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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91095625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09-11-23
책 소개
목차
회고에 앞서 _9
프롤로그 _11
1부 휩쓸고 지나가다
1. 휩쓸고 지나가다 / 2. 우기 / 3. 행동이 곧 역사다 / 4. 그냥 싫다고 말해 / 5. 꼬마 부처 / 6. 위험한 일 / 7. 만물의 척도
2부 라사 병동
8. 생애 첫 진료비 / 9. 콘테 박사 / 10. 라사 병동 / 11. 기술적 문제 / 12. 신의 뜻 / 13. 금요일 의식 / 14. 이국의 장례식
3부 나 홀로
15. 뜻밖의 배달 / 16. 나무는 풀보다 크다 / 17. 나 홀로 / 18. 24시간 / 19. 겨우 의사 노릇을 하다 / 20. 곤경 / 21. 최선의 치료 / 22. 방문객 / 23. 물방울 하나
4부 마침내 의사가 되다
24. 약 그 이상의 것 / 25. 빌린 돈 / 26. 자신부터 치유하라 / 27. 작은 희망 / 28. 작은 기적 / 29. 커져가는 어둠 / 30. 마지막 하루 / 31. 마침내 의사가 되다
5부 마지막 의식
32. 고통의 씨앗 / 33. 젖은 발걸음 / 34. 아프리카의 일부 / 35. 집으로 / 36. 익숙한 얼굴 / 37. 꿈 같은 의료시설 / 38. 마지막 의식
에필로그 _380
작가의 말 _383
리뷰
책속에서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아침에 사망한 소년을 덮고 있던 흰색 시트 아래로 서서히 번지던 피가 자꾸 떠올랐다. 숙소에 돌아온 나는 손을 씻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샤워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냉기 서린 물이 쏟아져 내리는 동안, 나는 케네마로 온 것이 용감한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정신 나간 선택이었는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내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아닌지는 오직 시간만이 말해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그마한 아이를 꼭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죄 없는 아이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내가 과연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너무 어린 아이의 죽음에는 특별히 더 비극적인 뭔가가 있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아이들이 사망하는 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했다. 엄마의 팔을 베고 누워 있는 시아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고통받는 시아의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비극은 세상이 공평하다는 우리의 신념을 뒤흔든다. 성인이 병에 걸린 것을 보면, 사람들은 그런 불행에 이르게 된 어떤 연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굳이 찾자면 업이 그 연유일 것인데, 그렇다면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은 아이들에게는 왜 그런 불행이 찾아드는 것인가? 태어난 것이 죄라면, 그 외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어쩐지 시아를 살리는 일이 빈타의 죽음에 대한 내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그리고 미덥지 않은 의술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일을 맡게 된 나는 또 같은 실수를 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무례한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처음 뵈었을 때는 의사이신 줄 몰랐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의 쓰면서도 달콤한 말에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지난 몇 달간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내공이 쌓인 미소였다. 그 몇 달은 내게 죽음을 알게 하고 삶의 충만함을 알게 한 시간들이었다. 나는 잠시 시선을 멀리 던졌다. 정글로 뒤덮인 산의 윤곽을 빛으로 물들이며 태양이 지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괜찮습니다."
마침내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때는 저도 제가 의사인 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