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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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활동했던 문인이자, 시조 작가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字)는 약이(約而)이며, 호(號)는 고산(孤山) 혹은 해옹(海翁)이다. 1612년 26세의 나이로 진사(進仕)에 급제했고,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1616년 당시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병진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이 시기 유배지에서 <견회요>와 <우후요> 등의 시조를 창작했다. 1618년 유배지가 경상도 기장으로 옮겨졌다가, 인조반정(1623) 직후 대사면령이 내려 유배에서 풀려 전라도 해남으로 돌아갔다. 남인(南人)에 속했던 윤선도는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유배를 떠나는 등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42세(1628)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를 해, 당시 이조판서이던 장유(張維)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47세 때인 1633년에 다시 증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예조정랑에 임명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에서 생활하던 무렵, ‘병자호란’(1636)이 발발하자 향족(鄕族)과 집안의 노복(奴僕)들을 이끌고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 인근에서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이미 적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던 중, 태풍을 피해 잠시 머물던 곳이 바로 보길도였다. 이후 윤선도는 자연 풍광이 수려한 보길도에 정착하게 된다.
52세 때인 1638년에는 병자호란 당시 서울을 지척에 두고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不奔問)’는 혐의로 탄핵을 받고,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게 된다. 이후 해남에 돌아와 집안의 대소사를 차남에게 맡겼으며, 1640년부터 해남의 금쇄동에 거처를 마련해 은거했다. 이후 10여 년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보길도와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나이 56세 때인 1642년에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연작 18수의 시조 작품을 창작했으며, 2년 후에는 <산중속신곡> 2수와 <증반금> 등의 시조를 짓기도 했다.
윤선도가 63세 되던 1649년 인조(仁祖)가 승하하고, 세자로 있던 봉림대군이 효종(孝宗)으로 즉위했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시절 사부를 지낸 바 있었기에, 이해에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요체를 논한 <기축소(己丑疏)>를 올렸다. 1651년에는 자신이 거처하던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했다. 66세가 되던 1652년에는 왕의 특명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이때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있는 별장에 머물면서 <몽천요> 3수를 창작했다. 하지만 이내 효종에 의해 다시 관직이 제수되어 조정에 나아갔고, 당시 권신인 원두표(元斗杓)의 비리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당해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7년(71세)에는 조정에 불려 갔다가 다시 관직에 제수되었고,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해 왕릉을 정하는 산릉의 간심(看審)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인을 대표한 논객으로 예송(禮訟)에 참여했다가 패배해, 당시 권력을 장악한 서인들에 의해 1650년 함경도 삼수에 유배되었다. 1665년(79세)에는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져 백운산 아래의 옥룡동에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2년 후인 1667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에 있는 거처 낙서재(樂書齋)에서 운명해, 해남의 금쇄동에 묻혔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윤선도의 삶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부로 있었던 봉림대군이 후에 효종으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는 등 비교적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생애의 절반 이상을 관직보다는 유배지 은거지에서 지내야만 했으며, 반대 당파의 비방에 결연하게 맞서며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사(經史)에 해박했으며, 의약과 복서 및 지리 등에도 널리 통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고산유고(孤山遺稿)≫(6권 6책)가 있다. <어부사시사>·<오우가> 등 75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작품들로 인해 ‘자연미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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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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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시가 전공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전시가를 주된 연구 분야로 삼고 있으며, 최근에는 고전자료 정리와 현대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논저로 『조선후기 가집 연구』(2015), 『김천택 편 청구영언 주해편』(공저, 2017), 『고시조대전』(공저, 2012), 『고시조 문헌 해제』(공저, 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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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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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생.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한문학과에서 한국한문학을 전공했다. 고려 후기 한시를 주로 연구하여 약간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사대부문학 형성기의 한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교의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역임한 뒤 귀촌하여 대관령에서 은거중이다. 우리 고전 번역에 참여해 『조희룡 전집』을 비롯해 『매천야록』 『고산유고』 등을 공동 번역했다. 중국 시가문학에도 관심을 두어 『도연명 전집』 『맹호연 전집』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 출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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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대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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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의 옛 시가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시가학회, 한민족문화학회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인문학의 대중적 확산과 공유를 위한 활동에도 관심이 높다. 저서로 『정전 형성의 논리』, 『신라인의 마음, 신라인의 노래』, 『한국 고전시가와 인물형상의 동아시아적 변전』, 『고전문학과 여성주의적 시각』(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어우야담』, 『고산유고』(이상 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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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우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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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한국한문학 전공, 문학석사 및 문학박사)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강사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 국제표준한자 전문위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해제위원
한국고전번역원 해제위원
국립 한경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전북대학교 HK(인문한국)교수
현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著作
??《여헌학의 이해》(공저), 예문서원, 2015.
??《어촌 심언광의 문학과 사상》(공저), 강릉문화원, 2014.
??《韓國漢文學의 형상과 전형》, 보고사, 2012.
??
??《반곡 정경달의 시문집》(1-2),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7.
??《국역 용성창수집》, (주)박이정, 2015.
??《국역 주곡유고》, (주)박이정, 2009.
論文
??〈韓中日 統合漢字 교육 방안에 대한 고찰〉, 《대동한문학》제51집, 2017.6.
??〈반곡 정경달의 漢詩 연구〉, 《남도문화연구》 제32집, 2017.6.
??〈한국 한시의 괴물 형상에 대한 일고찰〉, 《우리어문연구》 55호, 2016.5.
??〈孤山 漢詩의 공간과 미적 특질〉, 《민족문화》 제46집, 2015.12.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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