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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플라톤.벤야민.들뢰즈.보드리야르의 이미지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박치완 (지은이)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2016-03-11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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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책 정보

· 제목 :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플라톤.벤야민.들뢰즈.보드리야르의 이미지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서양철학 일반
· ISBN : 9791159010590
· 쪽수 : 352쪽

책 소개

철학적인 측면에서 이미지 범람 시대를 진단해보고, 이미지의 본래적 지위를 재고할 필요를 담은 책이다. 이데아와 실재, 실재와 이미지, 이미지와 시뮬라크르의 관계를 정의해보고 현대의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 실재에 대한 재물음을 담았다.

목차

제1장
플라톤의 실재: 이데아의 부산물인가, 이미지의 거울인가? 19
- 플라톤의 실재관에 대한 현대적 해석

제2장
비진리의 상징인 시뮬라크르의 예찬, 가능한 철학적 제안인가? 49
- 질 들뢰즈의 「플라톤주의의 전복」에 대한 비판적 해석

제3장
가상의 시뮬라크르를 통한 실재의 전복, 그 저의가 뭘까? 87
- 쟝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소비의 사회』에 대한 진단

제4장
가상 세계의 공포: 스펙터클의 지배와 인간 소외 131
-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가 주는 교훈

제5장
벤야민의 기술복제, 가능성 논제인가 당위성 논제인가? 169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재고

제6장
재현파괴 논쟁과 실재에 대한 되물음 223
- 재현도 재현파괴도 공히 재현행위이다

제7장
비가시적 세계의 형상화로서 이미지 개념 281
- 쟝 피에르 베르낭의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유』를 중심으로

부록
참고 문헌 321
찾아보기 333

저자소개

박치완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및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고, 프랑스 부르고뉴 대학(Univ. de Bourgogne)에서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호모 글로칼리쿠스』,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가 있고, 공저로는 『공간의 시학과 무욕의 상상력』, 『비주얼 컬쳐 시대의 이해』, 『지식의 역사와 그 지형도』, 『문화콘텐츠와 문화코드』, 『근대한국, 개벽사상을 실천하다』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아직도 보편을 말하는가?, 「동일성의 폭력과 차이의 허구」, 「의심의 ‘한국’ 철학, 한국에서도 철학을 하는가?」 등이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책을 출간하며

