
양쯔판뎬과: 다광밍극장 환국 직전 분주했던 날들
카이쯔얼로: 경무국 김구와 공교론자 이병헌의 만남
상하이(2)
황푸 강변, 일본총영사관, 애스터호텔, 부두: 제국과 반일의 기억
상하이우정총국과 쇼킨은행: 김구와 이봉창의 거사 자금 루트
상하이에서 김구와 윤봉길: 영원한 이별, 다시 돌아온 현장
김구와 쑹스뱌오의 한중폭탄연대: 이봉창·윤봉길 의거의 망각지대
훙더탕과 YMCA: 피치 가문과 한국 독립운동
생사기로에서의 국제연대: 피치 부부와 김구, 피신과 탈출 루트
자싱·하이옌·항저우
자싱, 메이완가: 피난 생활의 시작
하이옌, 자이칭별장: 산수로 마음을 달래다
항저우, 옮겨 온 임시정부: 임시정부의 위기와 재정비 현장
난징·전장
친화이허 화이칭교: 용의 둥지, 주아이바오와의 동거
난징국민정부: 독립운동의 새 근거지를 찾아
치루와 중양판뎬: 김구와 장제스의 만남
한인애국단과 중양육군군관학교: 김구 활동의 조직 기반
장닝: 김구의 은신처
전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재지
참고 문헌
색인
저자소개
책속에서
1922년 김구는 국내의 가족들을 상하이로 불러들였다. 김구로서는 상하이 생활이 그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운동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1920년 1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이핀샹에서 신년축하회를 할 때만 해도 다음 해의 신년축하회는 서울에서 열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낙관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1921년 기대를 걸었던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상정되지 않으면서 독립운동 진영의 열기는 빠르게 식어 갔다. 김구도 이 점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결국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생활이 안정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이 곁에 있어야 했다.
_ 상하이(1)-마랑로 임시정부청사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김구는 무엇보다도 안중근의 아들로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처벌하고자 하였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 명예를 더럽힌 안준생의 행위는 결코 용서될 수 없었다. 안준생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도 상하이에 잔류하였다. 1939년 10월 상하이 한인들의 ‘만선시찰단’ 일원으로 서울에 들어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를 만나 아버지 안중근의 ‘죄’를 사죄함으로써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된 바 있었다. 그때 중국 대륙을 전전하다 막 충칭에 도착한 김구도 조선총독부에 의해 연출된 안준생과 이토 히로부미 아들의 ‘화해극’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안중근의 정신을 기리고 그 유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김구는 그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았다.
_ 상하이(1)-카이쯔얼로 경무국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에 대해서도 일본총영사관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의거 당일 상하이총영사는 육군·해군 등과 협의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제 검거를 프랑스 측에 요구”하기로 하였고, 밤 8~9시경에 일본 헌병 사복대 등 수백 명은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한인의 출입을 경계하였다. 다음 날인 30일 오전 4시 영사관의 아카키 사무관 지휘하에 70명에 이르는 검거반을 출동시켜, 오전 5시 프랑스 공무국 경찰대와 현지에서 회동하여 한국인들을 검거하게 하였다. 이후 프랑스 조계의 한인 사회는 ‘백색테러’가 횡행하는 암흑천지로 변하였고, 결국 안창호를 비롯한 한인1 1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물론 김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5월 2일 상하이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에 의하면, 헌병대장과 협의하여 “경찰 20명, 헌병 10명, 총 30명의 체포대”를 조직하여 김구 체포 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김구 체포를 위해 헌병대 100명을 대기시켰고 박춘산이라는 첩자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은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체포에 일화 2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다시 일본외무성과 조선총독부·상하이주둔군사령부 등과 합동으로 60만 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_ 상하이(2)-황푸 강변, 일본총영사관, 애스터호텔, 부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