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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해방전후사/한국전쟁
· ISBN : 9788994606040
· 쪽수 : 440쪽
· 출판일 : 2011-04-2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원칙과 상식을 낯설어하는 사회
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1945년 8월 1 ~ 15일
1945. 8. 1. 『해방일기』를 시작합니다
1945. 8. 2. 포츠담회담에 나타난 원자폭탄
1945. 8. 3. 폴란드의 해방 아닌 해방
1945. 8. 4. 모겐소가 부끄러워한 지독한 점령정책, ‘모겐소 플랜’
1945. 8. 5.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의 밥’
1945. 8. 6. 원폭의 참혹성은 인간성의 증발이었다
1945. 8. 9.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참극
1945. 8. 10. 일본의 항복 시점이 미ㆍ소 지분을 결정했다
해방의 시공간 - 1945년의 세계
1945. 8. 11. 미-소의 ‘눈치 보기’ 속에 그어진 38선
1945. 8. 12. 다급해진 총독부가 붙잡고 매달린 인물
1945. 8. 13. ‘항복’이라는 마지막 칼자루를 쥔 일본
1945. 8. 15. 일본이 망할 줄 시인은 정말 몰랐을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었나요?
2 항복을 선언했으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들 1945년 8월 16 ~ 31일
1945. 8. 16. 여운형ㆍ안재홍, ‘건국 준비’에 나서다
1945. 8. 17. 총독부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1945. 8. 18. 좌익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5. 8. 19. 조선의 기독교와 민족주의
1945. 8. 20. 식민지배가 키워준 지주층의 ‘민족자본’
1945. 8. 23. 소련군의 인민위원회 지지와 지원
1945. 8. 24. 정회(町會), 민중과의 접점
1945. 8. 25. 황폐한 이념시장 안의 ‘적대적 공생’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5년 8월과 9월
1945. 8. 26. 건준을 외면한 자본가 집단
1945. 8. 28. 얄타의 배신, 폴란드의 비극
1945. 8. 30. 해방을 맞은 임시정부의 모습
1945. 8. 31. 식민지시대의 엘리트계층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온 사람들
3 남과 북 점령군의 서로 다른 모습 1945년 9월 1 ~ 15일
1945. 9. 1. ‘건국’의 주체가 되지 못한 건국준비위원회
1945. 9. 2. 전쟁광 맥아더의 손에 맡겨진 극동지역
1945. 9. 3. 임시정부의 가치는 무엇에 있었는가?
1945. 9. 4.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의 결별
1945. 9. 6. 극좌와 극우의 대두
1945. 9. 7. 해방공간의 실패는 우익의 실패였다
1945. 9. 8. 건국동맹은 어디에 있었는가?
해방의 시공간 - 1945년 주요 정당의 계보도
1945. 9. 9. 미군과 소련군, 어떻게 달랐나?
1945. 9. 10. 좌익과 우익은 어떻게 구분되었는가?
1945. 9. 13. 하지 사령관의 첫 기자회견
1945. 9. 14. 유치하고 졸렬한 ‘인민공화국’
1945. 9. 15. 일본인 대신 ‘통치’하러 온 미군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해방은 독립운동의 종착점 아닌 출발점
4 댄스홀과 요정이 그토록 번창한 이유는? 1945년 9월 16 ~ 30일
1945. 9. 16. 한민당의 명분과 실제
1945. 9. 17. 미군정이 풀어준 폭력의 고삐
1945. 9. 19. 김일성의 등장
1945. 9. 20. 동아시아에서 수동적 태도였던 소련
1945. 9. 21. “친일파여, 떨지 마라! 한민당이 있다.”