1
19세기 후반 TV와 영화의 등장과 함께 이미지가 인류에게 놀라운 신선함으로 등장한지도 어느덧 두 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이 시대에 디지털이미지는 너무도 대중에게 익숙해진 상태라서 이제 지구촌 시민들은 더 이상 이미지에 그 어떤 놀라움도 느끼지 못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 작금의 디지털이미지는 놀라움 대신 자유로운 표현 방식과 흥미로운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유혹할 뿐이다. 즉 대중을 얼마나 더 직접적으로 자극시킬 수 있는가라는 기술적 문제가 이미지들을 어떻게 배치하여 소비 대중을 매혹시킬 수 있는가라는 자본의 전략과 은밀하게 결속돼 이름 하여 ‘이미지’는 오늘날 날-욕망의 자극제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현실 앞에서 ‘이미지의 시대’라는 정의는 다소 진부해 보일 수도 있다. 이미지는 현 인류의 삶 전반과 구분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고, 마치 공기나 바람처럼 거의 매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이렇게 우리의 삶의 영역을 둘러싸고 깊숙하게 침투하였다는 점을 전제로 해서 이미지를 단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매개이자 소비의 대상으로만 이해해야 할까? 만약 이미지를 그러한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면, 이미지는 기술과 자본 그리고 욕망의 삼각형이 생산하는 전략적 담론의 예속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욕망의 표피를 가볍게 건드린 후에 휘발되어버리는 이미지, 이미지를 그렇게 소비하도록 만드는 기술적으로 조작된 매개, 그리고 이의 소비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의 승리!?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본에 의해 아주 세심하게 고안된 전략이 성공하느냐 혹은 실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전략은 성공하면 원래 계획한 대로 반복되거나 확장될 것이고, 실패하면 수정되거나 새롭게 고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전략의 실패는 있을 수 있어도 자본의 전체적인 전략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전략에서 늘 전위대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미지가 문제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미지는 이렇게 늘 부차적인 것에 그치는가? 이미지에 다른 가능성, 역할은 없는 것인가? 왜 이미지는 자신의 존재 항명을 하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을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의 영역에서 이미지를 둘러싼 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떠올려보도록 하자. 철학에서 일종의 고유명사로 이해되기도 하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모델’은 이미지의 위상(位相)을 언급·선고한 최초의 철학적 규정이다. 질베르 뒤랑에 따르면 철학자들에게 이미지란 근현대를 경과하면서도 여전히 플라톤 방식의 ‘환영(phantasma)’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현실이다. 그 정도로 이미지란 그 본래적 기능과 역할이 폄훼되었고, 철학자들 역시 이미지를 ‘골치 아픈 대상’으로 여겼다. 이미지는 감각을 통해 정신에 포착되지만 이내 사라져버리는 애매한 존재적 성격과 상상력이라는 정신의 기능에 의해 자유롭게 생산되지만 그 스스로는 결코 대상과의 일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불변하는 참된 존재와 진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철학자들에게 이미지는 늘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구체적 언급을 꺼리는 예가 많았다. 그러니까 철학자들은 이미지를 존재의 위계 하부에 위치시키거나 이성의 개입을 통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비록 철학자들은 이미지를 여러 형식과 내용으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존재의 주변부 혹은 인식의 오류라는 영역에 강제한 셈이며, 이미지는 이렇듯 존재의 위계와 인식의 질서를 철학함의 본질로 여긴 교조주의적 이성에 의해 아고라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의 시대’라는 다소 철지난 정의와 함께 종종 언급되곤 하는 ‘시뮬라크르’는 일견 존재의 위계에서 유폐되고 인식의 질서에 의해 추방되었던 이미지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한 철학의 새로운 기폭제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판 이미지들은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 존재나 진리에 다가서기보다 오히려 주변부성, 오류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기술과 자본 그리고 욕망의 삼각형에 의해 조작되고 배치되어 유포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철학자들이 부과했던 위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극과 유희의 매개가 되어버린 이미지는 오히려 철학자들의 지적 노력의 대상이 되었던 과거보다 더욱 저열한 것으로 변질된 것인지 모르겠다. 상품과 하나를 이루고 삶 전체에 너무나 밀착해버린 이미지는 이제 진지한 숙고의 주제조차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처럼 이데아와 시뮬라크르는 철학사에서 이미지가 부여받았던 위상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미지에 대한 두 극단적인 시각을 대표한다. 하지만 이 두 시각은 이미지를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이미지에 부과된 ‘환영’이라는 규정은 이미지의 시대라고 불리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데아와 시뮬라크르 간의 차이란 고작 이미지의 생산력을 지성과 이성의 질서에 복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기술과 자본 그리고 욕망의 삼각형 속에 가둘 것인지에 따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가 근 10여 년간 이미지에 대해 다루었던 논문들을 하나의 저서로 묶기 위해 선택한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라는 제목은 그저 이미지의 위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려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를 바라보는 두 극단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논증하고 호소하기 위한 것 역시 아니다. 오히려 본 저서에서는 이 두 극단을 철학적으로 검토하면서 이들에게 공유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가시화되지 않은 규정이 있다는 것을 밝혀보려고 애썼다. 그러한 노력 그리고 이를 통해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규정 가능성을 탐색해보려는 필자의 무의식은 거의 모든 장에 걸쳐 은밀하게 표출되어 있을 수도 있다.

