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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중국소설
· ISBN : 9788957078501
· 쪽수 : 456쪽
책 소개
목차
01 안녕, 소녀
02 어른들의 사정
03 그럼에도 불구하고
04 옛 사람이 돌아오다
05 5월 12일
06 그의 이름은 전나무
07 우리 내일 결혼할까?
08 남매
09 여름밤의 미소
10 뒤바뀐 두 아이
11 당신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요
12 머무는 사람, 떠나는 사람
13 휴양지에서 생긴 일
14 보고 있어도 그리운 얼굴
15 서툰 노랫소리
16 너희들은 모른다
17 엄마
18 리처드 3세
에필로그_정원이 있는 집
후기_이 소설은 나의 빛이었다
리뷰
책속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났니?” 엄마의 첫마디였다.
“아까 만났어요.”
“그럼 됐다.”
늘 이런 식이다. 엄마는 내 전화를 받을 때 이름을 부르는 법이 없고, 나도 ‘엄마’라는 호칭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우리는 꽤 오래전부터 서로를 부르지 않는다. 작은어머니 앞에서 ‘우리 엄마’라고 말하다가 혀가 꼬일 뻔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몸조심하세요” 따위의 말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대로가 좋다. 내가 그 여자에게 “몸조심하세요” 따위의 뻔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할 말이 있어.” 움켜쥔 그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여기서 말하고 싶진 않지만 여길 와야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아들을 데리고 가겠어.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야.”
“쫓겨났지?” 나는 그의 눈을 노려보며 피식 웃었다. “당신, 연구소에서 잘린 거야. 이제야 아들 생각이 났겠지. 장애아보조금을 신청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게 아니면 먹고살 일이 막막하니까, 안 그래?” 한때 살 부비고 산 전처이므로 나는 어떻게 하면 그를 격노시킬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렇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 혼자 텅 빈 카페에 앉아 맥주캔을 힘껏 땄다. 눈처럼 흰 거품이 흘러넘치기 직전에 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거품이 혀끝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런 아릿한 파멸이 바로 살아 있는 것이다. 방금 전 내가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들어 구석 자리의 스탠드를 켰을 때 장이가 선물한 낡은 피아노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냈다. 마치 이곳에서 나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윽물고 그것을 노려보다가 문득 웃었다. 그렇게 시리고 쓰릴 만큼 팽팽히 당겨진 시선이 바로 살아 있는 것이다. 방금 전, 그러니까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전에 총구에서 튕겨 나간 총알처럼 작은아버지 댁을 뛰쳐나와 차를 몰고 달리는 동안, 피곤에 찌들어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차들을 차례로 앞지르면서 내가 얼마나 핸들을 옆으로 비틀어버리고 싶었는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그렇게 맹렬하고 통제 불가능한, 죽고 싶다는 욕망이 바로 살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