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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한국학/한국문화 > 한국문화유산
· ISBN : 9788974790622
· 쪽수 : 408쪽
· 출판일 : 2014-06-24
책 소개
목차
헌사
심는 글 석굴암과 식민사관, 그리고 진실
제1부 햇살 신화
1 동해의 아침 햇살
2 달을 품어 안은 산
3 햇살 신화의 탄생
4 기억의 집단화
5 인도 부다가야대탑의 주불
6 햇살 신화의 사생아, 광창
7 석굴암 건축의 꽃, 홍예석
8 석굴암은 석굴사원이다
제2부 석굴암의 20세기
1 구한말의 석굴암
2 총독부의 개축공사
3 총독부 공사의 명암
4 박제된 고대유적
5 문화재관리국의 복원공사
6 원형논쟁의 점화
7 원형과 개방구조
8 원형논쟁과 학문윤리
9 오독의 예들
10 철거지상주의
11 희생양 메커니즘
제3부 석굴암, 역사의 법정에 서다
1 과학이 과학을 배반하다
2 물 위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
3 종교성전의 절대조건-전각의 당위성
4 곡해된 자료들
5 전각 실재의 증거들
6 절곡형의 실체
7 전개형의 정당성
8 전실 테라스설과 불상 위치 변경설
9 돔 지붕의 상부 및 외곽 구조
10 국외자와 사용자
거두는 글 ‘미의 천체도’ 앞에서
주
사진 출처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이처럼 석굴암과 동해의 아침 햇살 이야기가 확산된 데에는 누구보다 우리 연구자들의 기여가 컸다. 많은 이들이 석굴암의 전실은 원래 지붕과 출입문이 없는 노천 구조이며, 또한 주실 돔 지붕 전면에는 광창이 뚫려 있었다고 말하며, 이 모두가 동해의 아침 햇살을 석굴 안으로 받아들이려는 신라인의 의도된 설계였음을 강조해온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펴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하나는 석굴암이 동짓날의 일출 지점을 향해 앉아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동짓날이 설날이었으므로,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의 일출 방향에 맞춰 석실법당을 앉힌 것은 그 햇빛을 받아들이려는 의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옛날 실존 붓다가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새벽녘에 동쪽으로 앉아 진리를 깨우친 일이다. 신라인은 붓다가 정각精覺을 이룬 그 순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본존불이 아침 태양을 맞이하게끔 동쪽을 바라보게 했다는 것이다._18~19쪽
하지만 우리 연구자들은 석굴암을 석굴사원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석굴암이 그 옛날 그리스나 로마에서 유행한 대리석 신전과 비슷한 일반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남천우는 자신의 석굴암 연구를 종합정리한 단행본 『석불사』(1991)에다 ‘토함산의 중각석굴重閣石窟’이라는 부제를 붙인다. 이 부제만 놓고 보면 마치 우리의 전통 목조전각이 이중으로 덮여 있는 석굴사원의 뜻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내용은 그런 뜻이 아니다. 한마디로 ‘석굴암은 석굴사원이 아니다’라는 뜻이다._94~95쪽
그런데 과학 전공자들만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미술사학계 일각에서도 중각석굴을 석굴암의 원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홍준은 일단 석굴암이 석굴사원이라는 사실만큼은 명백히 하지만, 뒤에 가서는 남천우의 중각석굴설에 대해 “석굴 본당의 10개 감실은 외벽과 맞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더 물러나 아래쪽에서 공기가 숨 쉬도록 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라고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이 땅의 대표적인 미술사 전공자가 석굴암이 석굴이 아니라는 허망한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_100쪽
석굴암은 기본적으로 종교성전이다. 아울러 붓다의 성상聖像을 봉안한 점에서는 신성공간이요, 승려와 신자들이 일상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는 생활공간이며,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모여 있다는 점에서는 예술공간이다. 다각적인 기능이 요구되고,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특수 건축물이 곧 석굴암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석굴암은 조선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외세의 전리품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최고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의 석굴암 정책은 조선 병탄의 기념비라는 인식 틀 안에서 기획되고 수행된다._117쪽
1960년대 공사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광정匡正의 대기록이었다. 석굴암이 일제의 전리품에서 겨레의 보물로 거듭난 점에서 식민 청산의 성공적인 모델로 꼽을 만했다.
