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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후기(영조~순종)
· ISBN : 9788952233141
· 쪽수 : 232쪽
· 출판일 : 2015-12-30
책 소개
목차
발간사 ‘그들이 본 우리’-상호 교류와 소통을 위한 실측 작업
서문-나라와 백성
땅과 산물 | 환경 | 백성 | 언어 | 사회 계급 | 가족 | 국왕과 정부 | 종교 | 조선 민족의 기원
제1부: 그리스도교의 조선 유입과 최초의 박해들(1784~1831)
16세기 일본의 침입 | 조선 최초의 천주교 입교자들(18세기) | 가성직제도의 수립 | 중국인 신부 주문모 야고보의 입국과 순교 | 수많은 그리스도교인의 순교 | 척사윤음(1802년 1월 25일) | 30년간 선교사가 없었던 조선 교회
제2부: 가혹한 박해와 수많은 순교자
제1장: 조선 대목구의 설정(1831), 1839년과 1846년의 박해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몬시뇰 | 모방 신부의 조선 입국 | 샤스탕 신부의 조선 입국 |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 몬시뇰 | 1839년의 박해 | 앵베르 주교의 체포 |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체포 | 세 선교사의 순교 | 척사윤음(1839년 11월 24일) |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몬시뇰 | 최초의 조선인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 김대건 신부의 순교
제2장: 선교사들의 활동(1847~1866)
페레올 주교의 죽음(1853) |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몬시뇰(1855) | 보좌주교로 성성된 다블뤼 몬시뇰(1856) | 보람과 시련의 시기(1857~1863) | 조선 국왕의 죽음과 궁정 혁명 | 신임 선교사 4인의 도착 | 러시아와 조선 | 박해가 일어나다 | 베르뇌 주교의 체포 |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와 승지 남종삼의 체포 | 추국청을 열고 국문을 행하다 | 베르뇌 주교와 그 동료들의 순교 |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의 체포와 순교 | 다블뤼 주교 및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의 체포 | 다블뤼 주교와 그 동료들의 순교 | 1866년의 무수한 순교자들 | 세 명의 선교사가 피신하는 데 성공하다 |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 | 수년간 박해가 지속되다
제3부: 카타콤바 밖으로 나온 조선 교회, 수확을 시작하다(1867~1911)
제1장: 조선 재입국을 위한 선교사들의 시도(1867~1870)
박해와 신교의 자유 | 이교국의 종교 자유를 위해 외세가 개입하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 조선 재입국을 위한 선교사들의 시도와 좌절, 그들의 중국 잔류
제2장: 리델 몬시뇰과 블랑 몬시뇰의 대목구장 재임 시기 그리고 조선과 외국 열강들 간의 조약(1870~1890)
제6대 조선 대목구장 리델 몬시뇰 | 1871년 미국의 조선 원정과 조선 입국을 위한 선교사들의 새로운 시도 | 리델 주교의 조선 입국, 그의 체포와 방면 | 조선어 문전과 사전 | 두 명의 선교사 체포당하다 | 마지막 척사윤음(1881년 6월 12일) | 조선과 외국 열강들 간의 조약 |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 몬시뇰
제3장: 조선 대목구장 뮈텔 몬시뇰, 수확
1890년 조선 교회의 현황 |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 몬시뇰 | 1891년의 민란과 1894년의 청일전쟁 | 선교사들의 활동과 복음화의 진척 | 러일전쟁과 일본 보호령이 된 조선 | 서울 베네딕토회 수도원 설립(1909)
제4부: 조선 교회의 조직화와 교구 분할
제1장: 서울 대목구(파리 외방전교회)
뮈텔 몬시뇰의 초대 서울 대목구장 취임과 드망즈 몬시뇰의 성성 | 서울 교구의 신학교 확장 | 천주교인의 이주 | 보통학교 | 더욱 충실한 신앙 생활 | 조선의 일본인 교우들 | 방인 사제들을 위한 라틴어 잡지 | 1914~1918년 전쟁, 개신교의 성장 | 병합 이후의 조선 천주교회와 일본 | 간도에서의 약탈과 소요, 최문식 베드로 신부의 피랍 | 뮈텔 몬시뇰의 주교 성성 30주년(1920) | 원산 대목구의 신설(1920), 서울에서 두 명의 주교가 성성되다(1921) | 1922년 서울 교구 시노드와 성직자들을 위한 새로운 지도서 공포 | 가톨릭 청년회 | 학생 기숙사와 상업학교 건립 노력 | 회장들을 위한 지도서 | 서울 교구 인쇄소 |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 조선 순교자들의 시복 소송 | 서울 대목구의 북서 지역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다 | 1924년 초 서울 대목구의 인원
제2장: 대구 대목구(파리 외방전교회)
조직 활동 | 복음전파 활동 | 1924년 초 대구 대목구의 인원
제3장: 원산 대목구(바바리아?성 오틸리엔 베네딕토회)
성 오틸리엔 베네딕토회의 조선 진출(1909년 2월) | 원산 대목구의 설립 | 조직 및 사업 | 원산 대목구의 인원(1924)
