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액션/스릴러소설 > 외국 액션/스릴러소설
· ISBN : 9791130628578
· 쪽수 : 512쪽
· 출판일 : 2020-02-20
책 소개
목차
1~80
리뷰
책속에서
“당신은 인지 언어학자잖아.”
빈 접시를 모으던 패트릭이 스티븐에게도 접시를 치우라고 재촉하며 내게 말했다.
“그랬었지.”
“지금도 그렇지.”
1년 동안 그렇게 연습했는데도, 결국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지금은 아니라니까.”
패트릭이 세 단어를 체크하는 나의 카운터를 지켜봤다. 내 맥박을 촘촘하게 억누르는 압박감이 불길한 북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만 됐어, 진.”
패트릭이 말했다. 아들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카운터가 세 자릿수를 넘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 0, 0. 이제 월요일의 마지막 단어를 말할 때였다. 바로 내 딸에게. 내가 소니아에게 속삭이듯 ‘잘 자렴’이라는 말을 간신히 내뱉었을 때, 나를 바라보는 패트릭의 간절한 눈빛과 마주쳤다.
나는 소니아를 안고 침대로 갔다. 이제 소니아도 꽤 무거워졌다. 더는 가뿐하게 들 수 없을 만큼 많이 자랐다. 그래서 양팔로 번쩍 들어 올려야 했다.
소니아가 침대에 눕자마자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늘 그렇듯 잠자리 동화는 없다. 탐험하는 도라(Dora) 도 없고, 곰돌이 푸(Pooh)와 피글렛(Piglet)도 없고, 맥그리거 씨의 상추밭에서 일어난 피터 래빗(Peter Rabbit)의 작은 소동에 대해서도 들려줄 수 없다. 소니아가 이런 삶을 정상이라고 여기며 자라는 게 두렵다.
_ Chapter1
그때 초콜릿 아이스크림 세 개를 가지고 소파로 돌아오던 스티븐이 텔레비전에 등장한 여자를 가리키며 ‘신경질적인 여자’라고 했다.
신경질적. 나는 그 단어가 싫었다.
“뭐라고?”
내가 말했다.
“여자들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스티븐이 말을 이었다.
“뻔히 아는 얘기잖아요. 엄마도 알다시피 여자들은 신경질적인데다 보통 엄마들도 툭하면 욱하니까요.”
“뭐?”
내가 다시 말했다.
“대체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니?”
“오늘 학교에서 배웠어요. 쿡인지 뭔지 하는 놈이 그랬대요.”
_ Chapter3
우리는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다. 책도 모두 빼앗겼다. 그들은 글자가 있는 모든 것을 책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 의 책을 복사한 오래된 원고부터 친구가 장난삼아 결혼 선물로 준 빨간 체크무늬 표지의 낡은 요리책까지, 소니아가 손댈 수 없는 수납장에 갇혀 있었다. 분명 내 책들이지만, 나 역시 그 책에 손댈 수 없었다. 패트릭은 마치 운동 기구처럼 수납장 열쇠 외에도 각종 열쇠를 한 덩어리로 묶어 들고 다녔다. 가끔 그 열쇠 꾸러미가 주는 부담감 때문에 패트릭이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건 사소한 것들이다. 모든 방마다 꽂혀 있던 펜과 연필, 요리책 사이에 끼워놓은 메모지, 싱크대 옆 벽에 쇼핑 목록을 적는 용도로 붙여두었던 메모 보드. 심지어 스티븐이 깔깔거리며 냉장고에 붙여놓았던, 우스꽝스러운 이탈리아식 영어 문장의 자석들까지. 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마치 내 이메일 계정처럼.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_ Chapter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