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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72883838
· 쪽수 : 324쪽
· 출판일 : 2010-12-10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조금만 더 이리로 와봐."
히토미는 쇠파이프 위를 어기적거려서 신타 옆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파이프에 문질러진 샅에서 미지근한 물이 스며 나온 것처럼 느낀 것은. 그녀는 당황했습니다. 또 오줌을 지렸나 생각한 것입니다. 신타가 눈치채지 못하게 손을 뒤로 돌려 치마 속을 슬쩍 더듬어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자 방금 전 그 느낌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세게 문질러봅니다. 온수의 온도가 조금 높아진 것 같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온수가 샅에서 배 쪽으로 슬금슬금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허리를 앞뒤로 살살 움직여봅니다. 그 묘한 느낌이 자꾸 퍼져나갑니다. 쇠파이프를 보니 녹이 슬어 있습니다. 이것이 독인지도 몰라. 그렇게 두려워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모토코 오빠들은 벌거벗은 여자 사진이 실린 잡지를 돌려본다고 합니다. 벌거벗은 여자. 더욱 불가해합니다. 히토미가 치르는 의식에 벌거벗은 남자가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여자의 상상력이 필요로 하는 것과 남자의 망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르구나! 알몸 사진이라니!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거기서 떠오르는 기억은 예전에 들여다보았던, 아빠와 엄마가 한밤에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는 모습입니다. 알몸 사진은 진짜 여자가 없을 때 이용하는, 야구에서 말하는 대타 같은 걸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그녀는 다시 궁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남자의 딸딸딸과 나의 소중한 의식은 전혀 달라.
알몸으로 하는 이런저런 행위들은 그리 감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몸 자체에 주어진 상쾌함이 요만큼도 없는 것입니다. 치호의 말을 흉내 내면, 쾌감이라는 걸까요? 그것이 조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좋아하지 않으면 그런 진창에 몸을 던지는 듯한 공동 작업에 가담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자신과 선배를 비교해보면 그 좋아한다는 감정의 출처가 아무래도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배는 그녀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몸 쪽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릅니다. 그러면 마음 쪽에 무게를 두느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아닙니다. 선배와 할 때 그녀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 자리의 무대장치와 비슷한 무엇입니다. 입맞춤으로 시작하는 예의바름의 뒤에서 풍겨나는 유화물감의 야비한 냄새. 기우는 태양 아래 길게 드리운 이젤의 그림자. 미처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서 구르는 제복의 조개단추. 그 와중에 나지막이 흐르는 옛날 영화의 사운드트랙. 그런 것들에 마음이 흥분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좋아, 하는 생각은 그다음입니다. 이때도 마음이 끌리는 대상은 성적 쾌감을 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몸 쪽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아아, 하고 왠지 미안해집니다. 익살스러울 만큼 일사불란한 그의 성기보다 무감하게 남아 있는 귀를 얼마나 성적으로 느꼈는지 모릅니다. 4711 향수의 오렌지 향을 풍기는 귀 뒤쪽이 그녀의 마음을 훨씬 더 쑤석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