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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6551101
· 쪽수 : 376쪽
책 소개
목차
목차가 없는 도서입니다.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머니는 나와 인석을 번갈아보며 손님이 왔다고 입을 쉬지 않았다. 지나친 환대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에 반해 인석은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가 친구한테 인사도 안 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받았을 충격을 나는 가늠할 길이 없다. 하반신이 마비된 그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떤 상태일까를 상상해봤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수사기관에 잡혀가 두들겨 맞은 사람 소문은 더러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한 사람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란 서인석이 처음이었다. 잠 안 재우기, 물 먹이기, 발가벗기고 군홧발로 짓밟고 각목으로 때리기, 통닭구이처럼 매달아 때리기, 전기 고문 따위 별의별 고문을 귀동냥으로 알고 있기는 했다. 서인석이 그 고문을 당하고 하반신이 마비될 줄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병상에 누운 서인석을 보면서도 여전히 실감을 못 했다.
내가 아는 고등학교 동창은 그의 집안은 물론 형님 처가까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서인석이 관여했던 ‘자유’지 사건으로 수배 중인 동창 녀석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은 식구들을 하나하나 잡아들였다. 신문 보급소를 운영하던 부친은 보급소 문을 닫고 몸져누웠다. 상품 포장용 종이 상자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그의 형은 세무조사를 받고 회사 문을 닫고 말았다. 동창 녀석의 집안을 말아먹은 경찰은 동창 형님 처가 대문에 순찰함을 설치했다. 경찰 감시를 견디다 못한 처가에서는 이혼을 요구했고, 동창의 형님은 결국 결혼 생활이 파탄 나고 말았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오인희 집 주소를 경찰에 밝히고 말았다. 변변한 저항도 못 하고 말이다.
이쪽으로 발을 내딛으면 학교 앞잡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고, 저쪽으로 발을 뻗자니 학교 당국엔 눈엣가시가 될 게 틀림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빌어먹을, 강당까지 가는 복도는 왜 이리 어두운지. 교수대로 향하는 사형수 심정이 이럴까. 나는 복도를 홀로 걸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개가 되지 않는 길일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심판대에 선 내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학년들은 박수를 보내왔다. 눈이 부셨다. 요란한 박수, 형광등 불빛, 일학년들 얼굴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기운이 넘치는 일학년들은 다투어 물음을 쏟아냈다. 학생과장이 머라 캅니꺼? 우릴 마카 잘라삐리겠다고 협박하던가예? 우리 내쫓을라꼬 힘써달라 쿱디꺼?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질문을 퍼부어댔는데 두려움에 떨거나 겁먹은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농성장만 아니라면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