무엇보다 전각 신축으로 보존상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당시 공사의 가장 큰 성과였다. 아울러 종교성전의 정체성이 확보되고 법당 내의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점도 의미가 컸다. 이전에는 안팎의 구분이 없어 어디서부터 법당 내부인지 혼란스러웠다면, 전각의 출입문이 경계선이 되어 신성공간이 발생한 것이다._169쪽
“석굴암의 원형은 개방구조이다”라는 명제는 원형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전각의 존폐 문제, 금시조와 아수라 두 신중상의 배치 문제 같은 핵심쟁점들이 그것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광창이 있었다거나 법당이 샘물 위에 지어졌다는 등의 가설들 역시 원형에 대한 해석 차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명제이다. 원형의 기준 자체가 잘못 설정되었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건축물로 개방구조인 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_177쪽
사실 원형이라는 용어 개념은 그리 간단치 않다. 원론적인 관점에서 공간예술의 원형原形, Archetype이란 예술가의 내면에 최초로 떠오른 특정한 심상心象을 가리킨다. 그것이 돌이든 나무든, 매질媒質을 통해 3차원의 공간에 한 덩어리의 구조물로 우리 눈앞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초의 석굴암을 원형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괴 직전의 그 상태가 신라 예술가의 내면에 탄생한 최초의 심미적 구조물이라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은 파손된 부위를 수리하거나 보정한 것조차 원형 파괴라는 극단적인 입장으로 나아간다._178~179쪽
우리 연구자들은 ‘개방구조’와 ‘밀폐구조’라는 신조어를 가지고 전각 철거를 정당시했다. ‘개방구조’였던 석굴암에 전각을 덮어 ‘밀폐구조’로 바뀌면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전각을 들어내 도로 ‘개방구조’로 회귀하면 결로 등의 부작용이 저절로 해결된다는 게 그들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다._182쪽
그들은 총독부 공사가 잘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일제 때로 돌아가자는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구한말의 ‘원형’으로 돌아가자고 말할 뿐이다. 전각을 철거하라는 것도, 두 신중상을 꺾어 세우라는 것도 구한말의 원형이 그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전각을 철거하고 두 상을 꺾어놓으면, 그것이야말로 일제 때의 석굴암이다. 결과적으로 총독부의 전리품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저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해 있던 일제 때의 석굴암을 칭송하는 반역사의 길목에 서 있다._195쪽
대표적인 것으로 ‘석굴암 위기론’이 있다. 잊을 만하면 결로가 심해지고 균열이 진행된다는 식의 보도가 나왔는데, 지금까지 나온 기사대로라면 석굴암은 진작 붕괴되었을 것이다. 지난해(2013) 11월에도 본존불의 좌대가 위험하다는 보도가 몇몇 언론을 탔다. 또 한 번 불신과 우려가 일어났는데, 그러나 그때 지적된 균열 부위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지금의 상태가 100퍼센트 완벽하고 만족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공명심에 들뜬 학자들에 휘둘려 실체 이상으로 부풀려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_241쪽
이른바 ‘샘물 위 축조설’이야말로 과학 연구의 가설에서 일반화?보편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예라 할 수 있다. ‘샘물 위 축조설’은 석굴 뒤편에서 솟는 샘물의 냉기를 이용해 바닥을 식히면 굴 내에 있는 공기 중의 수분이 아래로 가라앉아 이슬이 바닥 표면에만 맺히고 주벽 등에는 맺히지 않는다는 논리이다._254쪽
샘물 위 축조설은 겉으로는 꽤나 과학적인 시각처럼 보이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반과학적인 신비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원리의 응용을 말하고, 신라인의 지혜를 찬탄하고는 있지만, 샘물 위에 집을 짓는 것이야말로 자연 원리에 위배되는, 어리석음 이상의 어리석음이다.
법당 밑으로는 수로를 뚫어놓을 수도 없으며, 뚫어놓아서도 안 된다. 만의 하나 물길 위에 자리한다면, 이 점 때문에라도 석실법당의 수명이 단축되리라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다. 습할 때 건축 부재의 내구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경험적 진리가 아니던가._265~2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