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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集註 備旨 1

孟子集註 備旨 1

김경국, 박상택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5-01-28
  |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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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子集註 備旨 1

책 정보

· 제목 : 孟子集註 備旨 1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유교철학/주역 > 맹자
· ISBN : 9788968491900
· 쪽수 : 364쪽

책 소개

'四書集註大全'의 소주(疏註)들을 집대성한 「原本 備旨」본을 국내 최초로 현토(懸吐)와 주석 작업을 시도한 학술저작이다. 아울러 저자는 중국 고문(고대산문) 전공자로서 기존의 국내 출판본은 물론, 중국의 역대 주해서들을 널리 참조함으로써 역주의 객관적인 신뢰성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목차

≪孟子≫ 解題 15
孟子集註 序說 29
孟子集註 49
梁惠王章句(上) 50
[1ㆍ1] 50
[1ㆍ2] 63
[1ㆍ3] 73
[1ㆍ4] 92
[1ㆍ5] 101
[1ㆍ6] 113
[1ㆍ7] 122
梁惠王章句(下) 184
[2ㆍ1] 184
[2ㆍ2] 201
[2ㆍ3] 208
[2ㆍ4] 227
[2ㆍ5] 248
[2ㆍ6] 265
[2ㆍ7] 272
[2ㆍ8] 286
[2ㆍ9] 291
[2ㆍ10] 297
[2ㆍ11] 304
[2ㆍ12] 316
[2ㆍ13] 324
[2ㆍ14] 327
[2ㆍ15] 333
[2ㆍ16] 342
부록
1. 司馬遷의 《史記ㆍ孟子荀卿列傳》 353
2. 趙岐의 《孟子題辭》 356
3. 索引 359

