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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서양철학 일반
· ISBN : 9788956441177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13-11-04
책 소개
목차
역자 서문
Ⅰ. 영혼의 욕구
질서
자유
복종
책임
평등
위계
명예
벌
의견의 자유
안전
위험 부담
사유재
공공재
진실
Ⅱ. 뿌리 뽑힘
노동자의 뿌리 뽑힘
농민의 뿌리 뽑힘
뿌리 뽑힘과 민족
Ⅲ. 뿌리내림
리뷰
책속에서
【역자 서문】
시몬 베유는 1909년에 유대계 프랑스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의사였기에 가정환경은 유복한 편이었고, 가족 모두 두뇌가 명석했다(오빠 앙드레 베유는 훗날 수학자로서 명성을 얻는다). 시몬 베유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고,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의 고통에 유독 민감했다. 철학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것은 고등학교에서 《행복론(Propos sur le bonheur)》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알랭(본명은 에밀 오귀스트 샤르티에)을 사사하면서부터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한 후에는 루아르 강 유역의 르퓌 마을로 발령받아 교사로 일했다. 원래부터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관심이 깊었던 그녀는 이 시골 교사 생활을 통해 프랑스 농민 사회의 척박한 문화와 고갈되어 가는 영성, 이제 갓 어린애 티를 벗은 소년 소녀가 밭이나 공장에서 한 사람 몫의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 눈을 뜬다(그들의 충격을 헤아리는 마음이 이 책에도 절절히 나타나 있다). 병약한 체질을 타고났기에 몇 번이나 요양을 해야 했지만 그녀는 1936년까지 제 몸을 상해 가며 공장과 농장에서 한 사람의 임금노동자로서 살아갔다. 이러한 체험은 시몬 베유의 모든
저작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런 탓에 앙드레 지드는 그녀를 “아웃사이더들의 수호성인”으로 추앙했고 해방신학자 도로테 쥘레는 “현대의 성인”이라고 했다.
시몬 베유의 저작은 모두 그녀가 짧은 생을 마감한 후에 발표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출간된 책이 귀스타브 티봉이 편찬한 《중력과 은총》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아포리즘 형식이 눈에 띈다. 단상(斷想)에서 번득이는 통찰과 독창성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주지만 반면에 그러한 형식에서 기인하는 오해, 혹은 오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독자들은 저자의 신비주의적 영감에는 동의하되 저자의 지성적인 면은 간과하기도 한다. 또한 자기 파괴적이고 피학적인 정서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독자들도 있다. 《중력과 은총》은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 여러 번 곱씹어 읽고 베유의 다른 저작들에서 힌트를 얻어야 할 책이다.
이 책 《뿌리내림》은 그런 면에서 시몬 베유의 사상에 좀 더 다가가게 해 줄 또 한 권의 중요한 저작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베유가 (그녀의 다른 텍스트들과 달리)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일관된 논리를 견지하며 썼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적인 맥락과 요구를 감안해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태계 혈통이었던 베유 가(家)는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시몬 베유는 1942년 11월에 영국으로 건너와 런던의 자유프랑스운동 인사들과 접선했다. 이때 자유프랑스운동 측은 그녀에게 조국 프랑스의 재건 가능성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이 책은 그 요청에 대한 답변으로서, 주로 1943년 초에 집필되었다. 시몬 베유는 이 원고를 쓰면서 프랑스로 돌아가 본국의 레지스탕스에 합류할 길을 모색했으나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런던에서 사망했다. 결국 문제의 원고는 전쟁이 끝나고 1949년에야 프랑스에서 《뿌리내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이제 곧 전쟁이 끝나리라는 기대 속에서 동포들에게 보내는 애끊는 호소인 동시에 전 세계 인류를 향한 호소이기도 하다.
《뿌리내림》은 이렇듯 정치적인 요구에서 나온 텍스트이고 실제로 상당히 정치적이지만, 시몬 베유가 정치를 말하는 방식은 범상치 않다. 그녀는 어떤 계층, 사회, 문명, 국가의 문제를 결국 ‘뿌리 뽑힘’으로 진단한다. 뿌리는 자신의 고유한 토양에 근거한 영성으로서, 모든 인간은 여러 갈래로 뿌리를 내리고 산다. 그리고 가장 폭력적이고 과격한 형태의 뿌리 뽑힘이 바로 정복과 전쟁이다.
시몬 베유는 독일에 정복당한 조국, 다시 말해 ‘뿌리가 뽑힌’ 프랑스의 영성을 분석한다. 그녀가 보기에 뿌리 뽑힘은 군사적 패망 이전에 이미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노동운동이 순수성을 잃으면서 노동자의 뿌리가 뽑혔고, 매사가 도시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노동자보다도 소외된 농민의 뿌리가 뽑혔다. 타자를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조국의 영광이라 생각하는 거짓 조국애도 온 세상 곳곳에 뿌리 뽑힘을 낳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시몬 베유가 얼마나 프랑스를 뜨겁게 사랑했는지 엿볼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뿌리 뽑힘을 불러올 여지가 있는 조국애 개념을 얼마나 경계하는지도 분명히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 시몬 베유는 열렬한 사랑을 품고도 착각과 기만을 배제하기 위해 사랑의 대상에 대한 분석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석은 국가주의적 색채가 조금도 없는, 모든 피압제자에 대한 사랑으로 수렴될 수 있었다.
또한, 베유는 프랑스의 영성을 분석하면서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신비주의 영성에 할애했다. 본인이 이미 그리스도교적인 신비를 체험한 이후이기도 했지만 당시 프랑스의 민중, 특히 시골 사람들의 정신세계에서 가톨릭 신앙이 얼마나 큰 지분을 차지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내림》 영문판에 서문을 썼던 T. S. 엘리엇이 지적한 대로 시몬 베유의 책을 읽는 사람은 깐깐하면서도 과격하고 뭔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인물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특히 이 책에서 우리는 웬만한 보수주의자 뺨치게 위계질서를 존중하고 괴팍하다 싶을 만큼 완고한 시몬 베유를 발견한다. 조국을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조국에 대한 연민을 가누지 못하고, 노동자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하고자 했지만 그러한 기대가 무너진 후에도 여전히 노동자를 사랑하며, 한때 평화주의를 지지했지만 독일의 프라하 점령으로 평화주의의 한계를 절감한 생애 말년의 시몬 베유가 여기에 있다. 초인적인 겸손은 여전하되 거의 오만에 가까울 정도의 엄격성을 갖추었다. 타자에게 그러한 엄격성을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투쟁에 그러한 엄격성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인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시몬 베유의 사상을 요약하거나 비판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사람은 정말로 그렇게 살았다”는 판단이 우리의 말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시몬 베유는 애당초 사상적인 체계를 수립하려 했던 철학자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체험한 진리를 사유하고 자신이 생각한 진리대로 살았을 뿐이다. 시몬 베유를 다시 한 번 읽을 이유는 그만하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