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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과학소설(SF) > 외국 과학소설
· ISBN : 9788983948441
· 쪽수 : 624쪽
· 출판일 : 2018-08-16
책 소개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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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그 애는 일곱 살이고 나는 일흔여덟 살이었다. 그 애는 금발의 생머리를 하나로 묶어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나는 빛나는 백발이었다, 아니 새하얀 백발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위생상 어쩔 수 없이 부끄러운 환자복 차림이었고 그 애는 새파란 교복에 펠트 교모를 쓰고 있었다. 아이는 내 침대 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내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내 가슴에 연결된 심전도 모니터를 살피고 내가 알람을 떼어내버린 자리를 확인하더니 내 맥박을 짚어보고 말했다.
“하마터면 제가 놓칠 뻔했네요, 오거스트 박사님.”
그 애가 쓰는 독일어는 베를린 상류층의 억양이었지만 세상의 어떤 언어로 말을 걸었어도 웬만하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 애는 하얀 무릎양말이 밖에서 맞은 비에 젖어 가려운 모양인지 왼쪽 다리 뒤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저는 시간을 거슬러 메시지를 전달해야 해요. 여기서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박사님이 때마침 죽어가고 계시니 저한테 전달된 그대로 메시지를 박사님의 클럽들에 전해주시길 부탁드려요.”
나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수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우수수 혀로 굴러 떨어져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세계가 끝나고 있어요. 이 메시지는 아이에게서 어른으로, 아이에게서 어른으로, 천 년 후 미래의 세대로부터 거슬러 전달된 거예요. 세계가 끝나고 있고 우리는 종말을 막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박사님께 달려 있어요.”
보아하니 의미의 앞뒤를 맞춰 내 입술을 통과할 의향이 있는 유일한 언어는 태국어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조합해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왜?’였다.
왜, 세계가 끝나느냐는 말이 아니라,라고 서둘러 덧붙여 말해야 했다.
왜 그게 중요하지?
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뉴캐슬의 어느 종합병원에서 혼자 죽었다. 아내와 이혼하고 슬하에 자식도 없이 공적 연금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임종의 순간까지 내가 오래전 세상을 떠난 패트릭과 해리엇 오거스트의 아들이라 믿고 있었으며, 내 여러 생애들에서 사인이 된 질병으로 죽음을 맞았다. 다발경화증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 결국 신체 기능이 정지된다.
그러므로 이전 삶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정확히 내가 시작 한 지점인 1919년 새해 첫날 베릭어폰트위드 역의 여자화장실에서 다시 태어났을 때, 당연히 내가 보인 반응은 상당히 상투적이지만 극심한 광기였다. 성인의 의식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아이의 몸으로 돌아간 나는 처음에 혼란에 빠졌다가 다음에는 고뇌에 빠졌고, 다음에는 의혹에, 다음에는 절망에 빠져 비명 지르다가 절규했고 일곱 살 나이에 <불행한 이들을 위한 성녀 마고 정신병원>에 입원당했는데, 솔직히 나도 거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입원한 지 여섯 달 만에 3층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데 성공했다.
사랑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어느 날 밤, 아무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리고 특별히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모든 걸 털어놓고 말았다.
“내 이름은 해리 오거스트야. 아버지는 로리 에드먼드 헐너고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어. 이건 내 네 번째 삶이야. 난 이전에 여러 번 태어나고 죽었지만, 매번 똑같은 삶을 살아.”
그녀는 내 가슴을 장난스럽게 때리면서 멍청한 소리 그만하라고 말했다.
“몇 주일 후 미국에서 스캔들이 일어나 닉슨 대통령이 하야하게 될 거야. 영국에서는 사형제도가 폐지되고 검은9월단 테러리스트들이 아테네 공항에서 난사를 할 거야.”
아내가 말했다. “자기가 뉴스에 나와야겠어, 꼭 나와야겠네.”
3주일 후 워터게이트가 터졌다. 처음에는 약한 강도로 터져서 대서양 건너편의 보좌관들이 해고되었다. 사형제도가 폐지될 무렵에는 닉슨 대통령이 의회 청문회에 섰고, 검은9월단 테러리스트들이 아테네 공항의 여행객들에게 난사했을 무렵에는 누가 봐도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리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중략…)
“당신, 어떻게 알았어?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어떻게 미리 알았어?”
“말했잖아. 이게 내가 네 번째 사는 삶이라고. 그리고 난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야.”
“그게 무슨 뜻이야, 네 번째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해, 네 번째 삶이라는 게?”
“모르겠어. 그걸 알아내기 위해 의사가 된 거야. 나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했고 내 피, 내 몸, 내 두뇌를 연구했어. 내 안에…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내가 틀렸어.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야. 혹시 그렇다 해도, 아직 어떻게 해답을 알아내야 할지 몰라. 오래전에 이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시도를 할까 했지만, 당신을 만났어. 내겐 영원의 시간이 있지만, 지금은 당신을 원해.”
“당신, 몇 살이야?”
“쉰네 살. 206년을 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