2
지금까지 우리가 간략히 살펴본 이미지의 위상에 기초해서 볼 때, 현대라는 시대적 특수성 속에서 이미지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한 부류는 우리가 일상의 현실 속에서 다양하게 접하며 체험하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 즉 비주얼화되어 소비되는 이미지에 대해 새로운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제시하려는 입장이다. 이들은 이미지를 근대의 활자문자 시대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탈근대적 사유 매체로 적극 자리매김하고, 이를 마치 현대사회의 새로운 인식소로까지 위치시키는 다소 극단적인 노선을 취한다. 우리가 이들을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이들이 강조하는 이미지(image visuelle)에는 근본적으로 이미지의 전통적 의미와 가치, 정확히 말해 이미지의 정신성(신성성) 등이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말하는 소위 ‘의미 없는 이미지(image sans signication)’는 ‘기의 없는 기표(signiant sans signi?)’의 옷을 입고 시뮬라크르나 스펙터클이 되어 대중에게서 소비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이들에게 있어 이미지는 기표의 유희, 무의미성의 추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주지하듯,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그 극점에 있다. 생성과 변화의 철학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들뢰즈도 이미지에 대해서는 보드리야르와 크게 구분되지 않는 노선 위에 서 있으며, 이는 「플라톤주의의 전복」, 『차이와 반복』 등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의 맥루한이라고 평가받는 플루서도 『피상성 예찬』에서 ‘깊이 없는 표면적 그림’으로서 디지털이미지를 예찬하면서 손이나 눈보다 컴퓨터 좌판 위에서의 손가락의 놀림에 마법사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반면 또 다른 부류는 오늘날과 같은 과잉 이미지적 표현, 과잉기표의 확산으로 인해 이미지가 가졌던 본래적 의미(Imago Dei)가 철저히 왜곡되고 있다며 볼멘 목소리를 외치는 그룹이다. 이들에 따르면, ‘이마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미지는 그리스·로마시대만 해도 정신성, 신성성의 담지자였고, 도시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며, 이러한 측면이 어떻게든 회복되기를 희망한다. 오몽이 이미지를 ‘천상의 비물질적 실체’라고 강조했던 것도(오몽, 2006: 433-434), 드브레가 이미지를 정신성과 신성성의 ‘승화된 연장’으로 보았던 것도(드브레, 1994: 25), 베르낭이 이미지에 ‘신의 자리(hedos)’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도(베르낭, 2005: 400), 뒤랑이 n-세대들이 작금의 감각화된 이미지의 범람으로 인해 겪게 될 위험을 일찍이 경고했던 것도(뒤랑, 2003: 125-126) 모두 스펙터클화된 이미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그러니까 이미지가 현대처럼 시각화되고 디지털화되어 인간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사유의 천공(天空)까지 뒤덮고 있는 세태를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시대에 앞서서 염려했던 것이다. 결국 이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연구자들은 이미지가 현대처럼 단지 시감각적 카타르시스나 지적유희 또는 소비의 대상 또는 광고의 노리개 등으로 치부되어서는안 된다는 입장이다. 뒤랑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이미지, 전시가치가 유일한 목표인 비주얼 이미지를 언급하며 ‘호모사피엔스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고 경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말해, 현대인은 의미나 가치보다 유희거리, 볼거리를 추구한다는 말과도 같다. 현대인은 이미지를 정신과 영혼의 정화기능으로서보다 철저히 욕망과 소비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들의 문제의식은 이미지에서 오직 물성(物性)만을 부각시키고 있는 시대적 유행과 경향에 제동을 거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며, 다소 훈고적일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미지 이해에 일말의 반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는 귀 기울여야만 하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오죽했으면 뷔넨뷔르제는 ‘위기’라는 표현까지 구사했겠는가(J.-J. Wunenburger, 1995: 137-145).
이렇듯 이미지의 논의는 크게 두 줄기의 상반된 입장이 상존하는가 하면 그 논의 범위 또한 매우 넓다. 유평근·진형준도 지적하듯, 이미지는 표현 매체나 표현 형태 및 생산 기술이나 재생 양태 등에 따라 유동적이고 일시적인 이미지와 고정된 이미지, 가시적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이미지와 비가시적 세계를 형상화한 이미지, 자연적 이미지와 디지털 정보의 종합으로 재구성된 이미지, 회화나 조각 같이 독일(獨一)한 이미지와 사진이나 판화처럼 복제 가능한 이미지 등으로 나뉜다. 이처럼 우리 앞에는 참으로 다양한 이미지가 존재하고 있다(유평근·진형준, 2001: 38-60).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본 저서에서 다루는 이미지의 논의 범위는 제한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논점도 기본적으로 이데아↔ 실재 ↔ 이미지 ↔ 시뮬라크르라는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출발해 이에 대한 들뢰즈나 보드리야르의 일종의 ‘전복’ 시도가 정당한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 과정에서 특히 현대의 전자·정보시대에 이르러 문자 그대로, ‘아무 의미도 없이’ 소비되고 사라져버리는 ‘위기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는 것이 주목표였다.
‘이미지의 범람’이란 표현은 곧 이미지의 거처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신성에서 물성으로, 인간에서 기계와 정보로 변했다는 것에 대한 증좌이며, 그리스·로마시대처럼 한 때는 ‘초월적인 것’의 담지자였던 것에서 ‘무의미 그 자체’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미지는 이제 TV나 광고, SNS 등을 통해 일상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처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대중을 현혹하며 대중에게 접근하는 ‘스펙터클화된 이미지’는 철저히 이미지 공급자와 자본 및 욕망에 결탁되어 있다(드보르, 1996). 이런 까닭에 이제 우리는 이미지를 단지 눈에 보이고 욕망이 작동되는 감각(시각)적 이미지만을 배타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출발한 본 저서이기에 그 논의의 줄기를 플라톤 → G. 들뢰즈 → J. 보드리야르 → G. 드보르 → W. 벤야민→ J.-P. 베르낭으로 잡아 논의의 경제성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도는 무엇보다도 이미지가 단지 ‘소비’되는데 그친 작금의 현실에 대한 철학적 대응 내지 반성의 필요성과 괘를 같이 한다. 부언컨대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생맥주나 커피를 마시듯 대하는 이미지들, 바로 이 이미지 개념이 너무도 감각적 수준에서만 차용되고 있으며, 이미지 자체 또는 그 내면적 깊이보다는 이미지의 외현(전시성, 선정성, 유희성, 일시성, 무의미성)에 치중해 있다는 필자의 비판적 견해가 작동된 해석이다. 