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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상에세이
· ISBN : 9788996006589
· 쪽수 : 344쪽
책 소개
목차
1 머릿속에서 슈베르트가 맴돈다
2 오늘 아침은 호도애 소리에…
3 오전 나절 우리는 구불구불한 길을…
4 그리부예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5 여행을 하면 수 없이 많은 것들과 …
6 우리는 오래된 떡갈나무 아래에서…
7 그리부예가 떨기나무를 먹고 있는 동안…
8 위에서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9 늦은 오후, 우리는 그림 같이…
10 자! 이제 높은 곳으로 떠나자!
11 그리부예, 너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12 하늘은 한 점 구름 없이 푸르다
13 이제 나의 하루는 오롯이 나 자신의 것…
14 우리는 양떼와 소떼들 사이로…
15 당나귀는 통증역치가 높아…
16 오트-루아르 지방은 조용한 친구들끼리…
17 나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18 생명의 정수인 이슬이 떨어지고 새벽이 스며든다
19 미셸과 프랑수아에게 작별인사를 마치고 나서…
20 어른이 된 이후 나는 늘 소음에 시달려왔다
21 투명한 반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22 유백색 빛이 대지를 감싼다
23 오늘 아침은 조금 늦게 길을 나섰다
24 당나귀 행성에 새로운 아침, 새로운 하루가 열렸다
25 나는 나의 구슬, 시력이 안 좋은 눈…
26 우중충한 기숙사에서 눈을 뜬 …
27 우리는 마을의 중심부인…
28 당나귀의 꼬리에는 뭔가 굉장히 민주적인 데가 있다
29 하지만 롤로의 꼬리 이야기는 슬프게 끝난다
30 자, 떠나자!
31 당나귀의 다리는 내 두 손 안에…
32 기자는 환상적이고 이국적이고…
33 다시 굵은 알돌과 잘못 뻗어 나온 나무뿌리가 뒤엉킨…
34 야노프는 환자들을 치료할 때 당나귀를 보듬어…
35 파란 털 당나귀의 울음소리에 화답하는…
36 나는 당나귀의 치료적인 효과에 관해…
37 우리는 아직도 굽이진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
38 우리 집 뒤뜰에 있는 그리부예와 함께 한 이틀은 꿈처럼 달콤했다.
39 우리는 그리부예를 돌려보내야만 한다.
40 차가운 바람이 귓속에서 휙 소리를 낸다.
감사의 말 | 8,000년을 인류와 함께 삶의 질곡을 걸어온 오래된 친구 당나귀에게 바치는 오마주
리뷰
책속에서
내 천성이 당나귀의 천성을 닮기 시작하면서 평온한 공백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 내가 가진 것,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공허하고 텅 빈 느낌과는 다르다. 나는 그저 그와 함께 하는 일에 집중한다. 과거도, 미래도 없다. 지금 그리고 여기, 절대적인 현재만 있을 뿐이다. 나는 맨몸으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부예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고, 한 푼도 갖고 있지 않고, 먹고 마시고,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당나귀처럼. 지금 이 모습이 바로 나다. 단 하나의 자아. 그것뿐이다. 자신을 당나귀의 세계에 들여놓고 천천히 걸으면서 깊게 숨을 들이쉬면 평온함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일이 단순하고 확실해진다. 민들레를 먹는 일처럼 ―본문 147쪽
이것은 독일 리트에서 영감을 얻어 시인 하이네와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F단조의 낭만적인 독창곡들과 발라드로 이어진다. 당나귀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낭만과 애수다. 브레송은 당나귀의 송가로 기가 막힌 주제곡을 선택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갖는 신비한 힘은 당나귀의 울음소리처럼 대지를 뒤흔들어놓는다. 따듯한 당나귀 털의 부드러움, 순수한 “무심함”의 응시, 산 위의 평원, 양의 목에 매달린 종소리, 당나귀의 죽음을 동시에 나타낸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평생 동안 고생만 하고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텅 빈 들판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가는 모든 이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다. 그것은 우리들의, 당나귀처럼 살아온 우리들의, 절망에 물든 희망의, 영혼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의,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다. ―본문 173쪽
사람들은 대개 가장 빠른 길로 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가장 좋고 바람직한 길이라고 여긴다. 물론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일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하는 길은 길이 막히기 십상이어서 천천히 가게 되고, 그 결과 먼 길로 가는 것보다 더 늦게 가게 된다. 그렇다고 중간에 다시 돌아오거나 다른 길로 우회하기는 어려워서 어느 순간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만다. 물론 자기주장대로 간 사람이 막다른 길에 이르거나 잘못된 쪽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신은 아시리라, 나도 몇 번 그런 적이 있다. 미국으로 가겠다는 결심은 아마도 잘못된 길이었고, 빨간 신호등에서 좌회전을 한 셈이었을 것이다. 모르겠다. 하지만 가다 보면, 특히 다시 되돌아가야 할 때 뜻밖의 일이 생기기도 한다. 미지의 영역이 어렴풋이 보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 만남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면 일이 잘 풀린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본문 183쪽
나는 온전히 여기에 있고, 여기에 현존하는 나 자신과 대면해야만 한다. 놀랍게도 나는 이것을 깨닫는 데 굉장한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 나는 공허감을 느꼈다. 일종의 금단증상이었다. 부산스러움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환경을 너무 갑자기 바꾸려고 했던 데서 오는 부작용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나는 주위의 누구와도 면식이 없는, 이상한 말투로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눈에 띄는 이방인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점점 자의식이 강해졌다. 강한 자의식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한때 속해 있던 곳에 더 이상 속해 있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속해 있지 않다는 무서운 결핍감에 시달렸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무 곳에서도 속해 있지 않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조금씩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허감이 차츰 채워지고 겸손한 풍요로움이 어느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맑고 투명한 존재감이었다. ―본문 236~237쪽
소설 <느림 La lenteur>에서 밀란 쿤데라는 속도라는 악마는 망각과 회피를 동반하고, 느림은 기억과 대면을 동반한다고 썼다.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싶을 때, 다른 사람과 세상에 귀 기울이고 싶을 때 우리는 속도를 늦춘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싶을 때도 느리게 행동한다. 속도를 늦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대의 바쁜 생활 속에서 우리는 관찰하고 듣고 한발 뒤로 물러서서 생각하고 명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쿤데라는 우리 사회가 떨리는 기억의 작은 불꽃을 훅 불어서 꺼버리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새들은 여전히 지저귀고 있고 태양은 산 너머로 사라지고 있다. 멀리 건초더미가 쌓여 있는 들판에 트랙터 한 대가 지나간다. 현대인의 바쁜 생활도 요즘의 내게는 먼 나라 일이다. ―본문 15~16쪽
나는 이제 더 이상 뉴욕의 보도에서 앞사람을 밀면서 걷고 있지 않으며 차에 앉아 스트레스에 가득 차 있지도 않고 꽉 막힌 고속도로 한가운데 있지도 않다. 흙으로 뒤덮인 길을 당나귀와 걸어가는 일은 도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르다. 인내심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에 떠 있는 요트나 아기요람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는 백일몽이 된다. 그것은 정확한 발걸음의 리듬을 즐기는 데서 나오는 선물이다. 느릿느릿 더 멀리 걸어가면서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지속되게 하는, 그래서 모든 빛나는 충만함으로 연결되게 하는 데서 나오는 선물. ―본문 51~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