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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소설론
· ISBN : 9788994207773
· 쪽수 : 112쪽
책 소개
목차
서문
프루스트
해설
작가 연보
작품 연표
책속에서
프루스트의 창조물은 이러한 지배적인 조건과 환경, 즉 시간의 희생자다. 하등한 유기체로서 단지 2차원만을 알고 있다가 갑자기 높이의 신비와 대면하게 된 희생자다. 희생자이자 죄수다. 시간과 날들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내일로부터도, 어제로부터도. 어제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까닭은 어제가 우리를 변형시켰거나, 어제가 우리에 의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기분 또한 바뀌었기에 중요하지 않다. 어제는 그 단계를 넘은 기점이 아니라, 과거의 닳을 대로 닳은 길에 놓인 조약돌로, 그 무겁고 위협적인 존재는 돌이킬 수 없이 우리의 일부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어제 때문에 지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달라졌을 뿐이다. 어제의 재앙을 경험하기 전의 우리가 더 이상 아니다. 어제는 재앙의 날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용에 있어서 실제로 재앙이 일어났다는 말은 아니다. 대상의 선하거나 악한 기질은 어떤 현실성도 의미도 없다. 몸과 마음의 즉각적인 기쁨과 슬픔은 모두 불필요하다. 어제는 현실성과 의미를 갖는 유일한 세계, 즉 우리 잠재의식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그 세계는 균형이 깨졌다.
우리는 탄탈로스와도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함이 정확한데,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유혹에 빠지도록 내버려둔다. 또한 우리를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상동곡(常動曲)은 아마도 한층 다양하리라. 어제 열망하던 것들은 어제의 자아에게는 유효했지만, 오늘의 자아에게는 아니다.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비극적인 관계는 실패가 예고된 인간관계의 전형이다. 나는 지나치게 추상적이며 임의적인 프루스트의 비관론을 소설의 중심에 있는 이 재앙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각각의 종양에는 적절한 메스와 붕대가 있기 마련이다. 기억과 습관은 시간이라는 암이 가지고 있는 종양이다. 기억과 습관은 프루스트 소설의 가장 단순한 에피소드를 통제하는데, 그것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분석하기에 앞서 작용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기억과 습관은 한 건축가의 지식이자, 브라흐마에서 레오파르디에 이르는 모든 현자들의 지혜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신전의 아치형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그 지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 없애버린다.
프루스트는 기억력이 나빴다. 그의 습관 또한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는 그의 기억력이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기억은 일관되고 판에 박힌 것으로, 빈틈없는 습관의 조건이자 기능이다. 또한 발견할 때 쓰는 도구가 아닌 참고할 때 필요한 도구가 된다. 이런 기억력을 가진 사람은 "나는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를 상습적으로 말하고 다니는데, 이 표현 자체가 그의 기억의 가치를 나타낸다. 그는 어제를 기억할 수가 없다. 내일을 기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단지 어제라는 것이 저 아래 가장 습한 날로 기록된 8월의 공휴일과 함께 빨랫줄에 매달려 마르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만 있다. 그의 기억은 빨랫줄이고 과거의 이미지는 세탁이 된 더러웠던 빨래 더미로, 과거의 이미지는 그가 기억해내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이 생기면 즉각 달려오는 충실하고 헌신적인 하인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