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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8773588
· 쪽수 : 200쪽
· 출판일 : 2023-10-20
책 소개
목차
거년(去年)의 곡(曲)
아무도 모르는 가을
우아한 집념(執念)
작품 해설
작가연보
저자소개
책속에서
허 검사는 볼펜의 대가리로 탁자 위를 딱딱 때렸다.
“그게 할 말 전부야?”
설혹 애정 관계는 없었다고 해도 엊그제 친한 친구가 자기의 책임이 없지도 않은 상황에서 죽었는데, 그 충격의 흔적도 슬픔의 흔적도 없는 진옥희의 평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허 검사는 다짜고짜 기소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별로 더 할 말 없습니다.”
“경찰청에 이렇게 나와 취조를 받고 있으니 불쾌하지?”
“불의의 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는데요.”
“법률에 흥미를 잃었다고 했는데 혹시 법률에 겁을 먹은 것 아닐까?”
“……”
허 검사는 진옥희가 보기 드문 수재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수재는 그만큼 냉혹하다는 감상도 가졌다. 총명한 두뇌와 차가운 심성을 그냥 그대로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진옥희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허 검사는 이윽고 단(斷)을 내렸다.
“돌아가시오. 혹시 앞으로 또 부를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이 일로 부르진 않을 거요. 마지막으로 후배에게 선배로서 한마디 하겠소. 형벌은 꼭 감옥에서만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오.
양심의 감옥이란 것도 있소. 이 사건엔 반드시 당신이 책임져야 할 죄의 부분이 있소. 다만 그걸 법률로썬 다루지 않겠다는 것뿐이오. 그건 미스 진의 양심에 맡기겠소.”
‘윤효준의 결혼식이 있은 지 3일 후에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윤효숙이 의학을 배울 작정을 한 것은 《소도의 봄》을 읽고 감격한 탓만은 아니지 않을까.
윤효숙이 무정부주의에 혹한 것은 베라 피그네르의 자극으로 서였겠지만, 그런 사회가 되어야만 꿈이 꿈으로 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나마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좌익운동을 한동안 했다는 것도 막연한 바람으로 인한 착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효숙의 그 모든 마음의 움직임을 알면서도 입 밖에 내어 처리하길 두려워 고민한 윤효준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저 비문에 진실이 있게 하기 위해선
‘인습의 가시덤불 속에서 사랑을 키우지 못하고 애절하게 죽은 영혼’이란 글귀가 보태져야만 할 것이 아닐까……
다음다음으로 상념이 이어졌으나 확실한 판단이 설 수 있을 까닭이 없다. 헌데 어느 누구가 그들의 마음속을 알 수 있으리.
어느 누구가 윤효숙의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이 가을의 의미를 알 수 있으리.
나는 아무도 모르는, 그리고 아무도 모를 가을 속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윤효숙, 윤효준을 위한 눈물은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는 가을에 바치는 나의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