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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92467964
· 쪽수 : 190쪽
· 출판일 : 2015-04-04
책 소개
목차
1. 망명의 늪
2. 철학적 살인
3. 매화나무의 인과
책속에서
줄잡아 6백만의 사람을 수면 속으로 봉쇄해버린 서울의 거대한 밤은 그것이 안은 다양한 꿈으로 해서 소화 불량을 일으켜 괴물의 어느 한 부분이 경련을 일으켜도 마땅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파열을 일으켜 피와 고름이 홍수처럼 흘러내려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이처럼 공중전화 박스 속에 있는 내 자신이 서울의 장부(臟腑)에 이상을 일으키고 있는 이질 분자가 아닌가. 만일 내게 저주의 의사와 악의의 발동이 있다면 서울의 장부에 급성 맹장염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겐 저주할 의사도 악의를 발동시킬 생각도 없다.
설혹 호화스런 육체의 향연이 저 어두운 창 너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짐작을 했어도 내겐 질투할 정열조차 없다.
민태기는 그 편지를 볼 때마다 씁쓸한 웃음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그는 자기가 한 행동이 철학적 살인이기는커녕, 경솔하고 허망한 질투가 저지른 비이성적인 행동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광식을 죽인 것을 결코 뉘우치진 않았다. 사람은 이성에 따르기보다 감정에 따르는 게 훨씬 더 정직하고 인간적일 수 있다는 신념을 가꾸게도 되었다.
그런데 민태기는 그 편지의 주인, 한인정(韓仁貞)이란 여성이 고광식의 아내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그 여인에게로 쏠리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동시에 불의의 사고로 꼭 한 번 고광식에게 짓밟힌 김향숙의 육체는 혐오하면서도 오랜 시일 고광식의 육체와 섞여 있던 한인정을 용납할 수 있을 것이란 심리적 전개로 해서 스스로 놀라는 마음으로 사랑에 있어서 육체란 그다지 중대한 문제가 아니란 발견을 하기도 했다.
어느 해의 봄이다. 매화꽃은 세사와 구구한 억측에 초연한 듯 그 해는 더욱 아름답고 황홀하고 요염했다. 그러한 어느 날의 오후 성 참봉은 곤히 잠들고, 참봉 대신 돌쇠가 매화나무를 지키고 있었다. 참봉과 돌쇠가 번갈아 매화나무를 지키게 된 것은 점괘마다 그 나무를 없애야 한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부인이 참봉더러 한 때부터였다.
그날도 아침부터 술에 취한 돌쇠가 마루에 걸터앉아 매화꽃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삐걱거리는 대문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창숙이가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창숙이란 성참봉의 막내딸이다. 이웃 도시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봄방학이 돼서 귀가한 것이다.
창숙이의 모습을 보자 돌쇠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엊그저께까지 젖 냄새가 나는 아이로만 보았는데 어느 사이에 성숙한 처녀, 그것도 예쁘기 그지없는 처녀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