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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88994207667
· 쪽수 : 256쪽
책 소개
목차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해설
작가 연보
작품 연표
리뷰
책속에서
지금은 어딜까? 지금은 언제일까? 지금은 누구일까? 나한테 묻지 말고. 나는이라고 말하기. 생각하지 말고. 그것들을(?a) 질문이라고, 가설이라고 부르기. 앞으로 가, 여기서 저것은 앞으로라고 하고, 이것은 가라고 하기.
내 귀가 완전히 먼 건 아닌 게 나한테 전달되는 소리들이 분명히 있거든. 여기가 거의 완벽하게 조용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게 또 완전히 조용한 건 아니라서. 나는 이곳에서 들은 첫 번째 소리를 기억하고 있어, 처음 들은 날 이후에도 같은 소리를 자주 듣고는 했지만. 사실 나는 내가 여기 체류하게 된 데에도 어떤 시작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봐야만 할 거야, 그게 비록 이야기를 편하게 하려는 수작밖에 안 될지라도. 지옥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루시퍼의 반란에서 시작되는 거잖아. 따라서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유사성에 기대어, 영원부터는 아니었을지라도, 영원토록 내가 여기에 있으리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는 거지. 그럼 자 이런 생각이 내 설명에 얼마나 특별한 공헌을 하는지 바로 보자고. 특히 기억이, 내가 사용하는 걸 금해야만 한다고 내가 생각하고는 했던 그 기억이, 필요한 경우에는, 즉시 발언권을 가지게 될 거야. 여기에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들이 적어도 1천 개 정도는 있어. 이 단어들이 나한테 필요할 때가 아마 있을 거야. 그러니까 완전무결한 침묵의 한 시대가 지나가면, 어떤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
섬, 나는 섬 안에 있어, 나는 절대로 그 섬을 떠난 적이 없었어, 그걸 보면 나도 참 한심해. 나는 나선 모양으로, 세계 일주를 하며 살았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믿고 있었지. 착각한 거야, 내가 쉬지 않고 돌고 있는 곳은 바로 그 섬이니까. 나는 오로지 그 섬 말고는, 다른 곳은 전혀 몰라. 사실 둘러볼 기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섬에 대해서도 역시나 아는 게 없어. 나는 섬 기슭에 다다르면, 거기서 방향을 틀지, 섬 안쪽으로. 내 경로는, 나선 모양이 아니야, 그것 역시도 내 착각이었던 거야, 그보다는 불규칙한 고리들이 겹쳐 있는 모양이지, 그때그때 밀려오는 공황 정도에 따라, 때로는 왈츠처럼, 짧고 급격한 회전으로 만들어진 고리들, 때로는 이탄지(泥炭地) 전역을 감싸는, 큰 폭의 포물선을 그리는 고리들, 그리고 때로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꾸준하게 축을 따라 이어지는 고리들. 하지만 내가 언급하고 있는 그 시기에 방금 말한 역동적인 삶은 끝이 나기 때문에, 제3자가 주는 자극 없이는, 나는 움직이지 않아, 또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고. 사실은, 예전에 대단한 여행가로 활동하다가 그 끝 무렵에, 무릎으로 걷다가, 기기도 하고 구르기도 하다 보니, 알다시피 그 위에 머리만 달랑 얹혀 있는, 그저 (비참한 상태의) 몸통만 남은 거야, 자 이게 내가 최대한 이해하고 기억했던 내 남은 신체에 관한 묘사야. 도살장 근처 인적 드문 길가에 놓인, 속 깊은 한 항아리 속에, 꽃다발을 쑥 집어넣듯이, 항아리 주둥이가 내 입에 닿을 정도로, 쑥 들어가 있는 나는, 움직이지 않고 있어,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