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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59666959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15-04-25
책 소개
목차
제1부 고향의 풍경
동화적 환상
첫 여행
달과 고무신
바다의 수수께끼
명주 안감
안개 속에서
낚시
왕릉의 달무
경상도적(的)
고향을 생각함
램프
교직 조끼
제2부 나의 문학 여정
문학적 자서전
천애(天涯)의 유배지
문단 데뷔 전후
지훈과 나
학 같던 두진
『청록집』출판 기념회
땅에서 파낸 작품
1950. 6. 25.
때 아닌 입영
습기에 전 책들
갈증과 사투리
시지프스의 형벌
지훈의 마지막 모습
환상의 지도
구황룡의 아지랑이와 꽃고사리
이리 온, 참새야
정결한 바위
제3부 일상의 경이
미하엘의 미소
한국의 아내
모 씨 부인의 축구 시합 구경
새끼 염소
등의자에 앉아서
밤
밤과 난(蘭)
귤
씨 뿌리기
3분간의 명상
일기 세 도막
삼온(三溫)
금붕어와 꽃나무
오솔길의 사상
바다
태몽의 신비
시와 신앙에 대하여
발문: 박목월 선생의 산문 세계_정민
책속에서
그 뒤로도 나는 분황사에 드나들게 되고 달빛 속에 떠오르는 탑신은 물에서 갓 건져낸 것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탑신을 씻어 내리는 달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설움이 깃들고, 탑의 표정도 전과는 다르게 애수를 머금고 있었다. 참으로 한 켤레의 평생 처음 신어 보는 신기한 신발을 잃어버림으로써 달과 달빛과 깊은 애수에 잠긴 탑의 서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럴수록 탑은 더욱 아름답고 달빛도 한결 아름다웠다.
그 후 20년의 세월. 나는 ‘스스로 맺는 풀 열매’ 같은 작품을 빚으며 살아왔다. 성의를 다하였음에도 가난하기 그지없는 것밖에 이룰 수 없다면, 이미 그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시로 말미암아 청춘이 병들었더니, 시로써 다시 뜻이 서게 되었구나.”
이것은 지훈의 말. 내게는 감개무량한 말이다.
나는 늘 혼자였다. 사무가 끝나면 거리로 나왔다. 거리랬자 5분만 거닐면 거닐 곳이 없었다.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古都)의 산천과 하늘뿐이었다. 이 유배의 지역에서 나는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그야말로 꽃 같은 젊음을 보냈다. 왕릉에 누워서 달을 보는 것, 기와 조각을 툭툭 차면서 길을 걷는 것, 밤이면 램프 밑에서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아무 주막에서나 술을 마시는 것. 그 외에 낮이면 주판알을 튕기는 것이 전부였다. 이 풀 길 없는 고독이 안으로 응결되어 나의 초기 작품 세계의 터가 잡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시를 쓰는 것과 시인이 되는 것 외에 다른 소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