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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사상가/인문학자
· ISBN : 9788991799653
· 쪽수 : 720쪽
· 출판일 : 2011-12-05
책 소개
목차
프로이트 차례
프로이트Ⅰ
■ 머리말
■ 들어가는 글 - 스핑크스의 정복자, 오이디푸스
1부 무의식의 탐험가(1856~1905)
1장 앎의 의지
“지식에 대한 욕망 때문에 마음이 의학으로 기울었다.”
위대함을 향한 갈망
신을 믿지 않는 의학도
사랑에 빠지다
2장 무의식의 탐사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친구 그리고 적
히스테리 환자들
오이디푸스 전투
3장 정신분석의 탄생
“내가 높은 곳에 있는 권세들을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지옥을 움직이리라.”
《꿈의 해석》
햄릿들의 시대
미켈란젤로의 <모세>
성욕과 리비도
2부 정신의 정복자(1902~1915)
4장 투사와 정신분석가
“우리는 새로 발견된 땅의 개척자들 같았고, 그 지도자는 프로이트였다.”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다
정신의 고고학자
수요심리학회
정신분석의 씨족 구성원들
5장 정신분석 정치학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니, 저들이 학문의 운명을 바꾸지 못할 걸세.”
황태자, 융
1909년, 미국 방문
아들러 추방
융과 결별하다
6장 정신분석의 환자들
“인간은 입을 다물고 있다 해도 손가락 끝으로 수다를 떤다. 모든 구멍을 통하여
비밀이 드러난다.”
도라의 사례
꼬마 한스와 쥐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 분석
늑대 인간의 정치
정신분석의 기법
7장 정신의 지도 그리기
“정신 생활은 대체로 지속적인 전쟁 상태다.”
문화의 정신분석
아버지 살해와 어머니 정복
나르시시즘과 리비도
문명의 자기 파괴
■ 약어 설명
■ 주석
■ 찾아보기
프로이트Ⅱ
■ 감사의 말
3부 문명의 해부학자(1915~1939)
8장 전쟁과 인간
“인간은 자신이 믿는 것보다 훨씬 부도덕할 뿐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도덕적이기도 하다.”
충동, 억압, 무의식
전쟁과 평화
에로스와 타나토스
이드, 자아, 초자아
9장 프로이트의 안티고네
“나는 유명하지 않습니다. 악명이 높지요.”
구강암에 걸리다
안나, 안티고네
프로이트주의의 대유행
정신분석의 분화
10장 여성과 정신분석
“해부학이 운명이다.”
랑크와 출생 트라우마
정신분석 자격 논쟁
여자, 암흑의 대륙
11장 문명 속의 불만
“인간은 문명 없이 살 수 없지만, 문명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도 없다.”
종교라는 환상
문명의 딜레마
미국을 혐오하는 사람
괴테 상을 받다
12장 인간 모세의 최후
“나는 학생 때부터 늘 용감한 반대자였고, 대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히틀러라는 재앙
무신론자 유대인
빈을 떠나다
금욕주의자의 죽음
■ 약어 설명
■ 주석
■ 문헌 해제
■ 프로이트 연보
■ 옮긴이 후기
■ 찾아보기
리뷰
책속에서
위대함을 갈망한 유대인 소년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현재 체코의 프리보르)에서 늘 가난했던 유대인 모직물 상인 야코프 프로이트와 아말리아 프로이트 사이에서 첫아이로 태어났다. 41세인 아버지 야코프는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이 있었고, 야코프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아말리아는 21세였다. 자애롭지만 노쇠한 아버지와 젋고 아름다운 어머니를 보며 느낀 당혹감, 어머니의 사랑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동생들의 출현에서 느낀 불안은 뒷날 프로이트가 자기 분석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롯해 정신분석의 주요 개념을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어린 시절의 이런 수수께끼들은 침전물을 남겼는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오랫동안 억압해놓았다가 1890년대 말에야 꿈과 힘겨운 자기 분석을 거쳐서 다시 포착할 수 있었다. 그의 젊은 어머니가 경쟁자를 임신했다, 배다른 형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어머니의 동반자가 되었다, 조카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 가장 친한 친구가 가장 큰 원수이기도 하다, 인자한 아버지는 할아버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이가 많다. ? 그의 정신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장차 이런 내밀한 경험들로부터 정신분석 이론이라는 직물을 짜게 된다. 이 경험들은 그가 필요로 할 때 그에게 돌아왔다. ― 1권, 34~35쪽
비범한 아들이 장차 유명해질 것이라고 믿는 부모의 총애 속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며 위대함을 향한 갈망을 키워 나갔다. 야심만만하고, 자신감 넘치고, 똑똑하고, 탐욕스럽게 책을 읽던 사춘기의 프로이트로서는 현실이 허락하는 만큼은 성공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 것이 당연했다. 김나지움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프로이트는 다른 유대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법률가나 장관이 될 꿈을 꾸었다. 자유주의적 분파가 통치하던 1860년대의 빈은 아직까지 반유대주의에 따른 법적 차별이 심하지 않아서 유대인들에게는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윈의 학설에 매료되고 괴테의 책 <자연>에 대한 강연을 들은 후에 프로이트는 의학으로 진로를 바꾼다. 그것은 과학이 세계 이해에 대한 지적 갈증을 충족시켜줄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형이상학적 사변에 빠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을 통제하고 싶은 강한 소망 때문이기도 했다.