해방의 시공간 - 정치 1번지 종로의 정치지형도
1945. 9. 24. ‘무조건 항복’에 임하는 일본인들의 자세
1945. 9. 27. 한 달간 통화량 70% 증가의 의미
1945. 9. 28. 에드거 스노가 본 한국의 소련군과 미군
1945. 9. 29. 국민당과 한민당의 다른 점
1945. 9. 30. 그 많은 돈을 일본인들은 왜 뿌리고 갔나?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1
5 남북 공산주의운동의 갈림길 1945년 10월 1 ~ 15일
1945. 10. 1. 독립운동 최대의 상징, 임시정부
1945. 10. 4. 한국인의 ‘준비된 근대어’, 한글
1945. 10. 5. 미군정, ‘어리석음’보다 ‘게으름’이 문제였다
1945. 10. 6. 단순치 않았던 임정 내부구조
1945. 10. 7. 세력확대를 위한 해방 후 임정의 노력
1945. 10. 8. 박헌영과 김일성의 만남
1945. 10. 11. 한민당과 아놀드의 찰떡궁합
해방의 시공간 - 일지로 보는 1945년 10월
1945. 10. 12. 자기 손으로 만든 박헌영의 지도력
1945. 10. 13. 남한의 공용어가 영어였던 시절
1945. 10. 14. 조직력의 박헌영과 대중성의 김일성
1945. 10. 15. 맥아더-이승만-하지, 무슨 음모를 꾸몄을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2
6장 제목 미정 제목 미정 1945년 10월 15 ~ 30일
1945. 10. 17. 염불은 싫고 잿밥만 좋았던 이승만
1945. 10. 20. 이승만은 친미파가 아니었다, 미국인이었다
1945. 10. 21. 하지에게 ‘군정’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1945. 10. 22. 도와주고는 후회하게 되는 사람, 이승만
해방의 시공간 - 돌아온 해외 운동세력
1945. 10. 25. 필리핀 지배가 신탁통치의 모범
1945. 10. 26. ‘한국인의 자치능력’ 억누른 게 누군데!
1945. 10. 27. “주여, 하지는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1945. 10. 28. 민심에 역행한 미군정 정책
1945. 10. 29. 미군정이 만들어준 ‘적대적 공생관계’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점령군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프랑스는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 초청받지 못했다. 전승국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포츠담회담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분할점령의 주체로 결정된 것은 연합국으로 인정받은 결과다. 그같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1940년 7월부터 1944년 8월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모든 나치 협력을 ‘반프랑스’ 또는 ‘비프랑스’적인 것으로 규정해야 했다.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프랑스 정치계만이 아니라 학계에서도 대세이지만, 이것이 현실정치의 필요에 얽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지워버릴 수 없다. 국가적 책임을 회피하는 부도덕성에 대한 지적도 있다. 1995년 시라크 대통령이 연설에서 비시 정부 시절 경찰의 나치 협력을 사과한 일이 있다. 르팽 같은 극우파는 비시 정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의회 의결에 따라 세워진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직도 프랑스 역사의 짐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 사회는 나치 협력 문제를 놓고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을 해왔다. 거기에서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협력자(collaborateur)’와 ‘협력주의자(collaborationniste)’의 구분이 그런 예의 하나다.
1945년 9월에 유통되고 있던 조선은행권의 20% 가량이 최근 한 달 동안 어떤 경로로 해서 어디로 풀려나갔는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의 조선처럼 생산력이 저하된 상태의 사회에서 현금은 매우 큰 힘을 가진다. 숙식만 제공해도 수많은 유민을 조직할 수 있고 약간의 용돈만 뿌려도 수많은 시위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정선거의 대명사가 막걸리와 고무신 아니었는가. 돈이 흔해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큰 힘을 당시의 돈은 발휘했다.
9월 17일 인용한 글에 “이철승은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김성수 댁을 거쳐 전용순 댁에 가서 활동자금을 타내고, 김구 댁인 경교장, 조소앙, 신익희 등 임정요인들이 묵고 있는 한미호텔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였다”라고 한 대목이 있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33쪽). “인촌의 주머니가 바로 이철승의 주머니”라는 말도 있었다. 1945년 연말부터 나타난 반공조직의 배경에는 강한 자금력이 있었다.
그리고 어제 말한 ‘사랑방 정치’의 비용에서 명월관, 국일관의 수많은 잔치들까지. 그리고 이승만과 김구 등이 귀국했을 때 제공된 정치자금까지. 아무리 재력가 그룹이라도 당시 상황에서 놀라운 수준의 현금 동원능력이었다. 해방 후 몇주일 동안 총독부는 막대한 금액의 돈을 풀었고, 그후에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보인 집단이 나타났다. 그 사이의 연결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해방 직후 서울시내 여기저기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타나 우리를 지도해 주시오!” 하는 벽보가 나붙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벽보를 본 사람들 중에는 박헌영(1900~1956)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고, 아는 사람들 중에도 왜 그 사람이 꼭 나타나서 지도해 줘야 하는지 납득 못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박헌영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몇해 전 시내 여기저기 “선영아, 사랑해!” 플래카드를 내걸어 화젯거리를 만든 것과 같은 일종의 티서 광고로 볼 수 있겠다. 혹시 “선영아, 사랑해!”의 기획자가 박헌영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박헌영이 도덕적 권위보다 현실적 효과를 중시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인생의 여러 굴곡을 더 알게 되면서 불법투쟁이 생활화된 인물다운 현실주의자라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유물론에 대한 믿음이 윤리와 도덕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뒷받침한 면도 있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