제4장: 평안도 지역(메리놀 외방전교회)
서울 대목구의 북서 지역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다 | 미국 가톨릭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결론
현재 조선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의 장애물 | 조선에서 개신교의 위협 | 덧붙이는 말 | 조선 천주교 현황(1923)
옮긴이 글 | 옮긴이 주
책속에서
조선어는 중국어와 상당히 다르다. 중국어는 단음절어인데 조선어는 다음절어로서 교착어의 한 갈래에 속한다. 조선어는 한편으로 일본어와 이웃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랄 알타이어족-몽골어·퉁구스어·터키어·사모예드어 등-과 가까우며, 또한 인도의 드라비다어족-타밀어·말라바르어 등-과도 유사한 점이 많아 보인다. 조선어는 1443년 이후로 한글 자모를 사용하는데, 일설에 따르면 티베트 문자를 모방한 것이라 하며 모음 11개와 자음 14개의 25개 낱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전에 조선에선 중국 문자만을 알았으므로 음성 언어는 글로 적을 수 없었으며, 모든 것이 한자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어가 그 어휘에 있어 한자어를 많이 차용했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자어는 라틴어나 희랍어가 현대 서구 언어들의 학술 용어 형성에서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조선에서 하고 있다.
-서문 中
그는 베이징에서 주교를 비롯한 여러 성직자를 만났고, 미사성제(聖祭)에 참석했으며, 또한 성사(聖事)들이 어떻게 집행되는지도 봤다. 게다가 그는 전례(典禮)의 조직을 다룬 서적도 갖고 있었다. 더 무엇이 부족한가? 저 조선인 신문교우들 가운데 사제가 나오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그리하여 교우들이 모여 수차례 회의를 거친 후에 권일신이 주교로 선출되고 이승훈과 다른 몇 명은 신부가 되었다. 모든 이가 절대적 선의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영세를 주고, 고해를 듣고, 견진(堅振)을 베풀고, 미사를 거행하기 시작했고 신도들은 크게 열광하였다. 그들이 그러한 다양한 성무 활동에 전념한 지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때(1789년), 교리 서적 중 어떤 것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던 중 그들은 스스로 사제로 선출된 것이 과연 유효한가에 대한 불안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그 즉시 모든 성무를
중단하고 베이징 주교에게 서신으로 문의하였다.
- 제1부 그리스도교의 조선 유입과 최초의 박해들(1784~1831) 中
9월 18일 로즈 제독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즈푸를 출발하였다. 선상에는 통역으로 따라온 리델 신부가 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제독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그 어떤 지시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것이 어쩌면 그가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겠으나, 속단하지는 말자. 함대는 곧 조선 해역에 도달하였다. 20일 그들은 한강 하구를 정찰했고, 25일 두 척의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 가까이에까지 접근하였다. 30일 그들은 뒤에 남겨두었던 ‘프리모게’호와 다시 합류하여 10월 3일 즈푸로 되돌아왔다. 이제는 실전에 나설 차례였다. 10월 11일 제독은 이번엔 일곱 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즈푸를 출발, 13일 강화도 앞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별다른 저항 없이 섬을 점령하였다. 그곳에서 제독은 조선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들에게 극형을 내린 관원 세 명을 그에게 넘겨줄 것과 전권을 지닌 고관을 파견하여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은 그 서한에 회답하지 않았다. 한편 제독은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강화읍과 그곳에 있던 궁전[장녕전(長寧殿)]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그러고 나서 그는, 프랑스인들이 겁을 먹고 도망쳤고 그리스도교인이 이러한 침략과 그로부터 입은 피해를 책임져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는 외교인들의 분노와 보복에 저 불쌍한 교우들을 무방비로 내버려 둔 채, 즈푸로 떠나고 말았다.
-제2부 가혹한 박해와 수많은 순교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