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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59134151
· 쪽수 : 800쪽
· 출판일 : 2009-12-10
책 소개
목차
1부
2부
3부
4부
작가의 글 보석 같은 이야기들로 만든 터키커피 한 잔
옮긴이의 글 우리는 모두 서로의 하카와티
리뷰
책속에서
아들이 없는 군주가 아들을 얻기 위해 여종 파티마를 이집트로 보내면서 일어나는 기상천외한 모험담
자, 들어보라. 나를 그대의 신으로 생각하라. 내가 그대를 상상치도 못했던 이야기 속으로 인도하리라.
옛날 옛적, 어느 먼 나라에 에미르(아랍국가의 군주나 족장)가 살았다. 그가 사는 도시는 아름다운 초록색 도시였다. 사방이 나무들로 우거져 있었고, 정교하게 꾸며진 분수가 콸콸거리는 소리는 밤마다 시민들에게 자장가가 되어주었다. 에미르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물려받은 재산도, 해마다 거둬들이는 수입도 엄청났다. 그는 건강했고 높은 지위와 멋진 외모에 만인의 존경까지, 그 모든 것을 누렸다. 거기에 남편밖에 모르는 아름다운 아내도 있었다. 다만 그의 마음에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공주는 열두 명이나 있지만 왕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에미르는 총리대신을 불렀다.
“현명한 신하여, 내 그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혼인한 지 20년이 넘도록 대를 이을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였다. 공주 열두 명 모두 제각기 아름답기 그지없고 그동안 내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으며 엄청난 자랑거리가 되어주었지만, 이제 조그만 고추를 달고 궁궐 마당을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는 사내녀석이 하나쯤 있었으면 한다. 나의 이름과 명예를 이어받고 미래에 나의 백성을 이끌 사내아이가 없어 참으로 안타깝다. 내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아내는 다시 한 번 노력해보자고 하지만, 또 딸이 태어날 수도 있는데 차마 아내에게 그 고생을 또 시킬 수는 없느니라. 말해 보거라. 아들을 얻으려면 내가 어떡해야 하겠는가?”
총리대신은 전부터 수도 없이, 정말 수도 없이 아뢰었던 말을 다시금 에미르에게 고했다. 두 번째 부인을 얻으라는 제안이었다.
“너무 늦기 전에 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부인께서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왕자를 낳아줄 여인을 찾으셔야 합니다. 부인을 오직 한 명만 둔 남자는 온 나라에 전하 한 분뿐이십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오사마의 아버지 병실에서 일어나는 떠들썩하고 별난 가족이야기
아버지의 얼굴은 파티마의 말과 딴판이었다. 안색이 파리하고 해쓱한 데다 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몸도 무척 여위셔서, 샤워커튼 고리처럼 빼빼 마른 아버지 손가락 위에서 결혼반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아버지는 한 시간째 누나와 나를 붙잡고 이렇게 즐거울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들이 이드 알아드하를 아버지 곁에서 쇠겠다고 비행기까지 타고 와주니 기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명절만큼은 집에서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아버지는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더는 아프지 않다며 침대에서 나와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하고 큰 소리로 웃기도 했다. 그리고 어서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살균 처리한 흰색 벽과 형광등 불빛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고 살짝 메스껍기까지 했다. 해가 중천에 떴지만 누르스름한 커튼 때문에 방 안에 퍼지는 햇빛은 창백한 회녹색이었다. 누나는 담배를 피우러 수시로 발코니에 드나들었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아버지 눈에 띄지 않도록 번번이 신경 써서 커튼을 닫았다.
“몸이 훨씬 나아졌어. 아주 거뜬한 기분이야.”
아버지가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커튼을 젖혀 햇살이 곧장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미닫이문을 열어 바깥공기를 들였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다. 티 하나 없이 새파란 하늘에 흰 구름 두 점이 흘러가고 있었다. 2월의 이른 봄이었다. 나는 잠시 방을 등지고 서서 얼굴을 간질이는 산들바람을 즐겼다. 대기실에서는 파티마가 조카 살와와 함께 문병객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나가서 교대해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아버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뭣도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말 많이 나아졌어. 이런 휑한 곳에서는 단 하룻밤도 더 있고 싶지 않구나.”
중국 속담에 병시중이 길다보면 의사가 다 된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병시중이 길다보면 성질이 나빠진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침대 탁자 쪽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탁자 위에는 여권사진 크기의 어머니 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는 어머니의 은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사진을 넣는 작은 케이스가 달린 은 목걸이였는데, 아버지는 그 목걸이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스스로를 금세기 최고의 하카와티라고 여기는 오사마의 할아버지의 인생역정과 파란만장한 가족사
“여길 봐라.”
할아버지가 나무 탁자 위에 넓게 펼쳐놓은 지도에서 유난히 색이 흐릿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지만, 고개를 있는 대로 쳐들어도 지도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한쪽 무릎을 삐걱거리는 탁자에 올려놓았다. 아래에 색색의 세상이 놓여 있고 나는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레바논이 보였다. 그곳은 희미한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손가락은 그보다 더 북쪽,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보다도 더 위에 놓여 있었다. 터키는 누르스름한 갈색이었지만, 할아버지가 가리키고 있는 남동부 지점만 표백을 한 듯 허여스름했다.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곳이다.”
할아버지는 촉감만으로도 고향을 찾을 수 있다는 듯 지도는 쳐다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짚었다.
“우르파라는 곳이다. 지금은 산르우르파라고 부르지. ‘영광의 우르파’라는 뜻이다. 근데 이름만 그렇고, 사실은 빌어먹을 우르파지.”
할아버지 입에서는 항상 욕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나왔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할아버지와 자주 붙어 있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사미아 고모는 내가 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우겼다. 할아버지는 가족의 중심이고 나는 그의 자손이었다. 그리고 고모 고집은 아무도 못 말렸다. 그날 아침, 고모가 자기 아들 셋과 나를 차에 태워 베이루트에서 할아버지 집으로 데려왔다. 고모는 우리를 할아버지 집에 내려놓고 마을사람들을 만나러 다시 나갔다.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는 게 고모의 월례행사였다. 고종사촌들은 베이의 조카들과 어울려 노는 걸 더 좋아했다. 그래서 자기들 엄마가 차를 몰고 사라지기 무섭게 안와르 형과 하페즈, 무니르는 언제나처럼 베이의 저택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못 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