저자소개

김경국 (옮긴이)    정보 더보기
全南大 中文科 卒 中國 北京大學 文學博士(中國古典散文) 中國 安徽大學 兼職敎授 誠齋 奉奇鍾先生에게 師事 中國人文學會 會長 歷任 全南大學校 中國學科 敎授 (社)湖南古文獻硏究院 院長 저역서 《桐城派姚門五大弟子硏究》(中), 《桐城派與明淸學術硏究》(中), 《石田集 譯註》, 《大學章句備旨 譯註》, 《中庸章句備旨 譯註》, 《論語集註備旨 譯註(Ⅰ,Ⅱ,Ⅲ,Ⅳ)》, 《孟子集註備旨 譯註(Ⅰ,Ⅱ,Ⅲ,Ⅳ,Ⅴ,Ⅵ)》,《白坡集 譯註》,《答問類編 譯註(Ⅰ)》, 《中國, 中國文化》 등 논문 〈‘文心雕龍·風骨’篇義析論〉, 〈方苞的思想與古文理論硏究〉, 〈劉大櫆的思想與古文理論硏究〉, 〈桐城派的集大成者-論姚鼐及其古文理論〉, 〈論曾國藩的古文理論〉 外 수십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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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택 (지은이)    정보 더보기
全南大學校 中語中文學科 卒 光州 古典講讀會에서 漢學硏究에 從事 現: 羅州 榮山浦高等學校 漢文敎師 現: (社)湖南古文獻硏究院 理事 저역서 ≪漢文春香傳解≫, ≪農巖集抄解≫, ≪晩翠集雜著解≫, ≪石田集≫,≪白坡集≫ ≪大學章句 備旨≫, ≪論語集註 備旨(Ⅰ)(Ⅱ)(Ⅲ)(Ⅳ)≫, ≪中庸章句 備旨≫, ≪孟子集註 備旨(Ⅰ)(Ⅱ)(Ⅲ)(Ⅳ)(Ⅴ)≫ 등 表紙題字 / 翠亭 任春植 개인전 4회, 초대전 5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 역임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전라남도 미술대전 무등미술대전 운영위원및 심사위원 역임 현: 취정서예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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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宋代의 巨儒 朱熹(1130~1200)는 중국 儒學의 집대성자이자 우리나라 性理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朱熹가 일생동안 정리하고 연구한 儒家經傳들은 주로 五經과 四書 및 北宋의 주돈이周敦?(1017~1073)ㆍ정호程顥(1032~1085)ㆍ정이程?(1033~1107)ㆍ소옹邵雍(1011~1077)ㆍ장재장재(1020~1077) 등의 著作들이다.
이들 儒家經傳들에 대해 朱子는 “四子는 六經의 입문서이고, 《近思錄》은 四子의 입문서이다. 四子, 六經之階梯. 《近思錄》, 四子之階梯.”(《朱子語類》 卷105)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四子는 ‘四書’를, 六經은 ‘五經’을, 《近思錄》은 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북송 諸子들의 학설을 공동으로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를 각각 의미한다. 朱子의 이 말은 곧 四書의 지위가 북송 諸子들의 저작보다 높고 五經의 지위가 四書보다 높기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近思錄》에서 시작하여 四子에 이르고, 다시 四子로부터 五經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이다.
六經의 입문서인 ‘四書’는 곧 《大學》ㆍ《論語》ㆍ《中庸》ㆍ《孟子》 등을 말한다. 이 四書의 중요성에 대해서 朱子는 그의 <書臨?所刊四子後>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河南 程氏는 사람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반드시 먼저 《大學》ㆍ《論語》ㆍ《中庸》ㆍ《孟子》 등의 책에 힘을 쏟은 후에 六經을 접하도록 했다. 이는 대개 그 난이難易와 원근遠近과 대소大小의 차례가 진실로 이와 같아야 어지럽지 않기 때문이다. 河南程夫子之敎人, 必先使之用力乎 《大學》ㆍ《論語》ㆍ《中庸》ㆍ《孟子》 之書, 然後及乎六經. 蓋其難易, 遠近, 大小之序, 固如此而不可亂也.” 이런 이유로 朱子는 二程사상을 계승하여 《大學》ㆍ《論語》ㆍ《孟子》ㆍ《中庸》 등에 심혈을 기울여 註解를 함으로써 《四書章句集註》를 완성한 것이다.
四書를 공부하는 순서에 대해서 程子는 “《大學》은 孔氏의 遺書이며 처음 배우는 사람이 德에 들어가는 문이다. 大學, 孔氏之遺書, 而初學入德之門也.”라고 했고, 朱子는 이를 계승하여 “《大學》을 처음과 끝을 완전히 관통하여 모두 의심나는 바가 없게 된 후에 가히 《論語》와 《孟子》에 미칠 수 있고, 또 의심나는 바가 없게 된 후에 가히 《中庸》에 미칠 수가 있다. 大學首尾貫通, 都無所疑然後, 可及語孟, 又無所疑然後, 可及中庸.”(大全註疏)라고 했다. 곧 《大學》에서 학문의 처음과 끝을 꿰뚫어 말하였기 때문에 《大學》을 먼저 읽고, 이어서 《論語》와 《孟子》를 읽어야만 학문의 길에 쉽게 들어갈 수 있으며, 나아가 학문의 大體가 갖추어져 나머지 공부가 저절로 된다는 말이다. 저자는 오래전부터 經書硏究와 講讀作業에 종사해 오면서 《四書集註》와 《四書備旨》에 대한 註解 작업을 추진해 왔는데, 그 결과 지난 2009년에 처음으로 《大學章句 備旨》를 출간하였고, 이어서 《論語集註 備旨(Ⅰ)》(2010)ㆍ《論語集註 備旨(Ⅱ)》(2011)ㆍ《論語集註 備旨(Ⅲ)》(2012)ㆍ《論語集註 備旨(Ⅳ)》(2013)ㆍ《中庸章句 備旨》(2014)를 세상에 선보였으며, 이번에 다시 《孟子集註 備旨(Ⅰ)》을 출간하게 되었다.
譯註의 底本으로 삼은 《四書補註備旨》는 朱子의 《四書集註》에 明代 등림鄧林이 章節마다 要旨를 찬술撰述하고, 등욱鄧煜이 編次하여 《四書備旨》라고 명명한 다음, 다시 淸代 기문우祁文友의 重校와 두정기杜定基의 補註를 거쳐 增訂하여 완성된 것이다. 書名을 〈備旨〉라고 말한 것은 聖賢의 立言에 매 章마다 각각 매 章의 宗旨가 실려 있기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潛心硏究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끝으로 본 書의 출간을 위해 그 동안 자상한 가르침을 베풀어주신 弦齋 金永雄 선생님, 본문의 험난한 한자변환 작업을 해준 李鎬俊 선생님, 원고 교정에 힘써준 李恩珍 선생님, 表紙題字를 써주신 翠亭 任春植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울러 본 書의 출판에 도움을 준 전남대학교 당국과, 편집과 출판을 위해 노고를 다해주신 전남대학교출판부 관계자 분들께도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乙未年 立春節
著者 謹識