제2장과 3장에 걸쳐 들뢰즈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장황하게 논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또한 이 두 학자를 보완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4장에서 국내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는 드보르를 소개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플라톤의 이데아로부터 시발된 필자의 궁극 물음은 “이미지란 무엇인가”에 있지 않고 “실재는 과연 어떻게 재현되는가”에 있었다. 실재의 재현 문제는 제6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으며, 필자는 다음과 같은 나름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i) 실재는 고정체가 아니라 생동체이다. ii) 실재의 재현 문제는 플라톤 이후 현대까지 철학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철학적 개념 중 하나이다. iii) 재현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대상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그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신화, 예술창작 분야뿐만 아니라 천문학, 물리학 등 과학이론에서도 적극적으로 응용되고 있다. iv) 그런 점에서 재현은 인식과 지각의 일반 형식이다. v) 따라서 실재의 재현 문제는 작금의 재현파괴와 같은 궤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사유과정에 있어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철학의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이데아와 실재, 실재와 이미지, 이미지와 시뮬라크르의 관계를 늘 고민하게 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감히 ‘재현적 동물’이라는 정의도 가능해 보인다. 콧등 앞까지 다가선 현대의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 필자의 화두는 실재(ler?el)에 대한 재물음을 통해 실재 세계(le monde du r?el, le monde r?el)가 철학의, 모든 이미지 관련 담론의 귀착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일곱 개의 사유여행이 끝을 맺게 된다. 그리고 특히 제7장에서는 6장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못했던 논의를 추가했는데, 베르낭의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유』에 기술된 ‘비가시적 형상화’로서 이미지 개념을 소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재삼 강조하지만 실재는 이미지(재현된 실재)의 뿌리이자 모태이며, 기실은 우리네 삶의 토대이고, 철학적 물음의 영원한 이정표이자 좌표이다. 결국 실재를 전제하지 않은 이미지, 시뮬라크르란 기본적으로 존재할 수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게 필자가 본 저서 전체에서 견지한 입장이다.
그렇다. 실재는 이미지를 빌려 자신을 표현할 뿐, 들뢰즈나 보드리야르 등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지는 실재로부터 분리되어 시뮬라크르로 돌진하지 않는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가 지나친 것이 아니라면, 들뢰즈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다”는 주장은 과연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그와 같은 비상식적인 사유 도약이 감행된 것인지, 재고되어 마땅하다. 그렇기에 이들의 주장은 이미지 뒤엔 구체적 사물 또는 생동하는 생명체들로 충만한 실재 세계, 그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보금자리, 우리의 현실 세계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억견(臆見)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디지털 미디어의 혁명은 근대의 모든 담론을 탈지층화하고 있다. 미디어적 사고는 지식이 과거에 누렸던 권위를 통째로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한 매체 위에서 또는 매체 안에서 개인과 집단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호출하고 대답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구체적 상대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익명의 가상공간 내에서의 유영(遊泳)은 인간에게 삶의 만족감과 행복을 선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욕구불만족에 쌓이게 할 뿐이다. 지식과 정보는 날로 늘어가지만, 그것들이 인류를 위해 공공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 투자된다. 미디어가 쉽게 권력이 되고, 이미지가 아무 곤란 없이 스펙터클로 변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드보르가 현대 사회를 지배경제 시스템의 이미지와 연결시켜 설명하면서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물’이라 통찰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진리며 윤리, 의미며 가치가 지구촌에서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낙엽처럼 나뒹구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3
재삼 강조하지만 본 저서는 이상에서 제기한 필자의 문제의식, 화두를 해소할 목적으로 집필된 것이기에, 고백컨대, 독자를 유혹할 만큼 ‘재미’가 있는 책의 반열에 들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철학적으로 이미지 범람 시대를 진단해보고, 이미지의 본래적 지위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의식했던 필자의 책임이 크다. 물론 이러한 다소 무모한 시도를 하게 된 동인은 필자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장-자끄 뷔넨뷔르제의 『이미지의 철학』에서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J.-J. Wunenburger, 1997). “스승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서울상상계학회(CRIS)를 이끄시며 늘 청년처럼 연구하시는 진형준 교수님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교수님 존경합니다!”
본 저서가 완성되기까지 누구보다도 김윤재 박사의 도움 또한 컸다. 개별 논문을 쓸 때도 그렇고 또 이 책을 엮어낼 때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주었기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김윤재 박사 사랑해!” 그리고 성긴 원고들이 하나의 씨줄로 엮이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준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의 장지호 원장님과 신선호 팀장님께도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결혼 후 선물다운 선물 한 번 건네준 적이 없는 아내 장혜영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여보, 그간 고생 많았는데 고마움의 표시야, 싸랑해!”
이 저서가 이미지에 파묻혀 사는 세대, 시뮬라크르가 대낮에도 횡행활보하며 진리와 진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기술복제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지혜로운 선택과 결단을 할 수 있는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머리말을 갈무리할까 한다.

2016年 丙申年 正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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