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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7075531
· 쪽수 : 216쪽
책 소개
목차
절명한 양말 장수를 위하여
우리도 에어컨 사요
타짜를 위해 장전
리볼버
페인트칠
난공불락의 비밀 상자
고독한 어묵 장수
우리 집에 도청기
작별을 고함
땅굴 혹은 방공호
엿장수의 첫사랑
폭설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마루에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경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버지는 담담했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더니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빠.”
경수가 불렀다.
“아빠라고 부르지 마라.”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
이번에는 내가 불렀다.
“넌 아빠라고 불러도 된다.”
“싫어요.”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텔레비전 앞에 누운 채 졸고 있었다. 부엌에는 라면 끓여 먹은 냄비가 뒹굴고 있었고, 상 위에는 김치 담은 그릇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측은지심이 막 몽글몽글 피어오르려는데 잠에서 깬 아버지가 말했다.
“애비 밥도 안 주고 어딜 갔다 오는 거냐?”
그 순간 맺히려던 측은지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하루 종일 고생한 게 누구 때문인데, 하는 생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내게서 나가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밥솥에 밥 있고 냉장고에 반찬 있잖아요.”
그런 다음 재빨리 아버지의 대답을 가로챘다.
“손이 없다고요? 오른손은 머리 밑에서 꺼내고 왼손은 리모컨을 놓으세요.”
아버지와 나는 사포를 하나씩 나눠 들고 벽에 붙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일어난 페인트를 사포로 문지르자 부옇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아버지가 재채기를 했다. 그래도 마스크는 쓰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절대 그런 일 없다고 안심시켰지만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엄마랑 살면서 어땠어요?”
“뭐가?”
나는 칼을 가져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긁기 시작했다. 계단을 새카맣게 만든 게 이끼인지 곰팡이인지 알 수 없었다.
“행복했냐고 묻는 거예요.”
아버지는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어딨었냐. 평생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되잖아요. 행복이란 거 원래 그때는 모른대요. 시간이 지나고 나야 알지.”
아무리 긁어도 변색된 계단을 원래대로 만들 수는 없었다. 오히려 긁을수록 칼자국만 생겨서 더 흉해졌다. 페인트칠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모르겠다. 아니, 나는 괜찮았는데, 네 엄마는…… 고생만 하다 가서…….”
한참 만에야 아버지가 대답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밀짚모자를 씌워 주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목에는 수건을 둘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