1. 四書에 대하여
四書란 《論語》ㆍ《孟子》ㆍ《大學》ㆍ《中庸》의 네 가지 儒學經傳을 말한다. 唐代 이전의 儒學이 五經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던 것에 비하여, 宋代 이후의 儒學은 四書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 四書는 南宋 性理學의 大家인 주희朱熹(1130~1200)가 《論語》ㆍ《孟子》ㆍ《大學》ㆍ《中庸》의 네 가지 책을 모아 유학의 기본 경전으로 정하고, 이것들에 대해 註解를 달아 《四書集註》를 撰함으로써 그 지위가 확립되었다.
이 중에서 《大學》과 《中庸》은 본래 《禮記》 49篇 중의 한 篇에 불과했는데, 이에 대해 朱熹는 《大學》이 孔子(B.C.552~479)의 제자인 曾子(B.C.505~435)가 지었고, 《中庸》은 孔子의 손자인 子思(B.C.483~402)가 지었다고 보고, 이것들을 孔子의 언행을 기록한 《論語》와 孟子(B.C.372~289)의 언행을 기록한 《孟子》 등과 함께 四書라고 命名하였다.
이들 四書중에 《論語》는 모두 20篇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論語》의 편찬자에 대하여 漢代의 劉向(B.C.77~6)이 최초로 그의 《別錄》에서 “孔子의 제자들이 훌륭한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고, 後漢의 鄭玄(127~200)은 그의 《論語序》에서 ‘《論語》는 仲弓ㆍ子游ㆍ子夏 등이 撰定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唐代의 柳宗元(773~819)은 《論語辨》에서 孔子와 曾子의 나이 차이 및 《論語》에는 오직 曾子와 有子만이 존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아 《論語》의 편찬자가 曾子의 문인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子思의 무리들이라고 주장하였다.
朱熹는 이러한 주장들을 이어받아 《論語序說》에서 程子의 말이라 하면서 《論語》는 有子와 曾子의 문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淸代의 최술崔述(1740~1816)은 《論語餘說》에서 《論語》 속의 의심스런 내용들에 대한 고증을 통하여 《論語》 20篇 중 前 10篇만이 有子와 曾子의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고, 後 10篇은 후인들이 續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무튼 《論語》가 한 시기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한 듯하다.
《孟子》는 司馬遷(B.C.145~86?)의 《史記ㆍ孟子荀卿列傳》에 의하면 孟子가 자신의 제자인 萬章의 무리들과 함께 《詩經》과 《書經》을 정리하고, 仲尼의 뜻을 조술祖述하여 지은 것으로 모두 7篇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漢書ㆍ藝文志ㆍ諸子略》에 《孟子》 11篇이 실려 있고, 응소應?(約 153~196)의 《風俗通義ㆍ窮通》 편에 孟子가 《中外》 11篇의 책을 지었다고 하였다. 한편 《孟子》에 대한 최초의 주해서인 조기趙?(約 108~201)의 《孟子題辭》에 孟子가 ‘7편의 책을 지었다.’고 했으니, 〈外書〉 4편은 後人들의 僞書임이 확실하다.
《中庸》은 본래 《禮記》의 제31篇에 들어있던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史記ㆍ孔子世家》에는 《中庸》의 작가를 孔子의 손자인 子思라고 했고, 二程子는 《中庸》을 ‘孔門에 전해 내려오는 심법心法’이라고 하였다. 朱熹는 이를 계승 발전시켜 《中庸章句》와 《中庸或問》을 지어서 《中庸》의 의미를 천명함과 동시에 이를 四書의 범주 안에 포함시켰다.

