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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러시아소설
· ISBN : 9788966809622
· 쪽수 : 288쪽
책 소개
목차
스펙토르스키 ···················1
이야기 ·····················109
부록 ······················243
해설 ······················251
지은이에 대해 ··················274
옮긴이에 대해 ··················280
책속에서
세상엔 실제로 일어난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법,
더군다나 뛰어난 점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이야기가.
그러한 이야기에 관한 기사들이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 이야기에 파고들지 않았을 터.
그 기사들은 모두 과거에 관한 것이었고
과거의 일부분을 놀랍게 비추었다.
나는 현미경의 대물렌즈를 통해 바라보듯, 있는 그대로
<스펙토르스키>를 쓰기 시작했다.
주인공을 위해 특별한 것을 제시하지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즉시 시작하지도 않을 터.
하지만 나는 산더미처럼 많은 빛에 대해 썼다.
그는 멀리, 바로 그 빛 가운데서 내 앞에 보였던 것이다.
음식 창고의 작은 등잔만이 깜박이는 어스름에 대해 썼다.
이 어스름은, 우리 머리칼이 우리가 모르는
걸작(傑作)에 대한 소식에 놀라 꼿꼿이 설 때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일상처럼 여겨진다.
밤에 모스크바의 기울어진 가로등 갓이
어떻게 가로등 초점에 떨어진, 애수에 찬 비와 더불어
전율하며 먼 곳, 굴에서 굴로
이끌리는지에 대해 썼다.
어떻게 빗방울이 여행 소식을 전하는지에 대해,
모든 마차가 못 하나에 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는 편자로
밤새 내내 또각또각 말발굽 소릴 내며 때론 여기, 때론 저기,
때론 저 현관으로, 때론 이 현관으로 가는지에 대해 썼다.
날이 밝는다. 가을, 잿빛, 노쇠함, 흐림.
화분들과 면도기들, 솔들, 지진 머리 마는 컬용 종이들.
삶은, 닳아빠진 4륜 무개 마차가 덜커덕거리며 갈 때쯤의
밤처럼 지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납빛 천장. 새벽. 물에 잠긴 마당들.
아주 많은 양철 지붕들.
하지만 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느 날 꿈에 세계가 나타나
뚫고 나왔던 때의 그 집, 그 문, 그 어린 시절은.
벽장 속에 있는 어느 한 소녀의 갑작스런 외침.
때려 부순 벽장문, 움직임, 눈물, 울림,
그리고 헐벗은 계단이 깃발로 펄럭이고
억압받았던 소망이 피어오르고 있는 마당.
괴로워하며 끝없이 깊은 치욕을 앞치마에
파묻곤 했던 그녀가 이제 난폭해져
지극히 무한하고 공공연한 귀족 특권의
파괴로 생긴, 구멍 난 담장으로 나는 듯 달려간다.
날들, 순간들, 날들. 하나로 통합돼 이뤄진 세상의 뒤집힘으로
사건은 갑자기 벽 뒤에서 사라진다.
그대는 벽 뒤의 사건으로 압제와 허위가
얼어붙어 죽게 될 것으로 여긴다.
동시에 다음이 밝혀진다: 세상에
혈연관계의 작은 흔적이 없는 유골은 없다는 것이:
삶과 연대해서 공동생활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인
마당과 아낙네, 갈까마귀와 장작이 각각 그렇다.
바로 여기 노을은 딸의 치욕을 잊는다.
노을은 뾰족구두 뒤축으로 창을 쳐부순 후
날아서 폭도의 손으로, 폭도의 손 위
구름 너머로 이동한다.
아들인 폭도의 옷깃이 노을 뒤에서 재빨리 사라진다.
여기 폭도에게 남는 건 물질적 수익이 아니다.
지평선 따라 펼쳐진 하늘은, 엉긴 우유 같은 눈이 지붕에
쏟아진 모든 야영 천막처럼 자리를 뜬다.
그대는 혼자 있다. 재앙은 다시 문을 두드릴 것이다.
야영 천막에 있던 자들에 의해 남겨진 기록 문서 하나.
그 내용은 그대와 그대의 삶은 낡은 것이며
혼자 있는 건 사치스런 로코코식이라는 것.
그러자 그대는 소릴 지르네. 농담하는 게 아니다! 폭력이다!
그대도 그들처럼 살았다고. 하지만 평가는 이미 결정돼 있다:
역사의 의미는, 우리가 무얼 지니고 있었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홀랑 벗겨진 채로 방치되었나에 있다고.
별안간 새벽노을이 마른 건초처럼 단번에 확 불붙더니 또 그렇게 갑자기 노을 전체가 건초처럼 다 탔다. 기포 낀 볼록 유리 위를 파리들이 기어갔다. 가로등과 안개는 짐승마냥 서로 하품을 주고받았다. 노을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이 온통 희미했던 날도 곧 밝아졌다. 이 순간 세료자는 이제껏 누군가를 사시카만큼 열렬히 사랑한 적이 없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때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광경을 보았다. 반드시 붉은 빛깔의 고기 얼룩이 드리우는 자갈 도로가 좀 더 멀리 떨어진 묘지 쪽 어딘가로 향해 있는 것을 말이다. 그 도로에 있는 조약돌은 관문 근처의 돌처럼 보통 돌보다 더 굵고 희귀하다. 가축을 실은 칸도 그냥 텅 빈 칸도 있는 화물칸들이 자갈 도로를 가로질러 삐져나왔다 들어가고 삐져나왔다 들어가면서 조용히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갑자기 전복(顚覆)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화물칸들의 움직임이 뭔가로 인해 뒤바뀌고 도로 깊숙한 곳에서는 길이 끊긴 도로 끝 부분이 솟아난다. 이것은 텅 빈 무개 화차들이 1베르스타씩 서로 떨어진 채, 화물칸들이 가는 방향으로 지나가며 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 무개 화차들은 건널목 근처에서 사람들과 달구지가 만들어 낸 촘촘한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곳 건널목 근처에는 엉겅퀴와 미나리아재비가 있었는데, 타는 냄새가 없었다면 들쥐 냄새마저 풍겼을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콧물투성이 사시카가 여섯 살 난 말괄량이처럼 활기를 띠며 분주히 돌아다닌다. 마침내 검은 기관차가 모든 차량보다 뒤처져 증기를 내뿜으며 다가와 객차를 봤는지, 객차가 지나가지 않았는지 묻는 듯하더니 이윽고 도로에 있는 이들을 뒤로하고 급히 지나간다. 바로 여기서 건널목 횡목이 위로 올라가고 거리는 곧은 화살처럼 사방으로 뻗어 간다. 또한 바로 여기서 움직이는 짐마차와 대금 치르는 사람들이 마주 보며 양방향에서 다가오더니 서로에게로 침투한다. 증기 기관차의 연기는 괴물의 따뜻한 위(胃)처럼, 그리고 세 번 감은 풀 한 포대처럼 이곳 자갈길 한가운데로 쿵하고 떨어진다. 이 연기는 바로 도시 외곽 빈곤 지대에서 식량으로 먹는 간(肝) 같다. 사시카는 당황한 채, 차 제품과 식민지의 상품, 판매 중인 궐련과 담뱃잎, 그리고 양철 지붕과 경찰들에 드리운 이 무시무시한 연기를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