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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61871709
· 쪽수 : 251쪽
· 출판일 : 2010-01-15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17세기 후반 한일 외교 교섭과 울릉도 - 홍성덕
1. 머리말
2. 17세기 한일 외교 체제의 형성
3. 안용복 피랍 사건과 한일 관계
4. 1696년 안용복의 도일과 한일 관계
5. 맺음말
고종과 이규원의 우산도 인식 분석 - 호사카 유지
1. 머리말
2. 고종과 이규원의 대화로 본 우산도와 송죽도
3. 우산도 명칭의 변천 과정과 우산도=독도론'의 확립
4. 울릉도 수색과 수토로 얻어진 우산도에 대한 지견
5. 맺음말
메이지 초년 태정관 문서의 역사적 성격 - 박상헌
1. 머리말
2. 왕정복고와 태정관제
3. 폐번치현 이후의 태정관제
4. 1877년 태정관 지령문의 역사적 의미
고대 울릉도 사회와 집단에 관한 몇 가지 문제 - 오강원
1. 머리말
2. 울릉도의 고대 유물
3. 유물을 통해 본 고대 울릉도 사회 및 집단의 몇 가지 문제
4. 맺음말
독도의 기능, 공간 가치와 소속 - 임덕숙
1. 머리말
2. 독도에 대한 지리학자들의 선행 논의
3. 독도의 공간적 구조
4. 독도의 기능과 공간 가치
5. 독도의 한국 소속의 타당성
6. 맺음말
찾아보기
책속에서
영토의 문제로 확대된 안용복 피랍 사건과 죽도 도해에 대해서 영토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단지 어로 금지만 생각했던 막부가 피랍 사건의 본질이 영토 문제에 있음을 알고 난 뒤 죽도(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내린 최선의 정책적 판단으로 “일본 영토라고도 조선 영토라고도 선언하지 않는 새로운 해결법”을 제시한 것이다. 돗토리번 역시 “(죽도가) 우리 번의 지배지가 아닌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막부 당국이) 사태를 발생시키지 않고 무사히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홍성덕, 「17세기 후반 한일 외교 교섭과 울릉도?안용복 피랍·도일 사건을 중심으로」中)
고종은 송죽도는 “송도(松島)·죽도(竹島)라고도 하는데 우산도와 함께 이 세 섬을 통칭 울릉도라고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고종은 송죽도가 송도와 죽도라는 두 섬이라는 것을 강조한 점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고종이 말한 ‘우산도’는 ‘울릉도 본도’를 뜻한다. 바로 고종이 이규원의 말을 받아들여 “우산도와 죽도·송도라는 세 섬을 통칭하여 울릉도라고 했다”고 말을 정정했다. 먼저 고종은 “울릉도 옆에 우산도와 송죽도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이때도 고종의 생각은 울릉도란 ‘울릉도 본도와 우산도, 송죽도’라는 3섬으로 구성되는 군도였다.
(호사카 유지, 「고종과 이규원의 우산도 인식 분석」中)
적갈색 연질토기의 지속 기간이 길다는 것은 그만큼 타날문이 시간과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변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발생 순서만을 놓고 보면 대체로 고식 와질토기 단계에는 승석문만 타날되다가 고식과 신식와질토기가 공존하는 2세기 중반 무렵 격자문이 출현하고 3세기 전반부터는 이들 타날문 외에 새로이 평행문이 등장하였으며 7세기 이후에는 평행문이 타날문의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울릉도의 적갈색 연질토기는 정질과 조질을 막론하고 경질토기와 함께 육지의 신라토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토기라고 우선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우병철, 「신라 철제 무기로 본 동해안 고분 축조집단의 군사적 성격」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