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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문화/역사기행 > 한국 문화/역사기행
· ISBN : 9788950975821
· 쪽수 : 292쪽
· 출판일 : 2019-06-26
책 소개
목차
발간사 그 멀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따라
우한·창사
우한 국민정부청사: 전쟁의 시작
창사 백범김구 활동기념관: 혼란스러운 정국의 소용돌이
광저우·포산
광저우 둥산 보위안과 야시야뤼관: 임시정부의 임시 거처
광저우의 쑨원 호법정부: 임시정부가 호법정부를 만나다
광저우, 국공합작의 도시: 혁명과 독립을 꿈꾸던 청춘들
광저우 황푸 강변 학생묘지: 중국혁명의 와중에 스러지다
포산 임시정부 가족 거주지: 불안한 미래와 다급한 피난길
임시정부 가족들의 피난길: 충칭으로 가는 길
구이핑·류저우
싼수이에서 류저우까지: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
류저우 임시정부기념관: 일본군의 공습 아래서
류저우 취위안극장: 부상병 위문 공연
충칭·시안
충칭, 투차오와 허상산: 임시정부 가족들의 거처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항전을 위해 힘써 일군 터전
한국광복군 전진사령부 기지: 무장 독립 투쟁의 중심
OSS훈련지 미퉈구스: 참전을 위해 땀 흘리던 곳
김구의 충칭 생활기: 독립을 지탱한 버팀목
연보
참고 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시작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때를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그 당시까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각 단체들 사이에 연합전선 문제가 대두되었다. 결국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형성되었다. 그중 한커우에서 결성된 조선민족전선은 무장 부대 조직과 대일 항전 참여를 목표로 하였다. 조선민족전선은 1938년 7월 중양군관학교 싱쯔분교 졸업생들이 민족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로 합류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무장 부대 조직에 착수하여 1938년 7월 7일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군 조직을 정식으로 건의하였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모든 항일 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규모상의 문제로 무장 부대를 ‘군’보다는 ‘대’로 할 것과 조직될 무장 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에 둔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1938년 10월 2일 한국 및 중국 양측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_ 우한·창사-우한 국민정부청사
포산에서 임정 가족들의 생활은 그동안 누려 왔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국이라고는 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일자리가 있어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끼니 걱정은 그럭저럭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산에서는 일자리를 전혀 구할 수 없었다. 수입이 없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늘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그나마 임시정부가 가족 수에 맞춰 생활비를 나누어 주었기에 간신히 기본적인 생계는 이어 갈 수 있었다 . 그렇지만 언제 또다시 피난을 가야 할지 몰라 늘 짐을 쌀 준비를 하며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보냈다. 이러한 불안은 오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는데, 중국 해안을 봉쇄하고 있던 일본군이 10월 초 광둥성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광저우 함락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더 이상 포산에 머무를 수 없어, 임시정부는 짐을 꾸려 일단 싼수이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정정화는 당시의 상황을 『장강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_ 광저우·포산-포산 임시정부 가족 거주지
구이핑을 거쳐 류저우에 온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모두 120명 정도였다. 각종 기록에 나오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의 거주지는 장시후이관, 징시로 10호, 타이핑시가 18호, 칭윈로 109호, 그리고 랴오레이공관,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일투쟁기념관이 위치한 러췬서 등등이었다. 초기부터 분산 수용되었고, 류저우를 떠날 때까지도 변화는 없었다. 류저우에는 잠시 동안 머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1939년 4월에 충칭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교통편이 그때서야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즉, 류저우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식적인 판공처를 설치해 운영했다기보다는 조만간의 이동에 대비해 잠시 대기하던 곳이라 하겠다.
_ 구이핑·류저우-류저우 임시정부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