2. 《孟子》의 생애
맹자는 이름은 가軻이며 추鄒(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나라 사람이다. 맹자의 생몰년生沒年ㆍ자字ㆍ사승관계師承關係ㆍ선조先祖 등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맹자의 생몰년生沒年은 확실치 않다. 특히 논란이 많은 맹자의 생년 설에 대해 양택파楊澤波 교수는 그의 《맹자평전孟子評傳》에서 모두 아홉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곧 元나라 장수張?의 B.C.444年說, 나근택羅根澤(1900~1960)의 B.C.438年說, 明나라 진사원陳士元(1516~1597)의 B.C.401年說, 明末 황종희黃宗羲(1610~1695)의 B.C.397年說, 전목錢穆(1895~1990)의 B.C.390年說, 淸나라 위원魏源(1794~1857)의 B.C.385年說, 淸나라 송상봉宋翔鳳(1779~1860)의 B.C.382年說, 淸나라 장용臧庸(1767~1811)의 B.C.376年說 및 대다수 학자들이 인정하는 B.C.372年說 등이 있다. 몰년沒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孟氏譜》의 기록에 근거하여 맹자의 나이 82세에 해당하는 B.C.289年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처럼 맹자의 생년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있으나 맹자 자신이 “孔子(B.C.552~B.C.479)’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백여 년이 되었다”(《孟子ㆍ盡心下》)라고 말한 내용에서 그가 살았던 시기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가 있다.
맹자의 字는 사마천司馬遷과 東漢의 조기趙岐 당시에 이미 자세히 상고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趙岐는 그의 《맹자제사孟子題辭》에서 “‘맹孟’은 姓이고 ‘子’는 남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孟, 姓也, 子者, 男子之通稱也.”라고 했으며, 또한 “이름은 가軻이고, 字는 들어본 적이 없다. 名軻, 字則未聞也.”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위진魏晉시대 이후에야 맹자의 字에 대한 언급이 시작되었다. 먼저 왕숙王肅(195~256)은 그의 《성징론聖徵論》과 《공총자孔叢子》에서 맹자의 字를 모두 ‘자거子車’라고 말하였다. 또한 진晉나라 부현傅玄(217~278)의 《부자傅子》에는 맹자의 字를 ‘자여子輿’라고 말함으로써 맹자의 字에 대해서 모두 ‘자거子車’ㆍ‘자여字輿’ㆍ‘자거子居’라는 주장들이 생겨났다.
대체적으로 맹자는 40세 이전까지는 제자의 교육에 전념하였고, 40세 이후에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제齊ㆍ송宋ㆍ등?ㆍ위魏ㆍ노魯ㆍ설薛나라 등을 찾아 유세遊說를 하였으며, 70세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저술에 힘썼다. 맹자의 유세 행렬에는 수 십 승乘의 수레가 뒤를 이었으며 따르는 제자도 수 백명이나 되었다. 맹자의 주요 제자는 모두 14명에 불과했고, 그 중에서도 노魯나라 사람인 악정자樂正子와 제齊나라 사람인 공손추公孫丑와 만장萬章은 맹자의 고제高弟들이다.
맹자는 약 25년간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 머물렀던 나라는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였다. 당시 齊나라의 도읍인 직하稷下에는 천하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는데, 세상에서는 그들을 직하선생稷下先生이라고 불렀다. 맹자는 齊나라의 위왕威王을 만나 요순堯舜의 道를 설명하였고 위왕威王도 맹자를 경卿으로 우대하였다. 하지만 위왕威王이 政事를 소홀히 하자 맹자는 齊나라를 떠나 추鄒나라로 돌아오고 만다. 그 후 다시 齊나라에 가서 선왕宣王을 만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폈으며, 선왕宣王이 맹자를 빈사賓師로 대우하였으나 벼슬을 내리지 않으므로 결국 다시 鄒나라로 돌아왔다.
한편 맹자는 노魯나라의 평공平公을 만나려 했으나 간신들이 모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다시 宋나라를 찾아갔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맹자가 방문한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던 곳은 소국인 등?나라였다. 등?나라 문공文公은 맹자를 상궁相宮에 머물도록 하면서 자신도 맹자의 가르침을 받아 인정仁政에 힘쓰려고 했으나 등?나라가 소국이었기 때문에 맹자의 사상을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맹자는 만년에 이르러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와 더불어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맹자孟子》 7편을 저술하고 8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3. 《孟子》의 저자
맹자의 저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정론定論이 없으나 대략 다음 세 가지 주장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맹자孟子》는 맹자 자신이 직접 저술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는 최초의 《孟子》 주해서를 쓴 조기趙岐(약 108~201)의 《맹자제사孟子題辭》의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趙岐는 “이 책은 맹자가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총괄해서 《孟子》라고 부른다. 此書, 孟子之所作也. 故總謂之孟子.”라고 했고, 또한 “이에 물러나 고제高弟인 공손추公孫丑ㆍ만장萬章의 무리들과 의심난 것을 묻고 답했던 것을 모은 다음, 또한 스스로 법도에 맞는 내용들을 찬술하여 《孟子》 7편을 지었다. 於是, 退而論集所與高第弟子公孫丑萬章之徒, 難疑答問, 又自撰其法度之言, 著書七篇.”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송대 주희朱熹(1130~1200)와 淸代 염약거閻若據(1636~1704)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둘째, 《맹자孟子》는 맹자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맹자 사후 그의 제자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의 무리들이 편찬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는 唐나라 한유韓愈(768~824)와 장적張籍(765?~830?), 宋나라 소철蘇轍(1039~1112)과 조공무晁公武(1144?)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 청나라 최술崔述(1740~1816)의 《맹자사실록孟子事實錄》 등의 기록에 근거한다. 한유는 그의 〈答張籍書〉에서 “맹가孟軻의 책은 맹가孟軻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다. 맹가孟軻가 이미 죽은 후 그의 제자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가 서로 함께 맹가가 했던 말들을 기록했을 뿐이다. 孟軻之書, 非軻自著. 軻旣歿, 其徒萬章公孫丑相與記軻所言焉耳.”라고 말했다.
셋째, 《맹자孟子》는 맹자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저술하였으며, 제자들의 글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는 사마천의 《史記ㆍ孟子荀卿列傳》의 기록에 의거하고 있는데, 사마천은 “물러나 만장萬章의 무리들과 함께 《시경詩經》ㆍ《서경書經》을 정리하고 孔子의 뜻을 계승하여 《맹자孟子》 7편을 지었다. 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라고 하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사마천의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맹자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孟子》를 완성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반면에 맹자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孟子》를 지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앞서 趙岐의 주장은 사실상 후자의 해석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견해 중에서 세 번째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맹자가 만년에 제자들과 함께 《시경詩經》ㆍ《서경書經》을 연구하면서 학설을 토론했으므로 당연히 이에 대한 기록이 있을 수 있고, 여기에 제자들이 보충과 정리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朱熹 또한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孟子》 7편은 맹자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 졌지만, ‘맹자는 性善을 주장하면서 반드시 요순堯舜을 들어 말하였다.’고 하면서, ‘아마도 그것은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맹자》의 작자에 대한 주장은 세 번째 주장이 가장 타당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4. 《孟子》의 구성
