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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지식인론과 문화비평

현대 중국의 지식인론과 문화비평

엄영욱, 김종현, 이종민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9-10-28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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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지식인론과 문화비평

책 정보

· 제목 : 현대 중국의 지식인론과 문화비평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근현대사(아편전쟁 이후)
· ISBN : 9788968496639
· 쪽수 : 288쪽

책 소개

현재 중국의 지식인론과 문화비평 그리고 디아스포라와 작가정신을 다루고 있다. 작금의 현실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인들의 사유와 심리 그리고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다.

목차

머리말 / 9

Ⅰ. 지식인론
마오쩌둥의 지식인관 고찰 / 11
중국 현대 격변기의 지식인 / 48
8,90년대 문혁소설을 통해 바라 본 중국 지식인의 의식 전환 / 74

Ⅱ. 문화비평
왜 다시 루쉰인가 / 109
루쉰의 시각으로 본 공자와 『논어』 / 158
21세기 중국의 문명국가론과 공자 / 201

Ⅲ. 디아스포라와 작가정신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체성 연구 / 245
양쿠이와 장혁주 비교 연구 / 265

저자소개

김종현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동아대학교 중국일본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중국현대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국립대만대학, 성균관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중국현대문학 현실주의 문예이론』 『새롭게 읽는 현대 중국』 과 함께 기타 저서와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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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박사. 한밭대·경성대 교수, 북경수도사범대학·홍콩영남대학 방문학자, <중국의 창> 편집인을 지내고, 전남대 동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 표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중국문명·중국문제·한중관계의 진실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이라는 불편한 진실-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흩어진 모래-현대 중국인의 고뇌와 꿈』, 『한국과 중국, 오해와 편견을 넘어』(공저), 『근대 중국의 문학적 사유 읽기』 등이 있고, 역서로 양계초 『구유심영록』·『신중국미래기』, 엄복 『천연론』(공역), 토머스 헉슬리 『진화와 윤리』 등이 있다. 시집으로 『길이 열렸다』, 『눈사람의 품』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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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욱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대학원에서 「魯迅文學의 現實主義 硏究」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전남대학교 국제학부 중문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회장과 한국차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정신계의 전사-노신』(2005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선정), 『중국근대문학사상연구』(공저: 2009년도 문광부우수학술도서 선정), 『중국문학의 여행』, 『동아시아의 생사관』(공저: 2009년도 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등 다수의 저서와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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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마오쩌둥의 지식인관 고찰
― 연안 정풍운동 시기 까지

