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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사 일반
· ISBN : 9788994079042
· 쪽수 : 764쪽
책 소개
목차
서론 만주족에 대한 문제
민족주권과 팍스 만주리카 | 만주의 법도 | 만주족인가 기인인가? | 후기중화제국의 민족성에 대한 재고찰 | 야만족과 중국인: 역사상 만주족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 | 한화와 만주족 | 새로운 서술
1부 팔기사회의 구조
1장 팔기와 만주족의 기원
팔기란 무엇인가? | 만주족 기원의 신화 | 여진족은 누구인가? | 건주여진의 후예 | 권력의 기반: 팔기의 형성 | 정체성의 기반: 홍타이지 시대의 팔기와 만주국가 | 몽골팔기와 한군팔기 | 민족의 서열과 팔기 내의 지위
2장 만성: 산의 호랑이
입관 전의 주둔지 | 청 점령의 개략 | 만주족 차별주의와 북경 분할 | 지방의 만성 | 답답한 숙소 | 점령에 대한 생각 | 이중 주둔 체제―팔기와 녹영
3장 황제의 사람
팔기 관료제의 성격 | 주방 장군 | 부도통과 다른 관리들 | 민정 관리와의 관계 | 기인 구제 | 분노와 칭찬: 주접 | 팔기 행정과 만주족의 나라
2부 기인 생활의 유형
4장 철밥그릇과 팔기의 특권
위장에서 | 수렵에서 전쟁으로 | 황제의 녹을 먹는 것 | 특권층
5장 한인 속에서
만한일가 | 집안 싸움 | 민족 간 거래 | 만주족과 한인 간의 중재 | 주인과 노예 | 민족 간의 갈등과 공존
6장 외래 거주인
만주족의 샤머니즘 | 만주족의 이름과 작명 관습 | 만주족 여성의 위치 | 만주족의 분산 거주 | 고향만 한 곳은 없다 | 삶과 죽음의 문제 | 외래 거주인
3부 18세기의 위기
7장 만주족의 법도는 어디로?
문화변용과 만주족의 법도 | 풍요로운 삶을 살다 | 국어 언어를 잃어 가다 | 언어와 정체성
8장 팔기제 구하기
팔기제의 비용 | 빈곤의 길 | 팔기 안의 이급 신분 | 족보와 팔기 호구제도의 개혁 | 가변적인 정체성 | 뒤쳐진 집단: 팔기의 한인들 | 한군팔기를 희생시키다 | 팔기와 만주족
결론 만주족의 정체성과 중국 지배
만주족은 어떻게 차별성을 유지했는가? | 무엇이 중요했는가?
리뷰
책속에서
북경 거리에 만주족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뜻밖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성공적으로 권력을 통합한 것이 특히 그들 자신에게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만주족 황제가 1912년까지 계속 통치하리라고 1644년에 예견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이 점이 역사가에게 많은 흥미로운 문제들을 제공한다. 그중 첫 번째 기본적인 문제는 ‘소수민족 통치의 문제,’ 즉 “중국인에 비해 대략 350대 1로 소수였던 만주족이 어떻게 중국을 정복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거의 300년 동안이나 통치할 수 있었는가”라는 미묘한 문제이다. 곽말약은 이런 말을 했다. “청이 중국에 들어와 200년 이상 통치한 것은 기적이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중국 역사에서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한인이 아니라 퉁구스족인 만주족이 중국을 통치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점이다
나는 만주족의 정체성과 민족주권이 존속된 이유는 그것이 만주족의 제도와 특별하게 겹쳐 있었기 때문이고, 이 가운데 특히 1601년에 만들어진 팔기 때문이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만주족의 지배는 군기처 같은 기구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났지만 팔기제보다 더 만주적인 것은 없었다. 청 황실은 습관적으로 팔기를 ‘국가의 근본’이라고 불렀다. 이 책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 말의 의미를 탐색해보는 것이다. ‘만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위한 유일하고 확실한 기구’는 황제보다도 팔기였다. 팔기는 만주 헤게모니의 뚜렷한 표상이었다. 결국 만주족 본연의 문화적 을 원형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청조는 적시에 팔기제를 개혁해서 제도적인 방어막을 지켰고, 그 기반 위에서 만주족의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이 개혁은 1720년대에 시작해서 본 연구의 하한 시기인 177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파멸적인 재정부담으로 위협받고 있던 팔기제의 수명을 연장해 주었다. 결국 문화변용이 일어났지만 그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왜냐하면 청조는 만주족의 정체성―내가 논하려는 것은 민족적인 면이다―을 팔기를 통해 유지했기 때문이다
내가 민족성을 역사적 맥락에서 논의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자신이 연구하는 시기에서 민족적 범주가 왜 중요한지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범주가 정말로 민족적인 것이며 근대적 민족의식의 의붓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 경우 에릭 홉스봄이 “현재의 욕망을 과거에서 읽어내려는 것”이라고 정의한 시대착오의 위험성은 두 배로 늘어난다. 우리는 민족사학의 ‘정통성’에 대한 현재적 주장을 피해가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객관성에 대한 희망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관적인 태도이다. 로제 샤르티에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역사학 담론은 언제나 흔적과 기호에 의존하는 지식으로서 과거의 사실을 그 목적으로 삼는데, 이 과거의 사실을 유효하고 설명 가능한 방식으로 재구성했다고(혹은 최소한 다른 것보다 더 유효하고 설명 가능한 방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고 나 역시 이에 충분히 답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연구를 통해서 내가 확신하게 된 것은 원칙적으로 민족성의 작동과정이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의 민족집단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민족의식에서 흔히 발견되는 요소 가운데 하나만 들어보면) 자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대한 해석(혹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조작)이라는 전략을 의식적으로 채택해왔다. 만약에 오늘날 만주족이 현재의 필요 때문에 18세기의 과거를 재구성한다고 해도, 그것이 18세기 만주족의 민족성이 반드시 현재의 역사가들의 회고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18세기 만주족들이 당시의 필요 때문에 자신들의 17세기의 과거를 재창조했다고 해도, 우리는 정복 시기 만주족의 민족성을 건륭기 조정 내 이론가들의 과거지향적 환상으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청대 만주족과 오늘날 스스로 ‘만족’이라 부르는 집단의 차이가 무엇이든, 청대 만주족은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서 모든 시기, 모든 장소의 민족집단과 거의 같은 종류의 과정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