신을 믿지 않는 의학도
대학에서 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광범한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뱀장어의 생식선 연구나 어류의 신경 구조 연구 등 다양한 실험과 연구 활동에 참여하느라 프로이트는 남들보다 늦게 의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 시절에 그는 종교의 환상을 거부하는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철학에 끌렸고, 경험심리학의 대가 프란츠 브렌타노의 철학과 저명한 생리학자 에른스트 브뤼케의 실증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유대인이었지만 무신론자 유대인이었다. 아버지 야코프 프로이트는 성(聖)과 속(俗)을 일치시키는 조상들의 관행에서 벗어나 점점 모든 종교 의식을 버렸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프로이트는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다. “우리 부모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나의 이력서>에서 그렇게 간결하게 말했다. 세례라는 피난처로 도피하여 반유대주의로부터 보호를 받으려 했던 유대인들을 경멸하며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 또한 유대인으로 남았다.” 이것은 종교 없는 유대주의였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유독한 분위기 속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부정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유대인 출신임을 널리 과시하기까지 한 것이다. 유대주의와 관련된, 대체로 무의식적인 이런 전략은 프로이트의 평생에 걸쳐 드러난다. 1873년 대학에 들어간 첫 해에는 자신의 “인종” 때문에 열등하다고 느끼도록 강요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반응은 저항이었다. 그는 다수의 평결에 고개를 숙일 이유를 알지 못했다. ― 2권, 435쪽
격정적인 연인 프로이트
자연에 관한 지식을 맹렬하게 집어삼키던 프로이트는 사랑 앞에서도 격한 연인이었다. 1882년, 프로이트는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만난 지 두 달 만에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하기까지는 4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프로이트는 너무 가난해서 약혼자를 자주 만나지도 못했다. 대신 두 사람은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1880년대 당시의 프로이트를 자서전처럼 낱낱이 보여주는 이 편지들에서 그는 다정하게 허물없이 굴었다가, 충동적이고 다급하고 의기양양하고 우울한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고, 마르타에 대한 소유욕으로 압제적으로 굴었다가도 아주 드물게는 뉘우치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만나면 키스와 포옹이 전부였다. 폭풍 같은 내면과 달리 그는 자신의 계급과 문화가 용인하는 방식으로만 그녀와 연애했던 것이다.
4년이 넘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다림의 기간은 성이 거의 모든 정신 질환의 원인이라는 프로이트 이론이 형성되는 과정에 자취를 남겼다. 1890년대에 근대적 삶에 수반되는 성적 고통을 이론화할 때, 프로이트는 부분적으로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엄청나게 안달이 났다. 이제 스물여섯이 된 프로이트는 한껏 충전되고, 대체로 억압되어 있던 모든 감정들, 나아가 사랑 못지않았던 분노를 하나의 대상에 쏟아부었다.
― 1권, 95~96쪽
프로이트는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가난에서도 벗어나고 결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빈 종합병원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병원에서 가장 낮은 자리이며 일종의 의료 보조원인 지망의(Aspirant)에서 시작한 프로이트는 점차 인정을 받으며 승진도 하고 그에 따라 수입도 좋아진다. 1885년에 보수는 없지만 교수직을 바라볼 수 있는 ‘사강사’로 임명되고, 1886년는 종합병원을 그만두고 신경질환 전문의로 개업한 후에 드디어 결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