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54638210
· 쪽수 : 206쪽
· 출판일 : 2015-11-20
책 소개
목차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007
옮긴이의 말 203
리뷰
책속에서
2008년 3월 11일 날이 저물 무렵, 라 로셸 북쪽 어느 구역에서 아버지는 엽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조수석에 앉아 있었는데, 아마도 핸들이 걸리적거려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좌석을 조금 뒤로 젖히고 두 다리를 쭉 뻗은 다음, 총신을 몸에 걸친 채 총구를 입안에 넣고 아주 민첩한 동작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하얀 가운, 가무잡잡한 얼굴빛, 태양의 남자답게 눈부신 미소를 띤 그, 바조주 거리의 물리치료사였던 시절 황금 손의 사나이로 불렸던 그가.
어느 날 저녁 브누아트 그루가 들려준 폴 기마르의 말이 생각난다. 『삶의 문제들』의 저자이기도 한 그에게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앞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딱 십오 분 남았다는 걸 안다면 뭘 하겠습니까? 기마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손목시계를 풀어 멀리 던져버리겠소. 아버지는 오래전에 자신의 손목시계를 멀리 던져버렸다. 그는 더는 남은 시간을 계산하지 않았다. 그는 모래시계를 박살내버렸다.
하지만 그전에, 영안실과 그 어색한 침묵의 행렬, 그리고 조심스러운 물음이 있었다. “아버님을 보시겠습니까?” 우리 세 사람 모두 아버지의 얼굴을 눈앞에 마주하게 된다는 생각에 소리내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십이 구경 총알이 아버지의 얼굴을 뚫고 지나가지 않았던가…… 남자는 우리를 격려했다. 그랬다. 그자는 준비를 해두었다. 그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소개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아버지를 소개하다니? 나는 몸이 떨렸다. 낯모르는 사람이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를 소개하는,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은 도대체 어떤 세상이란 말인가? 나는 그 낯선 이에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고, 당신에게 그를 소개할 사람은 바로 우리라고. 하지만 나는 이내 고쳐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살아 있는 아버지였다. 나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죽은 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