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후기(영조~순종)
· ISBN : 9791156122708
· 쪽수 : 724쪽
책 소개
목차
책을 내면서
서설-동아시아 삼국의 청일전쟁사
청일전쟁 주요 연표
[1부] 은폐와 진실: 일본군의 왕궁 점령과 ‘보호국’ 구상
1. 일본군의 조선 왕궁(경복궁) 점령에 대한 재검토
1—조선 파병 결정과 전쟁으로 가는 과정
2—왕궁 점령 실행의 구체상
왕궁 점령계획과 세부 기획자들|왕궁 점령의 실제 상황|일본 측의 사후 조치
3—왕궁 수비병의 활동에 대한 재인식
2.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대한 반향
1—피란과 그 후유증
‘서울 엑소더스Seoul Exodus’|지방의 사례
2—민심 수습책과 서울 빈민 조사
3—인식론의 방향
왕실의 ‘이중외교’|정부 관료의 입장|재야유생과 의병의 논리|동학농민군의 인식과 대응
3. 청국군의 동향과 일본군의 출동
1—청국군의 출병과 동원
병력 편성과 출병|청국군의 요구사항과 영접 준비|영접관 편성과 영접 내용|동원 내용 분석|동학농민군 진압 준비
2—일본군의 조선 파병과 동원
대본영의 출병계획과 실행|혼성여단의 아산 출병|물자와 인부 징발|병참체계 구축
4. 일본의 조선정책: ‘보호국’ 구상과 실현 과정
1—전시 조약과 장정의 강제
〈조일잠정합동조관〉과 〈(조일)양국맹약〉|〈신식화폐 발행장정〉 시행
2—‘보호국화’의 내용과 결과
3—보호국 프로젝트의 연쇄
[2부] 야만의 전쟁과 휴머니즘: 풍도 해전․성환 전투
1.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
1—풍도 해전과 지역민
풍도 해전과 결과|지역민의 대응
2—성환 전투와 청국군의 ‘선승후패’
3—청국군의 패주
4—프랑스 신부 살해사건
5—조선인 피해 상황
2. 동원 시스템과 군표 발행계획
1—동원 시스템
일본인 인부 모집과 파견|조선인 인부 동원
2—대용증권(군표) 발행계획
3. ‘야만의 전쟁’과 선전
1—일본군 서울 개선식과 전리품 순회 전시
2—‘전쟁영웅’의 신화와 현실
3—‘황은皇恩’으로 은폐된 가족의 비극
4. 전쟁과 언론인의 윤리와 책임
1—종군기자: 전쟁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
2—일본 주요 언론에 보이는 ‘조선 이미지’
김옥균 암살 관련 보도|동학농민군 관련 보도|관군․청국군과 일본군에 대한 상반된 논조|정치․사회상의 왜곡 전달
3—한 일본인 종군기자가 본 청일전쟁과 조선: 니시무라 도키스케의 《갑오조선진》 분석
니시무라 도키스케의 행적|서울 사정과 민심 동향|주요 정치가와 ‘조선 개혁’|일본군과 청국군․조선 군인들|동학농민군의 동향
[3부] 반성 없는 역사의 반복: 평양 전투와 평안도의 현실
1. 평양 전투 직전 청․일군의 동향
1—후발 청국군의 인력 동원․징발과 민원
청국군의 평양 도착|물자 및 인력 징발|전쟁 준비와 동향
2—일본군의 인력 동원과 현지 징발
북상 행군|비협조 관리의 교체|인마 징발의 실상
3—중화 전투와 지역민의 반일운동
일본군 선발정찰대 파견과 전투|현지 주민의 저항
2. 평양 전투의 내용과 평가
1—선교리․모란대․현무문 전투
선교리 전투|평양성 전투|전투 결과
2—청국군 패주 후의 상황
‘평양 제노사이드Pyongyang Genocide’|량치차오와 청국 정부의 패인 분석|일본군 제1군 사령부 편성과 북상
3—전쟁특수와 모험상인
3. 평양과 평안도의 현실
1—‘전시 대징발’
물가 폭등과 한전 시가 앙등|징발의 여러 사례|되돌려받지 못한 군용수표
2—지역별 황폐상과 후유증
경기 북부․황해도․평안도 상황|패잔 청국군의 음행과 노략|일본군의 일탈과 지역민의 질고|병참부의 촌락 및 가택 수색
3—청국군 포로와 조선인 참살 사례
평양 전투 포로 참수|참살의 일상화
4. 북진 물자와 노동 인력
1—수송과 병참
인원 편성과 수송|병참지 상황
2—임금과 인력
임금 지급체계의 혼선|일본인 인부들의 패행
3—압록강 전투와 조선인 인부의 도강
맺음말을 대신하여- ‘유원지의’와 ‘내자불거’의 상생 네트워크
주
찾아보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청일전쟁의 첫 단추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이 사건의 경위에 대해 일본군 보병 1개 연대와 포병, 공병이 조선 정궁인 경복궁에 입성하려 할 때 조선군이 발포했기에 일본군이 이를 추격하여 궁궐로 들어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메이지 27년 7월 23일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일본 참모본부도 이를 ‘한병韓兵의 폭거’라 하면서 우발적 사건으로 축소하여 기술하였다(38쪽).
일본군의 조선 출병의 가장 큰 명분은 일본인 ‘거류지 보호론’이었다. 일본은 동학농민군이 투쟁을 중단하면서 조선의 치안이 진정됨에도 불구하고 이 ‘거류지 보호’를 들어 출병했다. …… 그러나 일본 조계는 인천 주재 영사 노세 다츠고로를 통해 혼성여단의 인천 진주에 대해 항의했다.
7월 23일 당일 오토리 공사는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궁궐 부근에서 조선 병사가 “아무 이유 없이” 일본 호위병에게 발포하여 부득불 대응 차원에서 발포하게 되었으니, 조선 정부가 “부당한 행위”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조회했다. 이에 대해 7월 24일 조병직은 궁궐 밖이 아니라 궁궐 안으로 일본군이 “난입”함에 따라 총격전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일본군은 즉시 궁궐에서 철수하라고 주장했다.
조일 양국 간 병력 교체는 왕궁을 점령한 지 한 달여 만인 8월 24일 오전 11시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궁궐에서 철수한 일본 군대는 광화문 바로 옆의 장위영으로 이동하여 일정 기간 주둔했다. …… 일본의 궁궐 내 경찰 파견에 대해 조선 정부는 반발했으나, 결국 일본이 무기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입궁하는 모든 사람은 일본군의 증명서를 받아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통행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