《孟子》의 편수에 대해서는 ‘7篇’ 說과 ‘11篇’ 說이 있다. 사마천의 《史記ㆍ孟子荀卿列傳》에는 七篇이라 했고, 반고班固(32~92)의 《漢書ㆍ藝文志》에는 11편이라고 했는데, 모두 편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응소應邵(약 153~196)의 《풍속통의風俗通義ㆍ궁통窮通》 편에서도 맹자가 “《중외中外》11편의 책을 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기趙岐는 《孟子題辭》에서 《史記》에 실리지 않은 이들 4篇을 〈外書〉라고 주장하면서 말하기를 “또한 《外書》 7편이 있는데, 곧 〈性善辯〉ㆍ〈文說〉ㆍ〈孝經〉ㆍ〈爲政〉 편이다. 하지만 그 글이 박대정심博大精深하지 못하고 내편內篇과 비슷하지 않으니, 《孟子》의 본모습이 아니며 후세 사람들이 모방하고 의탁해서 지은 것 같다. 又有外書四篇, 性善辯文說孝經爲政. 其文不能宏深, 不與內篇相似, 似非孟子本眞, 後世依放而托之者也.”라고 하였다.
사실 《孟子》의 모든 편명은 《論語》와 마찬가지로 매 편 앞머리의 두 세 字 중에서 취한 것으로 본문의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하지만 이 4편의 편명은 모두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7편의 편명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들 4편의 편명은 모두 맹자사상이 깊이 반영된 것으로, 특히 〈性善〉과 〈爲政〉은 맹자사상의 핵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孟子》는 본디 7편이었는데, 뒤에 後人이 지은 4편이 더해져서 11편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기趙岐는 《맹자孟子》 7편이 모두 261章 34,685字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며, 청대 초순焦循(1763~1820)의 《孟子正義》도 조기趙岐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주희朱熹의 《孟子集註》에서는 260章으로 삼고 있으며 대부분의 판본들도 이를 따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조기趙岐가 〈盡心 上〉 章의 “孟子自范之齊”와 “王子宮室”을 두 章으로 나누었지만 朱熹는 이를 한 章으로 삼았을 뿐 내용상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5. 《孟子》의 사상
(1) 孟子의 천인관天人觀
‘천인관天人觀’은 선진제자先秦諸子들의 공통된 화제 중의 하나였다. 맹자의 天人觀은 기본적으로 孔子의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고 위로 천명天命을 안다. 下學而上達”(《論語ㆍ季問》)라고 하는 사상, 곧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미치는 길을 계승한 것이다.
맹자는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本性을 알게 되며, 그 본성本性을 알면 천명天命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본성本性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바이다.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盡心 上〉)라고 하였는데, 이를 도덕道德과 의리義理의 측면에서 보면 맹자의 ‘天’은 일종의 인간을 초월한 외적인 존재이며, 만물을 주재하는 무형의 힘이다. 또한 맹자는 “德있는 군자가 공업功業을 세워 자손에게 전하는 것은 이를 대대로 계승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성공 여부는 천명天命에 달려 있다.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夫成功, 則天也.”(〈梁惠王 下〉)라고 했고, “천도天道에 순종하면 살아남고 천도天道에 거스르면 망한다. 順天者存, 逆天者亡.”(〈離婁 上〉)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람이 ‘하늘을 섬겨야 한다. 事天’고 주장하였다.
맹자는 한편으로 하늘의 역량力量에 대해 무한한 경외심敬畏心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천인관天人觀에서 사람의 역할을 더욱 중시하였다. 이 점은 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외부로부터 나에게 녹아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디 지니고 있는 것이다. 仁義禮智, 非由外?我也, 我固有之也.”(〈告子 上〉)라고 주장에서 잘 알 수 있다. 또한 맹자는 ‘마음을 다하고(盡心)’ ‘본성本性을 알아야 한다(知性)’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단四端을 확충해 나가면 사람의 本性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하늘과 인간이 비록 상대적으로 독립된 존재이지만 맹자에게는 이미 융합적 추향趨向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孟子의 성선론性善論
성선론性善論은 맹자철학의 핵심사상이다. 人性 문제에 대해 열띤 논의가 벌어졌던 춘추전국시대에 맹자는 孔子의 “사람의 본성本性은 서로 비슷하나, 습성習性에 의해 서로 멀어지게 된다. 性相近也, 習相遠也.”(《論語ㆍ陽貨》)의 주장을 계승하여 고자告子와 인성문제人性問題를 두고 일대 논쟁을 벌였다.
고자告子는 인성人性이란 선善도 없고 불선不善도 없으며, 인의仁義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겼다. 또한 그는 인성人性을 사람이나 동물의 본능 혹은 욕망으로 간주하며, “타고난 것을 본성本性이라 한다. 生之謂性”와 “음식과 여색女色은 본성本性이다. 食色, 性也”라는 명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맹자는 정면으로 고자告子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여겼다. 곧 사람에게는 구복口腹과 의식衣食의 욕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선량善良한 본성本性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모두 남을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선왕先王에게 남을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남을 차마하지 못하는 政事가 있었던 것이다. 남을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남을 차마하지 못하는 政事를 행하면 天下를 다스리는 일이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쉬울 것이다.
사람들 모두에게 남을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모두 놀라고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한 것이 아니며, 향당鄕黨의 붕우朋友들에게 명예를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그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살피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仁의 실마리요, 수오지심은 義의 실마리요, 사양지심은 禮의 실마리요, 시비지심은 智의 실마리이다. 사람에게 이 사단四端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 可運之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公孫丑 上〉)

