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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불교 > 불교명상/수행
· ISBN : 9788998742461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15-03-12
책 소개
목차
1장 삶을 멋지게 즐기는 법
선지식을 가까이해서 닮는 연습을 하라 14
성품을 보려면 시비 분별심을 쉬어야 한다 18
순간순간 깨어 있는 삶을 살라 22
달마 대사의 신발 한 짝 26
차원에 따라 선악의 구분법도 달라진다 32
본래 죄인인가? 본래 붓다인가? 36
누가 그대를 묶었는가? 42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46
2장 문 안의 수행 문 밖의 수행
어찌 불성(佛性)에 남북이 있겠는가? 52
본래 한물건도 없거늘 어찌 먼지를 털 필요가 있으랴 58
집착에서 벗어나면 저승사자도 데려가지 못한다 65
좁쌀처럼 쓸 것인가, 우주처럼 쓸 것인가 68
깨달으면 스스로 건넌다 73
성품은 닦을 필요 없이 리셋 버튼만 누르면 된다 76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말라 80
자기 잣대로 판단하지 말고 관찰자가 되라 86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경지가 삼매다 90
성품에 초점을 맞추는 문 안의 수행으로 전환하라 94
구걸하지 마라, 평생을 써도 남아 도는 보배가 있다 99
3장 텅 빈 충만
모든 존재는 그대로 다 불성의 드러남이다 104
텅 비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다 108
산중수행이 필요한 까닭 112
좋은 목재는 심산구곡에서 나온다 116
본래 부처라는 지견으로 바라보고 행동하라 120
리셋만 하면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124
우주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128
몸이 가든 몸이 오든 본래 삼매로다 132
한 무더기 냄새나는 뼈다귀 140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으뜸가는 정진이다 146
4장 참선의 핵심 키워드
닉네임 사용, 관찰자가 되어 성품을 보라 156
관찰자를 관찰하라 160
관찰자 효과로 걱정?근심에서 벗어나라 164
자기가 연습한 그대로 받는다 168
굴림을 당할 것인가? 굴릴 것인가? 174
아만의 깃발을 꺾는 절 수행 178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 182
아이가 어른이 되듯이, 불자(佛子)가 불(佛)이 된다 186
로히니 공주의 일화에서 과거와 미래에 이어지는 오늘을 본다 190
석가도 아직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 196
5장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기왓장 갈아서 거울 만들기 204
신회가 서자 되고 회양이 적자 되다 207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의 다리는 짧다 210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214
수행과 깨달음, ‘유리 조심’ 붙였다 떼기 218
수레를 칠 것인가? 소를 칠 것인가? 222
프레임의 법칙, 관점이 바뀌면 인생이 달라진다 228
자기가 연습한 대로 평상심이 드러난다 232
삼매의 꽃은 모양이 없다 236
6장 평상심이 도(道)
보고 듣고 느끼되 걸리지 않고 매이지 않는다 242
성질을 내면 먼저 자기 자신이 괴롭다 246
물같이 무심하게 살라 250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254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258
순간순간 깨어 있는 삶, 완전 연소하는 삶 261
죽음의 왕도 보지 못하는 법 265
모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중생 제도를 다 마쳤다 270
온 세상은 한 송이의 꽃 274
쌍계사 금당선원 벽화에 담긴 깨달음 278
깨달음의 빛, 행불(行佛) 282
책속에서


“성품이 만법을 창조했으니 우주보다 더 큰 게 성품입니다. 우주가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성품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내 몸 속에도 있고 내 몸 밖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성품 속에 마음이 있고 마음속에 몸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을 내 몸보다 더 크게 쓸 수 있습니다. 마음을 크게 써야 다른 사람들을 다 포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좁쌀같이 작게 쓸 수도 있고 우주처럼 크게 쓸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이 우주처럼 커져야 우주를 다 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몸 안에 있다면 내 몸보다 큰 것은 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우주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음을 쓴다면 좁쌀 같았던 마음도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우주를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늘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대며 살아갑니다. 선악의 잣대로 재고 선악에 걸리는 것은 세속의 가치이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의 세계는 아닌 것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점을 잘 간파하고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선악의 저 편에 있다”고 했습니다. 선악의 이분법적인 사유를 넘어서는 것이 불교요, 특히 선불교의 세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