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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58072737
· 쪽수 : 316쪽
책 소개
목차
1장 유통기한 지난 외항어선, 글로벌원더러호
2장 내가 왔다, 휴스턴
3장 뭐지, 이 가라앉는 기분은?
4장 공포의 대질주
5장 선원 신고식
6장 나비야? 괴물이야?
7장 공짜 점심을 먹으러 온 귀상어
8장 굴욕의 적도통과 의식
9장 전기해머 찾아 삼만 리
10장 사색의 시간, 브리지 당직
11장 방귀 뀌고 성질 내기
12장 시드니에서 자유를 불태우리
13장 일등항해사의 끄나풀
14장 쿨한 양다리
15장 사나이들만의 유대감
16장 상처받은 지상낙원
17장 선장과의 질긴 악연
18장 운명을 건 크리켓 승부
19장 24캐럿짜리 진품 피그미족
20장 위험한 호기심
21장 코프라 벌레를 죽이는 단 한 가지 방법
22장 귀향
책속에서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서 본 글로벌원더러호의 실물은 소프트포커스나 웅장한 배경을 빼고 클로즈업한 탓인지 어째 좀 달라 보였다. 책자에 표현된 낭만적인 문구가 현실의 적나라한 빛에 노출되는 순간, 늙은 매춘부의 로맨스를 들어버린 것처럼 입안이 썼다. 사진 보정이 아무리 잘됐다고 해도, 아무리 멀리서 찍었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내 동기들이 탄 신식 배에는 전기도 들어오고 컴퓨터도 수영장도 있다던데 글로벌원더러에서는 모스 부호가 기본 통신수단이고 육분의가 하이테크 위치 측정장치였다. 또 여기서 위성항해를 수상한 흑마술이라면서 의심스런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한마디로 구시대의 낡은 상선이었다. 유통기한이 삼십 년은 지난 부정기 화물선이었다. 왠지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미시시피강마저도 청록색이 아니었지만 이제 와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첫 예방주사를 맞는 아이처럼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 ‘1장 유통기한 지난 외항어선, 글로벌원더러호’ 중에서
“네 이름을 이미 한두 번 들은 적이 있다.”
선장은 미리 써둔 연설문을 낭독하듯 운을 뗐다.
“듣자하니 놀랍도록 짧은 기간에 기도 안 차는 짓들을 벌였더구나. 오늘 일만 해도 그렇지. 중갑판에 물이 흥건하게 차서 값비싼 화물을 상당량 버렸고, 그나마 하나님의 은총 덕분에 배가 무사히 버텨줘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거지. 자네가 배를 계속 탄다면 자네 하나 때문에 우리 회사가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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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지도 몰라. 솔직히 노력은 가상하네만 자네 스스로에게 물어봐.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이냐고. 우릴 망하게 할 작정이냐, 바블렌 군? 맞나보군. 목표달성을 위해 열심히 뛰는 걸 보니.
어쩌면 자네는 우릴 혼란에 빠트리려고 경쟁사에서 보낸 악마의 분신일지도 모르지. 자네, 악마의 분신인가? 그렇든 아니든 자네도 내 입장이 되면 달리 생각하기 어려울걸. 수습생 명단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기관수습생 - 1명, 항해수습생 - 두 명, 악마의 분신 - 1명’, 이렇게 세고 있지. 나도 어쩔 수 없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물론 네가 그냥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 ‘3장 뭐지, 이 가라앉는 기분은?’ 중에서
“선장님.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곶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드니 하버의 노스 헤드와 사우스 헤드 사이에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곶 사이에 들어와 있습니다. 시드니 곶에서 남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선장의 눈이 삶은 달걀처럼 튀어나오고 입 안에서 경적소리가 터져 나오고 무릎에서는 알람시계가 꺼질 때 나는 딸깍 소리가 났다.
“뭐?”
선장은 얼빠진 사람처럼 소리쳤다.
“너,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산호초 사이를 지나고 있다는 말이냐? 근처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40킬로미터나 떨어진 줄도 모르고?”
선장이 정곡을 찔렀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지적했다. 우리는 여기가 시드니의 곶인 줄로 알고 4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시드니 도선사들과 무전으로 통신한 것이다. 산호초에 걸려 상어가 우글거리는 바다로 침몰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 ‘11장 방귀 뀌고 성질 내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