라고 말했다. 맹자는 사람마다 모두 천성적으로 ‘남을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不忍人之心’은 구체적으로 사단四端, 곧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사양지심辭讓之心’과 ‘시비지심是非之心’을 포괄하고 있다고 여겼다. 만일 사람에게 이러한 사단四端이 없으면 이는 금수禽獸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이 사단四端은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사람에게 사단四端이 있는 것은 마치 사지四肢를 갖추고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사람의 성선性善이란 타고난 것이지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3) 孟子의 仁政說
성선론性善論의 기초위에 맹자는 그의 정치사상을 주장했다. 맹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不忍人之心’이 있고, 선왕先王에게 ‘不忍人之心’이 있기 때문에 이에 ‘不忍人之政’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不忍人之心’으로 ‘不忍人之政’을 행하면 天下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쉽게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不忍人之心’은 곧 ‘선심善心’이며, ‘不忍人之政’은 바로 ‘인정仁政’을 말한다.
인정仁政은 바로 맹자 정치사상의 핵심이며, 공자의 인학仁學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맹자는 특히 백성의 존재를 중시하며 말하기를 “제후에게 보배 세 가지가 있으니, 토지와 백성과 政事이다. 만일 제후가 진주珍珠와 미옥美玉을 보배로 여긴다면 재앙이 반드시 그 몸에 미칠 것이다. 諸侯之寶三, 土地人民政事. 寶珠玉者, 殃必及身.”(〈盡心 下〉)라고 하였다. 곧 ‘백성’은 제후국의 세 가지 보배 중의 하나로서 만일 제후가 백성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반드시 그 몸에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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