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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88994353043
· 쪽수 : 188쪽
· 출판일 : 2010-07-02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학자마다 해석이 다를 정도로 모호한 말이긴 하지만 여우가 온갖 교활한 꾀를 부려도 고슴도치의 한 가지 확실한 호신법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상징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때, 이 말은 작가와 사상가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 넓게 말하면 인간 간의 차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런 시스템은 모든 것을 조직화하는 하나의 보편 원리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다른 한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표들은 흔히 서로 관계가 없으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물론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이유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관계이지만 도덕적이고 미학적 원리에 근거한 관계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을 띤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은 산만하고 분산적이다. 또한 다양한 면을 다루면서 아주 다채로운 경험과 대상의 본질을 포착해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찾아낸 본질을 받아들일 뿐, 모든 것을 포괄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비전에 그들 자신을 맞춰가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런 비전은 간혹 자기모순적이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광적인 경향을 띤다.
이런 임의성은 역사를 다룬 어떤 글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은 무척 다양하지만 역사학자는 그중에서 한 단면, 예컨대 정치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을 선택해서 그 부분이 사회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실질적인 원인인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종교와 같은 영적인 요인, 달리 말해서 어떤 사건에나 개입되기 마련인 무수한 다른 요인들은 어찌 되는가? 톨스토이의 표현대로, 역사는 “인간의 실질적인 삶에서 0.001퍼센트”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결론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역사는 ‘정치적’ 사건, 즉 공적인 사건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반면에 정신적 사건, 즉 내면적 사건은 대부분 잊힌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현실적으로 가장 가깝게 부딪치고 경험하는 것이 정신적 사건이고, 최종적으로 삶의 버팀목이 되는 것도 정신적인 부분이다. 그런데도 역사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정치적인 면을 다루면서 이 부분을 간과한다.
1850년대에 들면서 톨스토이는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개인과 공동체의 ‘실제’ 삶을 역사학자들이 그린 가공의 삶과 뚜렷이 대비시키는 것이 역사소설을 쓰려는 주된 목적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전쟁과 평화》에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훗날 공식 발표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진 왜곡된 사실을 나열하는 예가 흔히 눈에 띈다. 더구나 그렇게 왜곡된 사실이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회고된다. 원래의 기억이 그들의 미덥지 않은 사고방식, 즉 기계적으로 합리화하고 형식화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왜곡할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에 의해 바뀌어가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들을 이런 현상이 뚜렷이 드러나는 상황 속에 끊임없이 놓는다.
톨스토이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근원을 간헐적이나마 어렴풋이 보았다. 그 때문에 모든 관례적인 설명, 즉 사려 깊지 못한 ‘양식’을 근거로 한 과학적 설명과 역사적 설명은 너무나 공허하게 들리고, 더구나 잘난 척하는 설명은 지독한 거짓말처럼 들린다. 톨스토이 자신도 진실이 ‘여기’, 즉 관찰과 구별과 건설적 상상력의 여지가 있는 영역, 요컨대 미시적 인식과 분석이 가능한 영역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톨스토이는 우리 시대에서 미시적 분석의 최고봉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보지 못했다. 그에게는 전체를 보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전체를 보는 것처럼 말했을 뿐이다. 그는 고슴도치가 아니었다. 고슴도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본 것은 하나의 일체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세분화되는 미세한 것들, 무수한 개체로 나뉜 세계를 보았다. 떨쳐낼 수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 재능, 곧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명철함이 톨스토이를 미치도록 분노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