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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65707295
· 쪽수 : 204쪽
· 출판일 : 2018-12-12
책 소개
목차
1~29장
문고판에 부치는 글 - 번개의 위치
해설 - 치비는 프랑스의 하늘을 날았다
리뷰
책속에서
또 다른 특징은 집주인 할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그 아이는 미녀야.
라는 것이다. 수많은 고양이를 쫓아내온 할머니의 말이니 객관성이 있다.
(…)
공놀이를 좋아하는 치비는 점차 제 쪽에서 먼저 찾아와 그곳에 사는 자에게 함께 놀아달라고 조르게 되었다. 방에 발을 아주 조금만 들이밀고 뚫어져라 상대를 응시한 뒤 일부러 홱 몸을 돌리며 뜰로 불러내는 것이다. 응해줄 때까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울지도 않은 채 유혹을 되풀이했다. 대부분 아내 쪽이 하던 일도 내던지고 신이 나서 샌들을 발에 꿰곤 했다.
실컷 놀고 나면 치비는 방에 들어와 쉬었다. 곡옥曲玉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처음 소파에서 잠들었을 때, 집 자체가 이 광경을 꿈꿔왔다고 여겨질 만큼 깊은 기쁨이 찾아왔다.
─딸랑이, 안 오네?
아내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딸랑딸랑 하는 소리가 들린다. 왔다, 라고 생각했을 때는 대부분 번개골목의 두 번째 모퉁이쯤에서 옆집 현관을 나선 치비가 부지 경계의 철조망 뚫린 틈새를 폴짝 빠져나온 참이다. 그로부터 우리 집 건물을 따라 마루 쪽으로 돌아서 툇마루에 훌쩍 뛰어올라 어른 무릎 높이의 창문 문살에 양발을 짚고 고개를 길게 빼며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겨울로 접어들었다. 서서히 치비는 살짝 열어둔 창문 틈새로, 마치 작은 물길이 거듭거듭 완만한 비탈을 적시고 뻗어나가듯이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 일종의 운명이라고 할 것까지 그 물길에 함께 따라와 있었다.
이사하고 반년째가 되는 1987년 초봄의 어느 날, 알루미늄 새시 창문을 활짝 열자 남풍이 밀려들었다. 싱크대 창문은 물론이고, 방 두 개의 동편 미닫이 유리문, 거기에 식당 출창이며 화장실 창문까지 차례차례 활짝 열어나가면 집 안은 순식간에 바람을 품은 동굴이 되어 날뛰기 시작한다.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빨래 너는 뜰 쪽으로 멍한 시선을 던지자 가느다란 팔 두 개가 얽힌 모양의 겨우살이가 툭 부러져 떨어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옆집에서 무성하게 번져 넘어온 거대한 느티나무가 둥치와 가지뿐인 온몸을 거친 바람에 씻기고 있었다. 비스듬히 달린 큼직한 천창에서는 햇빛 몇 줄기가 꽂혔다가 사라지고, 그 빛 사이사이에 섞이듯이 매화 꽃잎이 흩날렸다. 바람에 날려간 작은 책상 위의 종이쪽은 내려앉은 곳에서 마치 저만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다시 날아올라 어딘가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