1.
중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지식인 개인 또는 지식인 집단이 남긴 흔적은 다른 계층의 구성원에 비해서 파란만장한 질곡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역사 속에서 지식인은 역사를 이끈 주체로서의 화려한 영광과 칭송을 받기도 했지만, 견디기 힘든 비난과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20세기 초입 중국 현대사의 서막을 알렸던 신문화운동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든 사회적, 역사적, 이념적 가치를 둘러 싼 갈등의 한 가운데에 처해 있다.
중국의 현대사를 ‘계몽’과 ‘구망’의 이중 변주로 설명할 때 그 주요 동력이었던 지식인은 중국 혁명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교육의 대상, 사상개조의 대상으로 변하다가 급기야는 ‘십 년 대재난十年浩劫’이라고 비판 받는 문화대학명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인의 지위에 짙은 변화가 있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마오쩌둥이라는 한 인물의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조금 더 분명하게 얘기하자면, 마오쩌둥이 지식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느냐가 곧 지식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20세기 초기부터 그들의 운명이 그렇게 결정 지워졌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 중국 지식인들은 반봉건반식민지 상태에 처해 있는 중국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관해 다양한 경로를 놓고 고민을 하였고, 그 결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천 년 봉건의 역사를 단절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이념적 가치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이념적 가치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몸과 머리 일부에 남아 있는 착취자로서의 그림자를 지워야만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물론 착취자로서의 자기 모습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각성된 지식인은 이러한 자기 모습을 적극 변화시켜야 했으며, 그들은 혁명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참회의식을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 농민들로부터 노동의 가치를 배우고, 혁명의 진정성을 학습하였다. 오랜 역사 시기 동안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지식인이 자각적이고 주체적으로 피교육자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의 이러한 진정한 참회는 종교 행사로서의 참회와는 달랐다. 종교적으로는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고 참회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남을 인정받았지만, 적어도 중국혁명사 속에서의 지식인은 일회적 참회로 끝나지 않았다.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해야 했으며, 그 부정은 자기 비하까지 이를 정도로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연안에서의 정풍운동부터 시작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상개조운동은 지식인들에게 반복되는 자기반성과 학습이 요구되었다. 무훈전비판운동, 홍루몽연구비판운동, 후펑문예사상비판운동, 반우파투쟁, 반수정주의운동 등등 셀 수 없는 사상투쟁 속에서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상과 가치는 한없이 위축되었다. 지식인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당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지만, 실제적으로는 마오쩌둥의 요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끊임없는 주문을 하였으며, 마오쩌둥의 이러한 발언들이 매 시기 지식인에 대한 평가의 가장 주요한 척도로 작용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 개방의 노선이 채택된 1981년 11기 6중전회에서 결의한 「역사결의」에서는 마오쩌둥의 공과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대체적으로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중국의 건설 속에 보여 준 마오쩌둥의 공헌을 높이 평가 하면서도 그의 후반기에 이루어진 일련의 정책, 특히 문화대혁명의 발동이 그의 가장 두드러진 과오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과오는 단지 문화대혁명의 발동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의 과도한 주관주의, 종파주의와의 투쟁이 그러한 과오를 낳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과도한 투쟁은 지식인 문제에 더욱 집중되었는데, 특히 50년대 후반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지식인에 대한 과도한 부정적 판단은 많은 지식인 개개인의 비극적 운명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의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식인의 역량을 최소화 시켜버림으로써 사회발전의 퇴행을 가져오고 말았다.

2.
기록으로 남은 마오쩌둥의 지식인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1927년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1975년 국무회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정의하고, 중국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 속에서 그들의 역할을 규정하고 환기시키기 위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러한 그의 언론들을 크게 나누면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전과 이후의 발언으로 나눌 수 있으며, 조금 더 세밀하게 나누자면 1942년 연안 정풍운동과 「문예강화」 이전과 이후, 그리고 건국 이후에는 다시 1957년 반우파투쟁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모두 4단계 정도 분류할 수 있다. 이렇게 분류하는 데는 1942년 연안에서의 정풍운동, 건국, 반우파투쟁이 지식인에 대한 마오쩌둥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주요한 전환점이 되기 때문에 이 시기를 중심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식인에 대한 마오쩌둥의 언급 중 가장 일찍 출현한 것은 1927년이었다. 1925년 5ㆍ30 운동부터 시작되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한 ‘국민혁명’은 1927년 국민당 장개석에 의해 합작은 깨지고, 공산당은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다. 그 결과 1927년 광저우 코뮌이 12월 유혈진압 됨으로서 5만 8천의 당원을 보유했던 공산당은 1만이 채 되지 않은 지리멸렬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실패 이후 국제 코민테른에서는 이 실패의 책임을 중국 공산당에서 찾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지식인들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되었으며, 노동자들이 지도부에 더 많이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당내에서는 일시적으로 지식인들을 경시하고 배척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그 때 근거지와 수많은 지식인들과는 완전히 격리되었고, 중심 도시에 있는 사람들과도 격리되었다. 그래서 지식인 문제에 대해 또 다시 잘못을 저질러 지식인을 경시하고 지식인들은 그저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이 시기 당내의 지식인에 대한 이러한 풍조에 대해 매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상공인과 지식인에게 혁명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글에서도 “지식인이 만약에 혁명에 참가하기만 한다면, 노동자 농민 계급은 모두 그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재능에 따라 그에 상응한 업무를 분장 받을 것이다”고 선언함으로써 노동자 농민계급과 지식인 사이의 융합과 협력에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 뒤 1933년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중앙정부 주석의 명의로 기술인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낸다.

