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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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는 ‘레프라’일지도 모릅니다”
- 본문에서
김소운은 1908년 1월 5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교중(敎重)이었으나 광복 후에 소운(素雲)으로 개명했다. 진주 재무서 주사였던 아버지 김옥현(金玉顯)은 1909년 의병들에게 친일파로 몰려 피살된다. 어머니는 박덕수(朴德水)는 1912년 재혼해서 러시아로 떠났다. 양친을 잃고 할머니를 비롯한 친척들과 생활하며 진해, 김해, 목포 등으로 계속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16년 불과 아홉 살의 나이에 홀로 평안남도 진남포로 가서 2개월간 체류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절영도소년단 활동이 문제가 되어 옥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이듬해 사촌 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동경 개성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1923년 9월 동경대지진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오사카 숙부댁에서 약 반년을 지내다 한국에 돌아왔다. 다음 해 상경하여 오상순, 김범부, 조명희, 변영로 등의 문학인들과 교류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 식민지와 제국을 여러 차례 왕복하는 불안정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김소운은 한국문학을 번역해서 일본에 소개하며 한국인의 문학 정신을 널리 알렸다. 1926년 동경에서 교포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채집한 구전민요를 일본의 시 잡지 『지상낙원』에 연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33년 일본 출판사에서 『언문조선구전민요집』을 발간했다. 3천 수가 넘는 구전민요가 실린 700여 쪽짜리 순 한글책이었다. 또한 3년여의 편집과 번역 끝에 1976년 『현대한국문학선집』을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편찬했다.
호는 삼오당(三誤堂)이며 한국수필사에서 70년대를 대표하는 수필가 중 한사람으로 꼽혔다. 저자는 삼오당의 뜻을 익살스럽게 밝혔다. “첫째로 허다한 나라를 두고 하필이면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제1의 과오이고, 인간의 운명이니 감정에 관련된 문필작업 같은 이런 고생길을 택한 것, 이것이 둘째 과오. 30전후에 죽어서 애석하다는 소리나 들어볼 것이지 죽지 않고 살아 이게 무슨 과오일까 보냐?”
1952년 베니스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가할 정도로 국내 문단내 입지가 높았다. 『가난한 날의 행복은』 7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고 『목근통신』은 대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또한 원작보다 좋은 일본어 번역 실력 덕분에 1977년 한국번역문학상을,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향토와 조국의 문화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을 글을 쓴 김소운. 근엄하면서도 격정적인 성격으로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모순과 상처투성이인 인간을 그려내며 성찰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1981년 11월 향년 74세에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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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오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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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76.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보성고보에서 2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7년 『현대문학』에 수필 「측상락厠上樂」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양잠설」, 「부끄러움」, 「온돌의 정」, 「마고자」, 「백사장의 하루」, 「달밤」, 「방망이 깎던 노인」 등의 수필과 「연암의 문장」, 「노계 가사의 재평가」 등의 평문을 발표했다. 저서로 수필집 『고독의 반추』와 『방망이 깎던 노인』, 수필 창작론 『수필문학입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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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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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5월 29일 지금의 서울 종로에서 가죽신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피원근(皮元根)과 어머니 김수성(金守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피천득이 태어나던 당시 부친 피원근은 한성(漢城)의 중심부, 즉 지금의 종각에서 종로 5가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해 상당히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구한말의 거부(巨富)였는데, 피천득의 나이 여섯 살(1916) 때 사망하였다. 아홉 살 때 모친마저 세상을 뜬 이후 삼촌 집에서 성장했다. 모친을 여윈 1919년, 서울 제일고보 부속국민학교에 입학해 1923년 4학년을 수료하고, 같은 해 서울제일고보에 입학해 1926년 졸업했다.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을 지닌 ‘금아(琴兒)’는 유년기부터 피천득의 집안과 교류가 있었던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호이다. 춘원의 권유로 16세 때인 1926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공보국중학교(Thomas Hanbury Public School)에서 수학했는데, 이 무렵 평생의 정신적 스승이 된 도산 안창호를 만나게 된다. 1929년에는 상하이 후장대학(?江大學) 예과에 입학하고 이듬해인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처음으로 발표한 뒤 <소곡>(1931), <가신 님>(1932), 그리고 수필 <눈보라치는 밤의 추억>(1933), <나의 파일>(1934)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1931년에는 후장대학 영문과에 진학해 1937년 졸업한 뒤 귀국해서 미국계 석유회사 스탠다드오일사에 잠시 근무했다가 경성중앙상업학원 교사로 부임한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를 거쳐 1946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시를 강의했고, 1954년 미 국무부 초청으로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2007년 5월 25일 향년 9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선생은 1947년 ≪서정시집(抒情詩集)≫(상호출판사), 1959년 ≪금아시문선(琴兒詩文選)≫(경문사), 1969년 문집 ≪산호(珊瑚)와 진주(眞珠)≫(일조각), 1976년 수필집 ≪수필≫(범우사)을 출간했고 같은 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정음문고)을 번역·간행했다. 1980년에는 그간 발표한 산문과 시를 선해서 ≪금아문선(琴兒文選)≫과 ≪금아시선(琴兒詩選)≫(일조각)을 출판했고, 1993년에는 시집 ≪생명≫과 ≪삶의 노래≫(동학사), 1996년에는 수필집 ≪인연≫(샘터), 1997년에는 <피천득 문학 전집>, 2001년에는 영문판 시 수필집 ≪A Skylark≫(샘터)을 간행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91), 인촌상 문학부문(1995), 자랑스런 서울대인상(1999)을 수상한 바 있다.
부인 임진호(林珍鎬) 여사 사이에서 2남(세영, 수영) 1녀(서영)를 두었으며, 장남 세영은 연극배우 및 성우, 라디오 DJ로 활동하다가 캐나다로 건너가 30여 년을 살다 부친의 권유로 귀국해 경북 문경에서 수목원을 운영하고 있고, 차남 수영은 의대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선생의 수필에 자주 등장하는 막내딸 서영은 도미(渡美)해 현재 보스턴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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