중화소비에트 중앙정부는 기술인원이 부족하여 현금으로 급료를 주는 인재를 초빙 하고자 합니다. 중국 내 전 지역에 있는 의사, 무선통신, 군사기술 인재 중에서 소비에트 혁명에 찬성하고 또 참여하고자 하는 자는 각 지역 공산당 조직이나 혁명적인 군중단체에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이 공고문을 보면 당시 공산당은 기술요원으로서의 지식인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고 그들의 동참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공고문과 함께 같은 해 10월 마오쩌둥이 주도하여 제정한 「토지투쟁 중에 발생하는 일련의 문제에 관한 결정(?于土地斗?中一些??的?定)」에서도 지식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지식인은 (독립된) 하나의 계급 성분으로 볼 수 없다. 지식인의 계급 성분은 그가 속한 계급에 의해서 결정된다.……모든 지주계급 출신의 지식인은 소비에트 법령에 복종한다는 조건 아래 소비에트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지식인은 교사, 편집인, 신문기자, 사무원, 작가, 예술가 등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며 지적 노동을 하는 노동자이다. 이와 같은 지적 노동자는 마땅히 소비에트 법률의 보호를 받는다.……최근 여러 지역에서 지식인을 무조건 배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지주 자산계급 출신 지식인에게 소비에트를 위해 복무하도록 하는 것은 소비에트 혁명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다. 그들이 소비에트를 위해 복무하는 동안 그들의 생활상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교사와 같은 일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1934년 1월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문화교육 방침과 임무(??埃文化?育方?和任?)」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혁명적 지식인을 육성하고, 문화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지주계급 출신 지식인에게 소비에트를 위해 복무하도록 하는 것은 소비에트의 문화정책 중 소홀히 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이 주도하는 당 중앙은 다양한 문건과 성명을 통해서 지식인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그 해 12월 공포된 「부농정책의 변환에 관한 결정」과 「최근의 형세와 당의 임무에 관하여」와 같은 문건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은 소비에트 혁명에 지식인들의 참여를 환영한다는 점을 보다 분명히 했다.

일본을 반대하고, 매국적 행위를 반대하는 모든 지식인은 그들이 과거에 국민당원이었거나 국민정부에서 일을 했던 사실을 불문하고 소비에트 정부의 우대를 받을 수 있으며, 그들에게 직업을 주어 실업을 면하게 하며, 그들이 문화, 교육, 예술, 과학, 기술 분야의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그 모든 혁명적 지식인, 문학가, 예술가, 과학자, 기술자, 신문기자(그들의 출신 성분이 지주, 부농 또는 자본가였음을 불문하고)들에게 소비에트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혁명노선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를 원한다면 그 누구든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혁명에 참여할 수 있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오쩌둥의 태도는 지식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고, 그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그 해 12월 어느 회의에서는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의 학생운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청년 학생이야말로 “민족 해방투쟁의 선봉”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에서의 그들의 권리를 다시 한 번 공개적으로 확인했다. 즉 “도시 소자산계급과 지식인, 그리고 반제반봉건의 강령을 옹호하는 자는 인민공화국에서 발언을 하고,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지식인에 대한 입장은 1936년, 1937년에도 연이어 이어졌다. 1936년 7월 에드가 스노우와의 대담에서 행한 그의 발언은 “소비에트 운동이 시작된 이래 우리는 지식인의 참여를 끊임없이 환영하고 있다. 자유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소비에트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지닌다”라고 말하고 있다. 1937년 3월과 4월에도 지식인에 관한 언급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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